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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람, 심청가 (뮤지컬 '서편제' 중에서)

by spiral 2020. 5. 9.

'소리'는 '음악'과 다르다. 아래 것을 '음악'이라 부른다면 무례라고 밖에는 할 말이 없다. 소리는 음악 이전의 영역과 맞닿아있다. 음악적 승화 이전의 영역 말이다. 보통 이를 '한'의 영역이라 부른다. 혹은, 소리는 저승으로부터 들려오는 절규라고 말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산 자의 관점에서 말해보자면, '무섭다'는 느낌에 근접하게 되는 경험을 선사하는 것이 '소리'다. 그런 의미에서 '소리'는 듣는 이를 서슬 퍼런 귀신의 영역으로 인도한다고 말해볼 수 있다. 즉, '소리'를 듣는 것은 살해당한 자가 육체도 없이, 산자의 동의 없이 그 자신의 권한만으로, 다시 찾아오는 경험을 하게 되는 것과 같다. 그러나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소리'는 현상학적 경험의 영역 자체가 파열될 때 찾아온다. 경험이 파열되는 영역은, 서구 미학의 관점에서 말하자면, '숭고'라 불린다. 사실 숭고는 아름다움이 파열되는 경험이라는 점에서 미학 내부에 있지만 결코 미학의 영역에 속하지 않는다. 아래 영상에 담긴 '소리'가 아쉬운 이유가 이 미학의 문제와 관련이 있다. 아래 영상에서 중반 이후 덧붙여진 서구적 음악 편곡 양식이 '소리'의 비육체성에 다시금 미학적 육체성을 부여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작곡'이라 불리는 '소리'의 재조직 방식이 귀신의 소리를 멜로드라마적 인간 감정으로 환원시켜버리고자 한다. 이는 산 자의 관점에서 일방적으로 죽은 자의 비육체적 목소리를 생명을 지닌 육체와 화해시키려는 시도와 같다. 이것이 '뮤지컬'이라 불리는 서구의 대중화된 음악 양식이 국악과 융합될 때 일어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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