박문치의 음악은 기존의 대중음악--특히 2010년대 대중음악--과는 다른 이해법을 요구한다. 여기서 그를 이해하고자 할 때 반드시 참고야야할 곡은, 별로 알려지지 않은, "박문치 인트로"다. 무엇보다 박문치의 음악이 기반하고 있는 시공간 개념을 보여주는 곡이기에 언급할 가치가 있다. 여기서 박문치가 흔히 '뉴트로 장인'으로 소개된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뉴트로'는 한국의 21세기가 '시공간을 어떻게 이해하여 다룰 것이냐?"는 질문을 던지기 위해서 택한 용어와 같다. 과거의 사회과학적 용어를 이용해서 말해보자: '뉴트로'는 직선적 '진보의 시간'이라 여겨졌던 시공간 개념이 오늘날 한국 사회에 여전히 적용될 수 있는지를 묻는 암호명과 같다.
뉴트로의 시공간과 관련하여 일반적으로 던져지는 질문은 다음과 같다: 뉴트로는 1990년대의 패러디인가? 혹은, 뉴트로는 1990년대의 카피인가? 1990년대가 2020년에 뉴트로와 함께 되돌아올 때 뉴트로는 '1990년대'를 착취하고 있는가? 1990년대는 다시 되돌아올 수 없는 '황금시절'인 것에 비해 2020년은 다만 그것을 조야하게 복제하고 있을 뿐인 것인가? 뉴트로를 두고 부모 세대보다 잘 살 수 없게 된 세대가 부에 대한 희망이 남아있었던 시대를 추억하기 위한 시도라고 말하는 평자들을 떠올려보라. 그들의 설명에 따르면, 2020년에 뉴트로가 제시하는 1990년대는 결국 '가짜'에 불과하다. 작금의 10-20대는, 과거 세대보다 경제적으로 불우해진 결과, 그저 보다 행복했던 앞선 세대의 환영을 좇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논리에 따르면, 1990년대 문화의 진짜 주인은 1970년대에 태어난 이른바 X세대다. X세대보다 더 부유해질 수 없게 된 Z세대는 과거의 좋았던 X세대 문화를 카피하고 있을 뿐이다. 여기서 이러한 사회과학적 설명의 전제가 무엇인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시간은 직선적으로 흐르며 그 시간은 불가역적이라는 것이다.
직선적 시간관 속에서 보자면, 뉴트로의 시간은 진보의 시간에 찾아온 배신과 같다. 뉴트로는 '퇴보'다. 2010년대 달성된 '아이돌 음악 산업'이라는 걸출한 '프로페셔널리즘'을 거부하고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고자 하고 있기 때문이다. 1990년대 댄스 음악이 목표로 했던 미래가 2010년대 아이돌 음악이었다는 점을 기억하라. 아이돌 음악을 지금의 세계적 수준으로 키워낸 기획사 시스템은 1990년대 등장한 X세대 문화를 산업의 형태로 제도화하려는 과정을 통해 시작됐다. 2000년대 이후 양적으로 거대해진 기획사 시스템 속에서 연습생들은 양계장 합숙 생활을 하며 이른바 '피나는 노력'을 하게 된다. 이른바 스타가 되기 위한 공식이 세워진 것이다. 다른 한편 2010년대에 기획사 시스템을 아주 효과적으로 뒷받침해준 기둥의 하나는 티비에 만연했던 오디션 프로그램이기도 했다. 심지어는 이른바 '3대 기획사'가 직접 오디션 프로그램의 기획자로 참여하는 프로그램까지 있었다. 2010년대는 바야흐로 양계장의 시대였다. 양계장 밖으로 나가는 것은 관심을 받지 못하는 '패배자'가 되는 것을 의미했다. 이른바 '아싸'는 시대의 진보에 역행하는 자들에 불과했다. 이는 인디 음악가들에게 고난의 시절이 열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1990년대까지 인디 음악은 쿨하고 멋진 것을 의미했다. 당시 인디씬은 주류 음악보다 훨씬 더 세련되고 참신한 음악이 만들어지는 공간이었다. 그러나 양계장 시스템이 완전히 정착되는 2010년대에 오면 인디 음악은 패배자의 문화로 여겨지게 된다. 실제로 이 시절 주류 음악은 음악적 완성도면에서도 인디 음악을 압도하기 시작한다. 한 예로, 2009년 브라운아이드걸즈가 "아브라카타브라"라는 곡을 들고 나오자 인디 음악을 중심에 두고 사고하던 평론가들조차 주류 음악으로 관심을 돌리기 시작한다. 심지어 2013년에 오면 지-드래곤의 [쿠데타]라는 앨범이 [피치포크]에서 리뷰를 받게 된다. [피치포크]가 어떤 곳이던가? 영미권의 비주류 음악을 리뷰하는 곳으로서 1990년대 영미권 록음악에 대한 선망을 가지고 음악 듣기를 시작했던 한국의 인디 음악가 및 비평가들 사이에서 한때 '권위의 대상'으로 여겨졌던 혹은 '음악비평의 롤모델'로 여겨졌던 곳이다. (물론, 지금 [피치포크]를 '음악비평의 롤모델'과 같은 것으로 여기는 사람은 없다. 그곳에 있는 것은 '음반리뷰'이지 '음악비평'과 같은 것이 아니다. [피치포크]와 '비평'을 연계하는 일은 서구의 것 앞에서 열등감에 시달리며 판단력을 발휘하지 못했던 한국의 1990년대식 이야기일 뿐이다.) YG가 [피치포크] 및 다른 여러 영미권 언론을 상대로 캠패인을 벌인 결과였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수준 이하의 것을 리뷰할 [피치포크]는 아니라는 믿음 때문에 인디 음악 애호가들 사이에 상당한 문화적 충격으로 다가왔던 것이 사실이다. 쉽게 말해서 2010년대 초반은 본격적으로 인디 음악이 조악한 가내수공업품 정도의 것으로 전락하던 시절이었다.
2010년대에 이르러 심지어 인디 음악가들조차 이른바 티비 오디션 프로그램에 출현하고자 했다는 점이 그 시절의 분위기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슈퍼스타 K]라 불렸던 프로그램을 떠올려보라. 초창기 이 프로그램의 참신함을 견인했던 것은 과거 인디 음악가라 불렸던 자들이었다. 장재인이나 김지수, 버스커버스커, 울랄라세션 등이 대표적이다. 인디 음악가들조차 독립성을 잃고 기획사 앞에 줄을 서게 되는 일, 이것이 2010년대가 불가역적 진보의 시간'을 현실화하는 방식이었다. 2010년대는 소수의 성공이 수많은 실패와 패배를 게눈 감추듯 감추어버리는 '멋진 신세계'와 같았다. 2010년대의 관점에서 뉴트로가 '퇴보'로 비추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뉴트로 문화의 특징 중 하나가 오디션 따위 보지 않는 데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한다. 뉴트로 음악가는 공장식 양계장에 들어가지 않는다. 여기서 뉴트로 세대가 최초로 부모 세대보다 소득이 줄어드는 세대가 되는 현상을 다음과 같이 이해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들의 소득이 줄어드는 것은 오디션에서 우승하여, 혹은 3대 기획사 중 하나를 통해 데뷔하여, '아이돌 스타'가 되는 양계장 노선을 택하지 않기 때문이다. 거꾸로 뉴트로가 부모 세대보다 못한 '퇴보'로 비추어지는 것 또한 이러한 맥락 속에서다. 이것이 뉴트로를 바라보는 표준적 시각이다. 일리가 있는 이야기다. 그러나 '뉴트로' 자체를 이해했다는 생각이 들도록 하는 설명은 아니다. 이러한 이야기는 '어른들의 눈'으로 본 '아이들의 뉴트로'이지 않안가? 그에 비해, 앞서 말했듯, 박문치의 음악은 새로운 이해법을 요구하고 있지 않던가? 그들이 머릿속에 그리고 있는 대안 음악(alternative music)이 대체 어떤 것인지 궁금하지 않은가?
뉴트로의 시공간이 무엇인지 원점에서 다시 질문해야할 시점이 됐다. 단도직입적으로 답해보자. 이러한 답변이 가능하다: '뉴트로는 직선적 시간 구조 내에 있지 않다. 뉴트로는 불가역적 직선적 진보의 시간 개념에 가해진 시공간의 왜곡 자체에 다름 아니다. 뉴트로의 시공간은 가역적이다. 현재는 과거와 미래를 잇는 미완의 중간 단계를 뜻하지 않는다.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은 현재가 아니다. 주어진 것은 오히려 '과거'이고 또 '미래'다.' 좀더 쉽게 다시 말해 보자: 뉴트로의 시공간은 '공상과학적'이다. 뉴트로가 제시하는 과거 혹은 미래는 재현(representation)의 영역 속에 있지 않다. 오히려 그것은 즉각적으로 그리고 친밀하게 이곳에 주어진(present) 체험의 문제다. 뉴트로의 핵심은 직선적 시공간을 이루는 역사의 외부로 나가는 데 있다. 이 때문에 뉴트로는 공상과학적 현상으로 여겨져야한다.
여기서 실은 뉴트로가 1990년대로 돌아가는 데 관심이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해야한다. 뉴트로가 '1990년대'에 관심이 없다는 말이 아니다. 1990년대로 '돌아가는' 데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뉴트로에게 있어 '1990년대'가 역사적 한 시점으로서의 1990년대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뉴트로에 있어 '1990년대'는 지금 이 순간 주어진 살아있는 경험의 한 양식이다. 뉴트로씬에 몸담고 있는 기린이라는 음악가는 이렇게 말한다: "뉴트로를 왜 좋아하느냐고 물으면 이미 뉴트로가 아니라 레트로이고 좋아하는 이유가 없어야 뉴트로다." 뉴트로 세대는 '뉴트로'를 의미화하는 일 자체를 거부한다. 경험은 지금 이 순간 '주어진 것'이지 사후적으로 규정되는 '의미'의 문제이지 않다. 이렇게 말해볼 수 있다: 뉴트로 세대에게 '1990년대'는 군사 정부에 의한 독재와 그에 대한 민주적 저항으로 점철되었던 1980년대와 IMF 사태와 함께 찾아온 물질만능 신자유주의 시대인 2000년대의 중간에 위치한 한 시점으로서의 시대를 뜻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1990년대'는 개념적 시공간이 설정한 직선성의 밖--예컨대, '마침내 독재를 극복하고 일구어낸 민주적 제도가 화려하게 선사한 음악산업'이라는 진보적 내러티브의 밖--으로 나가 경험의 영역을 확보하기 위한 장치다. 쉽게 말해서, 뉴트로 세대에게 2010년대 음악 산업이 제시한 진보의 시공간은 지겹고 구태의연한 꼰대의 음악과 같다. 그들의 관심은 동시대 대중음악을 촉발시켰던, 그러나 직선적 시간으로 개념화되지는 않았던, 1990년대를 말 그대로 구현하는 것이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뉴트로의 시공간이 어떤 것인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박문치의 "박문치 인트로"로 가야한다. 아래 영상 속 "박문치 인트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박문치. 그리고 루루와 라라. 그들은 무엇인가 수상함을 품고 있다. 예로부터 전해지는 바로는 그들은 1558년부터 존재했으며 먼 우주로부터 지구인에게 사랑을 전하는 임무를 받고 이 지구에 오게 되었다. 음악이 없는 곳엔 모습을 비치지 않는 신비로운 존재라고 전해진다. 루루와 라라는 음악이 있는 어느 행성에서나 볼 수 있으며 그들의 수장 박문치의 음악을 듣기 위해서 모두가 박문치, 라는 구호를 외쳐야 했다."
박문치에 따르자면, '박문치'라 불리는 현상은 '1990년대'가 아니라 '1558년'부터 있었다. 사실 여기서 연도는 중요하지 않다. 심지어 '박문치'가 1억년 전부터 있었다고 말해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박문치'의 존재는 시공간을 이루는 원리로서 음악 자체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즉, '박문치'는 음악이라 불리는 신비로운 시공간의 경험 그 자체를 뜻한다. 여기서 '박문치'가 뜻하는 '음악'이 '역사'에 대조된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예컨대, 1억년 전 박문치는 2020년에 1990년대의 모습을 하고 나타날 수 있다. 동일한 방식으로 1558년이 2200년에 나타날 수도 있다. 이들에게 있어 시공간은, 직선적-불가역적이 아니라, 가역적이다. "박문치, 그리고 루루와 라라"가 "신비로운 존재"인 것은 그들이 시공간을 가로지르는 음악적 신비 자체를 칭하는 비인격적 용어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박문치, 그리고 루루와 라라"는 음악산업적 시공간에 구속된 한낱 밴드의 이름, 음악가의 이름, 연습생의 이름 따위가 아니다. "박문치 인트로"라는 곡에 사용되는 영상을 보라. 영상 속에 그 어떤 인간적 역사의 흔적도 없다.
인간을 결여한 영상은 그저 우주를 유영하며 시공간을 가로지르고 있다. 이것이 뉴트로의 공상과학적 시공간의 이미지다. 뉴트로는 역사적 과거의 한 시점을 '카피'하거나 '패러디'하는 '복고'의 문제가 아니다. 뉴트로는 과거로 돌아가지 않는다. 애당초 '현재'라는 불리는 직선상의 한 시점이 설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뉴트로는 사람들이 '현재'라고 부르는 것이 과거 그 자체라고 말한다. 혹은, 사람들이 과거라 생각하는 것이 이미 현재 그 자체라고 말한다. "뉴트로에 빠진 것은 다른 이유는 없고요, 그냥 멋있어서"라는 기린의 언어를 보라. 이들에게는 1990년대를 다른 여러 시대에 대조된 한 시대로서 인식하는 역사적 자의식이 없다. 이들에게 '과거'는 100년 전에 위치해있지 않다. 이들에게 '미래'는 100년 뒤 오는 역사의 한 시점이나 단계를 뜻하지 않는다. '미래'는 공상과학적으로 구현되는 경험의 문제다. 뉴트로는 역사를 '사유'하기 위해 '1990년대'를 소환하지 않는다. 음악산업적-직선적 시공간에서 탈출하여 시공간을 가로지르는 '체험'을 하려는 것 자체가 목적이다. 이를 '신비체험'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이제 "박문치, 그리고 루루와 라라"가 제공하는 아찔한 시공간 경험으로 빠져나와 정신차리고 다시 이야기해보자. 뉴트로는 두 가지로 이해될 수 있다. 첫째로, 뉴트로는 언제나 항상 등장하기 마련인 젊은 세대가 보여주는 공상적 특성을 묘사하는 새로운 용어에 다름 아니다. 의미화에 대한 거부 및 논리적-개념적-수학적 시공간의 거부 등을 내세우는 그들의 언어를 보라. 물론, 여기에는 미덕이라 할 만한 것이 있다. 즉, 뉴트로는 나름의 방식으로 기존의 질서에 저항을 한다. 예컨대, 이들은 아이돌 기획사가 제공하는 양계장에서 사육되지 않고도 자기 목소리를 낼 용기와 생기를 지니고 있다. 박문치가 '댓글 주접 놀이'라 명명한 현상을 보라. 2020년에 새로 나온 박문치의 곡을 듣고 사람들은 "이 곡을 들은 게 엇그제 같은데 벌써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되었네요"라고 말한다. 여기서 보는 것은 흔히 '추억'이라 불리는 '과거'가 실체도 없이 현재의 시간을 꿰차는 방식이다. 여기서 요점은 시공간의 경험이 더 이상 '실체'에 바탕하고 있지 않다는 데 있다. 시공간은 상상하는 순간 현실화되는 과거이며 미래다. "만일 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쩌면 과거에도, 현재에도, 모든 것은 영원히 존재할 것이다"라는 "박문치 인트로"의 영상에 삽입된 뉴에이지식 문구를 보라. 무(nothing)가 아니라 무엇(something)이 있다. '무'가 아닌 '무엇'으로서의 경험, 그것이 뉴트로에게 있어 '음악'이 의미하는 바다. 이를 마술적 리얼리즘의 세계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최근 '1일1깡'이라 불리며 주목을 받게 된 현상을 잠시 생각해보자. 비의 "깡"이라는 곡의 특징은 2017년에 나온 곡임에도 불구하고 세계관에 있어 2020년대가 아니라 2010년대 혹은 그 이전에 머무는 경향을 지니고 있다는 데 있다. 이는 비가 지니고 있는 과도할 정도로 성공지향적인 '프로페셔널리즘'의 결과다. 이 때문에 뉴트로 세대가 그의 곡에 반응하는 방식을 통해 새로운 세대가 '과거'라 불리는 시점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가능하다. 쉽게 말해서, 오늘날 10-20대가 보기에 주류 기획사에서 데뷔하여 성공하고 말겠다는 비장하고 남성적인 비의 세계관은 촌스럽고 낯선 문화에 불과하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바로 그렇기 때문에 시공간을 가로지르는 놀이의 대상이 된다. 즉, '1일1깡'은 매일 2000년대 혹은 2010년대로 돌아가는 시간 여행을 하는 일과 같다. 요점은 비의 남성적 비장미가 '성공하고 말겠다, 내가 너보다 더 뛰어나다는 것을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우승하듯 보여주겠다'는 세계관을 이루는 물적 토대로서의 시공간이 이미 사라지고 없다는 데 있다. 쉽게 말해서, 비가 머릿속에서 그리는 비장한 시대는 이미 지나가고 없다. 그는 홀로 그 자신의 허상과 싸우고 있었던 것이다. 비 자신마저 "깡"이란 곡에 대해, 지금 시점에서 되돌아보며, '멋있는데, 그래서 촌스러워'라는 식의 재평가를 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제 비의 비장미 가득한 남성적-불가역적 직선의 시공간은 '주접 댓글 놀이'에 의해 뒤틀리게 된다. 시공간은 가역적이다. '깡' 혹은 '깡다구'는 '1일1깡'을 통해 낯선 과거를 당장 이곳에 현실화하는 문제다. '깡'은 역사의 궤도에서, 혹은 오디션의 궤도에서, 우승자가 되기 위해 필요한 '깡다구'의 문제가 아니다.
인간 박문치, 즉, 박보민에게로 가보자. 박보민은 고등학교 때 주류 아이돌 음악을 들으며 '요즘 음악은 다 똑같아'라는 '음악적 사춘기'를 겪었다고 진술한다. 그의 음악은 2010년대적 아이돌 음악에 대한 거절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말하자면, 박문치의 공상과학적 시간 여행은 그 거절의 순간 기획된 것이다. 이것이 '뉴트로의 시공간'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그러나, 거꾸로 말하면, 뉴트로의 시공간은 '역사 및 주어진 논리 구조의 거절'에 기반한다. 그렇다면 이는 우리가 시공간의 구속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된 시대를 살게 되었다는 뜻인가? 프란시스 후쿠야마가 30년 전에 말했듯 역사는 종언에 이르렀으며 모든 것은 생각하는대로 이루어지는 시대가 온 것인가? 오늘날 코로나 바이러스와 함께 시공간이 뒤틀리며 상상이 곧 현실이 될 조건이 마련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상상은 물질화되어야한다. 결국 '건축'이 관건인 것은 이 때문이다. 상상은 구조화되어야한다. 예컨대, '조지 플로이드' 사태로 촉발된 '흑인의 생명도 중요하다'고 외치는 투쟁은 단순한 '반항'으로 끝나서는 안된다. 투쟁은 새로운 질서로 번역되어야한다.
뉴트로를 이해하기 위한 두번째 노선으로 이동해야할 필요가 바로 이 '건축의 요구'로부터 나온다. 1974년 [우주가 그곳이다](Space is the Place)라는 공상과학 영화를 찍은 선 라(Sun Ra)가 한 가지 참조점이다. 선 라는 아프로퓨처리즘(Afrofuturism)으로 널리 알려진 미국의 재즈 뮤지션이다. 선 라의 작업이 주목할 만한 이유는 그가 미국 사회의 가장 거대한 모순인 흑백문제를 시공간에 관한 음악적 사유로 발전시켰기 때문이다. 그 결과물의 하나가 [우주가 그곳이다]란 영화다. 영화의 설정은 다음과 같다. 1969년 투어 후 선 라는 지구상에서 사라져 소식을 들을 수 없다. 그 동안 다른 행성에 다녀온 것이다. 그는 미국에 머물고 있는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을 새로운 행성으로 이주시키고자 한다. 그가 흑인들을 새 행성으로 이주시킬 도구, 즉, 사람들로 하여금 시공간을 넘나들게 해줄 도구는 음악이다. 재즈가 만들어내는 원시적-절단적 특성을 보라. 재즈의 시간은 음악 산업의 구조를 거부한다. 재즈는 새로운 시공간의 창출을 의미한다. 즉, 선 라가 '우주'로 묘사하는 '공간'(space)은 지구라는 익숙한 '장소'(place)를 근간에서부터 절단하는 음악의 층위를 이룬다. 이것이 노예선을 타고 강제적으로 미국 대륙으로 건너오게 된 아프리카인들이 겪는 디아스포라적 현실 경험이다. 사실 시공간에 대한 관심은 비단 선 라만의 특징이 아니다. 동일한 관심이 재즈 음악가로 활동하기도 한 랄프 앨리슨의 [보이지 않는 인간]이란 소설에서도 나타난다. '흑인은 최초의 근대인'이라는 토니 모리슨의 진술 또한 같은 맥락 속에 있다.
아프로퓨처리즘 및 재즈 일반의 문제의식으로부터 시공간을 사고하는 일이 동시대 사회 현실을 재구성하기 위해 필수불가결한 작업이라는 사실을 볼 필요가 있다. 이는 음악이 단순히 공상과학적 체험의 문제일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음악의 공상과학적 측면은 사회의 상징적 층위에 대한 반응 및 반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음악은 단순히 순수한 경험의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이는 음악이 역사에 종속적이어야한다는 말을 하기 위함이 아니다. 말할 것도 없이 음악은 그 자신의 논리를 지니고 있다. 즉, 음악은 역사의 구속 이전에 위치하는 상상의 산물이기도 하다. 그러한 자율성 없이 흥미로운 음악적 결과는 나올 수 없다. 그러나 음악의 상상력은 동시에 무의식의 층위를 그 자신의 등 뒤에 지니고 있기도 하다. 들뢰즈의 용어를 빌려서 말해보자. 작곡된 현실로서의 음악(the actual)은 가상적인 것(the virtual)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즉, 상상력의 결과물인 작곡물은 작곡되지 않은 것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전-음악적(pre-musical) 강도(intensity)로서의 소리라는 층위가 그것이다. 그러나 강도에는 한 가지 덧불여할 것이 있다. 그것이 바로 뉴트로가 부정하는 '무'(nothing)의 영역이다. 즉, '무엇'(something)이 있기 위해서는 반드시 '무'(nothing)가 있어야한다. 바로 이 '무'로부터 창출되는 전음악적 시공간이 '뉴트로'가 음악을 통해 사고해야할 영역이지 않은가? '역사' 자체를 '무'가 산출해내는 결과로 보아야할 필요가 여기서 나오지 않는가? 즉, 뉴트로가 보여주듯, '무엇'만이 있을 때 우리는 '역사'에 접근하지 못한다. 역사는 '무로부터 창조'(creatio ex nihilo)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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