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듣는 글렌 굴드의 연주다. 20년도 더 전에 굴드의 연주를 시디로 사서 들었더랬다. 물론 아직도 가지고 있다. 3-4종 가지고 있지 싶다. 내가 클래식 음악을 듣기 시작한 것은 대학에 들어간 후의 일이었는데 그 이전까지 난 주로 영미권 록 음악을 들었던 터였다. 재미있는 것은 당시에 록음악을 듣는 행위가 꼭 록음악이라는 특정 장르 자체에 국한된 일이라기보다는 음악 일반에 대한 진지한 관심이 표현되는 한 양상 정도로 여겨졌다는 데 있다. 1990년대에 록은 대중음악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팝과는 다른 것, 즉, 대중적이라기보다 예술적인 것의 대명사와 같이 여겨졌었다. 록을 듣는 행위는 '나는 음악을 특별하게 여기는 사람이에요,' '나는 아무 음악이나 듣지 않아요'라는 뜻과 같았다. 대학에 들어간 후 자연스럽게 재즈와 클래식을 듣기 시작한 것은 그러한 맥락에서였다. 예술로서의 음악을 듣는 사람이 록음악보다 더 진지한 형태의 음악이 있는데 듣지 않는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내게 있어 재즈와 클래식은 록의 연장선상에 있으면서 동시에 록보다 더 훌륭한 음악을 뜻했다. 닥치는대로 사서 들었던 것 같다. 당시는 시디의 시대가 끝나가는 마지막 시점이었다. 대학에 들어간 후 대략 4년 동안 400여 장의 음반을 사서 들었고, 그 중 절반은 재즈와 클래식이었다. (이 짧은 시절이 지난 후 난 시디를 사본 적이 없다.) 사실 난 그때부터 록음악을 시시하게 여기기 시작했었다. 독특한 실험적 록음악이 아니면 듣지 않았다. 대부분의 경우 재즈와 클래식, 그 중에서 피아노곡 위주로 클래식 음악을 들었다. 글렌 굴드는 그 중 하나였다. 이와 관련해서 지금 시점에서 내가 궁금한 것은 다음과 같다: 과연 K-pop을 듣는 세대는 예술적 음악 일반에 대한 자의식을 가지고 음악을 듣는 부류인가? 그들이 K-pop을 들을 때 그 행위는 재즈와 클래식을 포함한 보다 넓은 의미의 음악을 능동적으로 추구하는 행위로 이어지는가? 난 이에 대한 답을 지니고 있지 않다. K-pop을 듣는 부류와 교류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궁금하기는 하다.
최근 '텍스트-힙'이라는 용어가 유행하는 것 같다. 책을 읽는 일이 힙하고 멋진 일이라는 것이다. 지적 즐거움에 대한 동경과 허세, 그리고 자의식 등이 종합적으로 작동한 결과다. 나쁘지 않은 현상이라고 본다. 그렇게 하라고 권하고 싶다. 그렇게 시작해서 결국 진지하고 어려운 책을 접하게 되고 읽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도 어릴 적 그렇게 책을 읽었다. 물론 여러 이유가 있었다. 실존적 차원에서 찾아내야 할 답변이 있었다. 그러나 또한 멋있어 보이고 싶어서 어려운 철학가들의 책을 사서 읽은 면도 있었다. 허영은 출발점에서 동기부여의 역할을 한다. 그 허영이 그 내부에 진실된 것 혹은 의미있는 것으로 이어질 요소를 지니고 있느나 아니냐의 문제가 남을 뿐이다. 예컨대, 침팬지와 같은 물리적 힘의 과시와 달리 지적 허영은 그 내부에 자기 성찰의 계기를 지니고 있다. 난 동일한, 건전한 허영이 음악 일반에서도 일어나길 바란다. 예술적이고, 실험적이고, 독특한 음악, 진지한 음악은 어렵게 들린다. 그러나 그러한 음악을 듣는 일이 사람들 사이에서 멋진 일로 여겨져 보다 많은 사람들이 평소 잘 듣지 않았던 음악을 접하고 즐기게 되기를 바란다. 그 정도의 도전과 발전도 허락하지 않는 일이라면 음악 듣기는 음악시장과 언론이 저들 좋은대로 강제하는 것을 수동적으로 수용할 뿐인 그리하여 의미없는 일에 불과한 것이 될 것이다.
처음부터 좋은 음악이란 것은 없다. 나 또한 굴드의 연주가 처음부터 꼭 좋았던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지금 20년이 더 흘러 다시 들으며 난 아래 연주가 내게 큰 만족을 준다고 느낀다. 사람의 감수성은 10대에서 20대에 만들어진다. 이 시절이 지난 후 접하게 되는 것들은 진정 자기 것이라고 느끼지 못한다. 이 특권과 같은 시절이 지나기 전에 가능한 다양한, 그리고 훌륭한 것들을 많이 접해야한다. 훌륭한 음악, 영화, 문학, 책 등을 최대한 접해야한다. 40대 이후로는 그 시절 쌓아둔 것들의 기억을 가지고 살아간다. 난 10대 및 20대 시절 여행이라는 것을 해본 일이 거의 없다. 관심도 없었다. (사실 지금도 별 관심 없다.) 어째서 그럴 수 있었던 것일까? 항상 여행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해보고 싶다. 내게 예술이 의미했던 바가 그런 것이었다. 역설적이지만 물질은 결코 소유할 수 없다. 뉴욕에 여행을 간다고 해보자. 그 거대한 도시 전체를 물질적으로 가질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곳에서 음식을 먹는다고 해보자. 물질이 잠시 미각을 자극한 후 소화기관으로 들어간 후 일부가 내 몸을 구성하게 된다. 그러나 결국 몸의 세포는 끊임없이 사라지고 재생되는 과정 속에 있을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끝에는 결국 죽어서 사라진다. 가질 수 있는 것은 의미라고 불리는 내면화된 물질 뿐이다. 예술은 내면화된 물질을 다루는 양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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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ldberg Varia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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