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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트로, 공상과학적 과거, [88/18], 서울올림픽

by spiral 2020. 6. 4.

아래 [88/18]이라 이름 붙여진 '서울올림픽 30주년 기념' 다큐멘터리 영상을 통해 어떻게 '복고'가 '세련됨'의 원천이 될 수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요즘말로 치면 '뉴트로'는 '레트로'와 다르다. 어째서 그러한가? 아래 영상의 8할을 차지하는 것은 1980년대에 찍혀진 영상이다. 그 자체로는 무척이나 촌스러운 것들이다. 만약 해당 영상을 통째로 본다면 지겨워서 금방 정지 버튼을 누르고 말 것들이다. 그러나 아래 다큐멘터리 속에서 80년대 영상은 새 생명을 얻고 있다. 그 원인은 편집 기법에 있다. 다큐멘터리의 의미 지평을 완결시키는 '나래이션'이 없기 때문이다. 그 결과 80년대 영상은 현대 미술관에서 관람하는 일련의 박제된 이미지와 같이 제시된다. 파편으로 박제된 이미지는 세련되다. 땀내나고 구역질나는 신체가 살해된 후 세련된 현대 미술관적 맥락 속에 다시 배치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아래 다큐에 피눈물 나는 맥락이 완전히 없는 것은 아니다. 판자촌과 같았던 상계동 주거 시설 철거를 둘러싸고 주민들이 겪었던 이야기가 일정 부분 소개된다. 그러나 그들의 목소리가 완전히 육화되어 인물로서의 생기를 얻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들의 목소리가, 역사의 중심을 관통하는 '구체적 보편'으로서가 아니라, 파편적 한 사례로서 삽입되어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의 사례는 가슴 아픈 이야기다. 그러나 지금은 더 이상 반복되지 않는 지나간 과거의 한 사례다. 아래 영상을 보고 88올림픽을 '다소의 희생을 치루고서라도 성공시킬 가치가 있었던 국가행사'로서 여길 수 있게 되는 것은 이러한 배경 속에서다. 이것이 서사가 이미지로 대체될 때 얻어지는 효과의 하나다.

여기서, 유튜브와 스마트폰 등을 통해 누구든 영상 제작자가 될 수 있는 지금의 환경과 달리, 1980년대까지 영상을 제작하는 축이 방송국과 같은 국가 기관이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아래 다큐의 한계가 이 물리적 특성으로부터 기인한다. 1980년대를 이해하기 위해 당시 방송국에 의해 제작되었던 영상에 기대면 마치 80년대로 생생하게 돌아갈 수 있을 것만 같이 느껴진다. 영상은 그 시절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지 않겠는가? 그러나 당시 검열 기능에 충실했던 방송국이 제작한 영상 속에서 1980년대 일반인들이 실제로 느꼈던 감정과 그들이 품었던 생각은 애당초 담겨져 있지 않다. 당시 방송국 영상이라는 것은, 미공개 영상이라 할지라도, 항상 이미 최소한도로 편집된 것에 불과하다.

[88/18]을 볼 때 브리콜라쥬를 통해 이미지가 스스로 말을 하게 만들어줄 일반인의 목소리를 담아낸 당시 영상이란 것이 애당초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브리콜라쥬에 의한 프로젝트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여러 다양한 개인이 직접 그 자신들의 관점에서 찍은 영상이 있어야한다. 그러나 스마트폰 등의 형태로 보편화된 영상 촬영 기술이 당시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당시의 현실을 재발굴하는 데 있어 방송국이 남긴 영상 증거보다 그 시절을 살아낸 사람들의 언어적 증언이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이 때문이다. 다시 말해, 많은 경우, 영상 시대의 통념과는 달리, 언어가 이미지보다 더 현실적이다. 이 때문에 '나래이션' 없이 방송국 영상 만으로 1988년이 스스로 말을 하도록 만들겠다는 아래 프로젝트는, 영상을 통해 역사가 스스로 말을 하도록 하겠다는 그 의도와 달리, 세련된 영상미를 과시하는 동시대적 뉴트로 '스타일'의 문제가 되고만다. '나래이션'은 단순히 '현실'을 가로막는 언어적 장애물이 아니다. '나래이션'은 현실을 최초로 포착해내는 장애물이다.  

사실 1980년대에 서울올림픽을 성공시키고자 전두환 정권이 사용했던 정책 자체가 서사의 이미지화에 다름 아니었다. 88올림픽 관제곡이라 할 만한 정수라의 "아, 대한민국!"이라는 노래를 보라.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얻을 수 있고, 뜻하는 것은 무엇이건 될 수가 있어"라고 말한다. 그 어떤 장애물도 존재하지 않는 유토피아를 묘사하는 노래와 같다. 상상이 곧바로 물질적 현실이 바로 일론 머스크가 개발하고 있는 '뉴럴링크'가 꿈꾸는 세계이지 않은가? 즉, 인간의 뇌에 직접 연결된 컴퓨터망을 통해 언어 이전 경험의 세계를 서로 공유하게 되는 세계의 모습 말이다. 뉴럴링크가 바로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얻을 수 있고, 뜻하는 것은 무엇이건 될 수 있는' 세계이지 않은가?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어떤 특정인과 섹스를 하고 싶은가? 뭐하러 귀찮게 그 사람을 직접 만나 그 모든 유혹의 과정 혹은 실랑이의 과정을 벌여야하는가? 자본주의적 시간관에 따르자면, '시간은 돈'이지 않은가? 게다가 상대를 '꼬시려면' 맛있는 것이라도 돈을 써서 사주어야한다. 뉴럴링크가 있다면 그 모든 소모적 과정은 필요없다. 왜냐하면 그 사람과 섹스를 한 적 있는 사람의 경험을 뉴럴링크를 통해 직접 공유하면 되기 때문이다. (인터넷에서 포르노그라피를 보는 일이 이미 이 '경험의 직접적 공유'라는 이상을 따르고 있지 않은가? 물론 뉴럴링크 포르노와 인터넷 포르노의 차이는 인터넷 속에서는 아직 자아와 타자 사이의 간극이 존재하여 완벽한 직접 공유의 이상이 구현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즉, 인터넷 포르노 속에서 시청자는 아직 완전히 영상 속 배우가 아니다.)

정수라가 1980년대 묘사했던 "대한민국"은 이미 일론 머스크적 '뉴럴링크'의 세계와 다르지 않았다. 미래는 과거 속에 이미 있었던 것인가? 이것이 오늘날 '뉴트로'가 떠오른 이유인 것인가? 여기서 '뉴트로'가 '나래이션 없는 역사'라는 점을 보아야한다. 뉴트로는 과거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뉴트로는 과거의 이미지를 직접 보여줄 뿐이다. 뉴트로와 함께 복권된 과거가 대부분 과거의 공산품, 예컨대 두꺼운 유리로 만들어진 델몬트 오렌지 쥬스병과 같은 것이라는 사실을 보라. 이 델몬트 유리병의 핵심은 그것이 한 시대를 풍미한 대표적 공산품이었다는 데 있다. 여기서 공산품과 방송국 영상 사이의 유사점에 대해 볼 필요가 있다. 그들은 모두 무엇인가를 성형수술한 결과들이다. 실제로 1980년대에서 90년대 초반까지 델몬트 오렌지 쥬스라는 것은 특별한 쥬스였다. 냉장고 문을 열고 그 두터운 유리병을 꺼낼 때 그것은 미지의 외국에서 온 지상 최고의 마실거리를 손에 쥐는 일과 같았다. 즉, 델몬트 오렌지 쥬스를 마시는 것은 때로는 달기도 하지만 때로는 시기도 하여 맛이 보장되지 않는 못생긴 귤을 직접 까먹는 일과는 질적으로 다른 일이었다. 그것은 오렌지 빛깔의 정수만을 뽑아 농축한 신비로운 물감을 마시는 것과 같은 일이었다. '델몬트 오렌지 쥬스'는 한국의 귤이 성형수술될 때 얻어진다. 귤과 '델몬트 오렌지 쥬스'의 차이란 트로트와 아이돌 음악의 차이와 같은 것이지 않은가?

귤이 '델몬트 오렌지 쥬스'가 되어야했듯 상계동 판자촌의 애환은 정수라의 뉴럴링크적 "대한민국"이 되어야했다. 그것이 당시 정권이 서울을 아이돌 얼굴과 같이 화장시켜 전세계에 재시하고자 했던 방식이다. 말하자면, 서울올림픽은 한국이 '이미지'의 시대로 들어가는 관문과 같았다. 여기서 뉴럴링크의 핵심이 '나래이션'을 생략하고자 한다는 데 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88/18] 또한 결코 말을 하지 않는다. 이것이 '뉴트로'다. 뉴트로는 과거를 직접 만지거나 보고자 한다. 뉴트로는 과거를 앎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 뉴트로와 함께 과거는 동시대적 체험의 대상이 된다. 예컨대, 뉴트로는 과거의 시공간을 담아낸 카페와 같은 곳에 가는 형태로 주어진다. 혹은 그곳에 가서 옛 스타일의 옷으로 갈아입고 사진을 찍는 일로서, 즉 직접적 체험의 대상으로서, 주어진다. 과거는 더 이상 역사 교과서 속에 있지 않다. '뉴트로'가 의외로 공상과학적 시간여행의 일종으로서 이해되어야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과거는 세련되다. 세련된 미래는 공상과학적 과거 속에 있다. 우리는 미래에 도달하기 위해 과거로 시간여행을 해야한다. 이제 과거는 고찰과 반추의 대상이 아니다. 이것이 '시간여행'와 '역사'의 차이다. 뉴트로 혹은 공상과학적 시간여행은 과거를 성형수술하여 지금 이곳에 물질적으로 다시 제시한다. 반면 역사는 지금 이 순간 반복되어 되돌아오는, 장애물과 같은, 과거를 뜻한다. 공상과학적 시간여행은 이미지의 문제다. 반면 역사는 언어의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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