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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Surl)과 새소년: 1990년대 얼트 록의 귀환

by spiral 2019. 1. 7.

근래 등장한 신인 록 밴드들을 찾아보며 알게 된 사실 중 하나는 최근 1990년대식 얼트 록이 되돌아오는 듯 보인다는 것이다. 아래 설이라는 팀을 보라. 곡의 정서나 곡의 전개 방식 등이 그 시절 그 음악 그대로다. 예컨대, 90년대 후반 팝음악화되어가던 때의 얼트 록에 노이즈 록이 덧붙여진 형태다. 거기에 블루지한 기타 연주력을 하나 더 더하면 설이란 밴드의 밑그림이 나온다. 때론 험(Hum)이 떠오르기도 하고 때론 콜드플레이(Coldplay)가 떠오르기도 하고 기타등등이 떠오르기도 한다. 아래 "Like Feathers"의 뮤직 비디오는 어떤가? 뮤직 비디오 속 아이들의 차림새를 보라. 특히나 이들이 아이폰 대신 소니 비디오 카메라를 들고 있다는 점을 보라. 이들은 스마트폰의 화면을 들여다보며 각자 고립되어 있지 않다. 스마트폰 화면을 들여다보는 대신 서로를 들여다보고 있다. 그리고 같이 모여 뛰어놀고 있다. 이는 1990년대에 대한 오마쥬이지 않은가? 

새소년의 경우도 그랬지만 흥미로운 점은 이들 설 또한 충실한 연주력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미 말했듯 악기를 다룬다는 것은 오늘날 이미 구식의 일에 속한다. 몸을 사용해야하기 때문이다. 아이돌 그룹의 랩과 그들의 군무를 위한 한낱 반주가 되어버렸을 뿐인 '가짜 음악'에 진저리가 날 때가 된 셈이다. 주류 아이돌 그룹이 사용하는 전자 음악을 생각해보라.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진짜 악기를 연주하는 밴드를 부를 수 없기에 노래방 기계를 동원해 전자음으로 모방한 합성음의 반주를 깔게 된 것과 같지 않은가? 다시 말해 그들이 사용하는 전자 음악이라는 것은 사실, 전자 음악이 아니라, 스펙터클한 그들의 군무를 효과적으로 상연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깔아주어야 하는 '노래방 기계 반주음'에 불과하지 않은가? 생각해보라. 전통적으로 음악을 하려고 했던 사람들은 악기를 다루기 위해 고된 연습을 했다. 지금은 음악을 하기 위해 그저 춤 연습을 할 뿐이다. 약간의 보컬 레슨과 함께 말이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듣는 것으로서의 음악이 보는 것으로서의 음악으로 옮겨가며 일어난 일이다. 

전통적 관점에서 엄밀하게 말하자면, 아이돌들은 무용수지 음악가가 아니지 않은가? 오늘날 '립싱크'라는 것이 더 이상 중요한 이슈가 되지 않게 된 이유가 여기 있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가수'가 무대 위에서 립싱크를 하느냐 실제로 노래를 부르느냐는 가수의 가수됨을 결정짓는 대단히 중요한 요소였다. 립싱크를 했다는 게 드러나면 가수 입장에서는 거의 치욕을 느껴야했다. 그러나 오늘날 그러한 것은 더 이상 중요한 잣대가 아니다. 이제는 모두가 음악에는 보는 음악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음악은 볼거리다. 그렇다면 과거 립싱크라 불리던 스캔들은 어떤 경우에 아이돌 그룹에게 일어날 것인가? 어제 마신 술이 덜 깬 나머지 무대 위에서 칼 같은 군무가 깨지며 개별적 인간성을 드러내게 될 때에야 그러한 일이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데뷔 전 합숙 생활 등을 통해 양계장 생활을 충분히 한 나머지 그런 '프로페셔널' 하지 못한 일은 그들에게 일어나지 않는다. 이들은 정해진 대로 춤을 추는 기계들이지 않은가? 이들이 무대 위에서 상연하는 군무에 '애드립'이 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군무'의 정의란 것 자체가 '애드립'을 불가능하게 하는 데 있지 않던가? 즉, 누군가의 애드립이 들어갈 경우 무너지게 되는 것이 바로 그 '군무'이지 않은가? 그래서 '군무'에는 오직 완벽한 통제만이 있지 않은가?

물론, 오늘날 들을 거리로서의 음악이 사라진 것은 전혀 아니다. [나는 가수다]에서부터 시작해서 [복면가왕]으로 이어지는 경향에서 보듯, 보는 음악에 대항하여 듣는 음악은 '가수'라는 정체성을 고도의 보컬 기술을 지닌 옛 장인들을 불러냄으로써 수호하고자 한다. 그렇게 그들 역시 '노래'를 삶의 영역에서 박물관의 영역으로 보내버렸다. 그들의 노래는 또한 항상 기계와 같이 완벽한 기예를 흐트러지는 법 없이 보여주지 않던가? 그것이 '노래 장인'들이 아이돌들의 보는 음악에 대항하는 과정에서 그들 스스로를 또한 박제된 '완벽함'에 가두게 되는 방식이지 않은가? 한 예로, '노래 실력'을 강조하는 경우 치고 가수가 악기를 직접 연주하는 동시에 노래를 부르는 경우는 없다. '노래'의 기예를 최대화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달리 말하면 이는 이들 가수왕들 또한 악기의 소리를 한낱 배경에 깔린 반주로서나 사용한다는 뜻과 같다. 여기서 알게 되는 것은 오늘날 '노래'와 '(배경) 음악'이 철저히 이분화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1990년대 얼트 록 밴드들에게 매력적인 점이 한 가지 있었다면 그것은 보컬이 메인 기타리스트이기도 했다는 사실이다. 커트 코베인을 떠올려보라. 그는 뛰어난 기타리스트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기타리스트로서 그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어떻게든 몸부림을 쳐서라도 다 했다. 한 예로 그는 무대 위에서 기타 솔로를 선사하는 대신 기타를 긁고 부수고 기타등등 몸부림을 치며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전달했다. 기타 연주에 있어 1990년대적 모범을 보여주는 것은 빌리 코건이다. 그의 기타 실력은 과거 전통 록 기타 장인들에 못지 않게 수준급이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는 보컬로서 미달인 경우에 훨씬 더 가까웠다. 여기서 요점은 보컬과 악기 두 가지를 동시에 하게 되면 독특한 결점이 항상 발생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생성되는 결점은 결코 그들의 음악에 해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의 결점이 바로 그들의 음악을 보다 완전하게 만드는 매력으로 작동했다. 그것이 바로 '군무'가 허락하지 않는 혹은 박물관적 가수왕 음악이 허락하지 않는 여백이지 않은가? 그것이 이른바 개별성이 불완전함을 통해 발현되는 방식이지 않은가? 

새소년과 설로 돌아가자. 이들의 매력은 사실 보컬이 또한 밴드의 훌륭한 메인 기타리스트이기도 하다는 데서 만들어진다. 설의 "The Lights Behind You"라는 곡을 들어보라. 그는 블루지한 기타 솔로를 선사할 만큼의 실력을 기타리스트로서 충분히 지니고 있다. 이는 2000년대 이후 얼트 록을 하겠다고 뒤늦게 나섰던 밴드들에게서 사라져가던 특성이다. 전자 음악이 음악 시장의 전면에 등장하게 되는 2000년대가 되면 록 밴드 사이에서조차 악기 연주 능력이 크게 중요하지 않은 요소로 여겨지게 되기 때문이다. 국내의 경우 혁오 밴드가 결여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블루지한 기타리스트로서의 면모다. 몇년 전 전자 음악으로 점철한 음악 시장에 의외로 오랜만에 모던 록에 기반을 둔 혁오 밴드가 인기를 끌며 등장했을 때 개인적으로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던 이유가 여기 있다. 그들이 2000년대 이후 등장한 록 밴드의 전통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못하다고 여겼던 까닭이다. 

조금 더 오래된 경우로 버스커버스커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사실 이 밴드는 독특하게 토속적인, 민요에서 발견될 법한, 타령조의 노래 가락으로 인해 록 밴드라는 생각 자체가 별로 들지 않는 경우다. 이러한 이들에게 블루지한 기타리스트로서의 면모가 있었을리 만무하다. 2012년 당시 이들의 등장을 '록 음악의 부활'가 같은 것으로 볼 여지가 전혀 없었던 것은 이 때문이다. 말하자면, 보컬과 기타와 베이스와 드럼을 앞세운다고 해서 록 음악인 것이 아닌 셈이다. 그렇다면 보다 오래된 국카스텐의 경우는 어떤가? 보컬인 하현우가 무대 위에서 종종 기타를 멜 때가 있지만 그가 기타리스트인 것은 아니다. 그는 오히려 '가왕 보컬리스트'다. 그러한 면모는 1980년대 헤비메틀 밴드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었던 가왕 보컬과 기타왕 기타리스트로 이루어진 투톱 체제에 훨씬 잘 어울리는 면모다. 말하자면, 1990년대 얼트 록은 1980년대 헤비메틀 투톱 체제가 불완전한 원톱 체제로 바뀔 때 만들어진다. 그런 의미에서 국카스텐의 얼트 록 밴드로서의 한계가 역설적이게도 그의 완벽한 보컬리스트로서의 면모로부터 기인한다고 말해볼 수 있다. 즉, 그는 얼트 록 밴드가 되기에 너무도 완벽한 보컬 실력을 가지고 있다. 사실 이 때문에 애당초 그는 국카스텐 내에서 자신의 보컬 실력을 과시하지 않은 바 있다. 그러나 그것이 그렇다고 국카스텐에게 1990년대식 나사 빠진 듯한 매력적인 불완전함을 가져다준 것은 아니다. 국카스텐은 데뷔 앨범에서부터 지독하게 '프로페셔널'한 사운드를 들려주지 않았던가? (비슷한 맥락에서 국카스텐에게 작금의 대중적 인지도를 가져다준 것은 [복면가왕]에서 그가 보여준 1980년대식 가왕적 면모이지 국카스텐 자체의 모던 록적 면모가 아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최근 등장하는 밴드들, 예컨대, 새소년과 설 등이 기반한 전통과 혁오 밴드 등이 기반하고 있는 전통이 분명히 구분되어야 한다. 새소년과 설은 혁오 밴드나 버스커버스커에 비할 때 훨씬 더 구식이고 훨씬 더 록적이다. 이들과 함께 1990년대가 돌아오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쯤에서 록이 돌아온다는 것의 의미를 분명히 정의내릴 필요가 있다. 그것은 밴드 체제가 돌아온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정확히 '기타리스트'가 돌아온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한 또한 이는 1980년대적 메틀 밴드의 장인 기술자 기타리스트가 돌아온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얼마전 한 영화를 통해 1980년대 밴드 퀸이 재조명을 받게 되자 티비 방송이 장인 보컬리스트들을 불러다 퀸의 노래를 부르게 했다. 거기서 한 가지 흥미로웠던 장면은 1980년대 메틀 장인 기타리스트 김도균이 장인 가왕 김연우와 함께 "보헤미안 랩소디"를 재현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보는 것이 바로 1980년대적 장인 기타리스트와 장인 보컬리스트 투톱 체제의 원형이지 않은가?) 지금 되돌아오는 기타리스트는 불완전한 기타리스트다. 요점은 밴드 내 메인 기타리스트가 밴드의 보컬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바로 이 결정적 결점이 1990년대 얼트 록의 정신을 만들어낸 바탕이지 않은가? 그것이 그들을 어딘지 완벽하지 않지만 또한 예술가적 야심을 지닌 음악가로 만들어낸 원동력이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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