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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밀함, 내재성, 생태학, 정동, 삶

by spiral 2019. 3. 17.

미국의 문학 연구 영역에서 근래 가장 주목 받는 단어의 하나는 '친밀함'(intimacy)다. 이는 철학적 개념이라 할 수 없다. 오히려 개념의 층위를 건너뛰고자 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그러나 사실 여기에는 철학적 배경이 분명히 있다. '내재성'(immanence)이 그것이다. 20세기 말 철학 영역으로부터 불어온 들뢰즈 바람을 떠올려보라. 그를 21세기적으로 수용한 문학 연구 판본이 '친밀감'이다. 그러나 그 안에서 들뢰즈의 흔적을 더듬는 것은 전혀 요점이 아니다. 사실 근래 미국 문학 연구계의 특징은 신진 연구자들이 20세기 후반 불어온 프랑스 철학을 이제는 그들 자신의 것으로 수용한 후 그들 나름의 방식으로 사용하는 단계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예컨대, 들뢰즈는 여전히 미국 문학 연구 영역에서 중요하게 통용되는 이름이지만 그의 이름 자체를 추종하는 것은 더 이상 요점이 아니다. 다시 말하면 더 이상 미국의 연구자들은 프랑스 철학자의 아류이기를 원치 않는다. 사실 그런 것 자체가 유행이 지난, '쿨'하지 못한 태도로 통용된다.

오늘날 생태학을 둘러싼 중요한 논자들의 많은 수가 영미권 학자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영문학을 기반으로 한 티모시 모튼(Timothy Morton)을 생각해볼 수 있다. 철학적으로 역사에 한 획을 긋는 대가의 수준은 아니다. (물론, 오늘날은 이미 대가의 시대가 아니다. 그러한 시대는 끝났다. 바디우 정도가 아마 그 마지막이지 싶다. 지젝은 조금 다른 의미에서 끝나가는 시대로부터 출현한 대가 아닌 대가라 할 만하다.) 그러나 그 자신의 철학을 흥미롭게 발전시킬 만큼의 실력은 충분히 되는 사람이다. 철학의 영역으로 가면 보다 다양한 영미권 학자의 이름을 만나볼 수 있다. 대상-중심 존재론을 내세우는 그래엄 하먼(Graham Harman)을 떠올려볼 수 있다. 출신 학교를 보면 전혀 주류가 아니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으나 영미권 동시대 철학자 중 최근 이 사람보다 효과적으로 자기만의 철학을 개진해낸 경우도 잘 없다. 무엇보다 그의 미덕은 글을 대단히 쉽게 쓴다는 데 있다. 전혀 엘리트주의적이지 않다. 그럴 만도 한 것이 그 자신의 철학 자체가 '순진한 리얼리즘'을 표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의심의 철학자 혹은 부정의 철학자가 아니다. 말하자면 데카르트나 아도르노의 반대편 극단에 있는 사람이라고 할 만하다. 크게 중요한 철학자라 하긴 어렵지만 레비 브라이언트(Levi Bryant), 레이 브레지에(Ray Brassier), 마뉴엘 드란다(Manuel DeLanda), 이안 보고스트(Ian Bogost) 같은 사람도 있다. 그러나 사실 후자의 논자들보다는 제인 베넷(Jane Bennett)이나 케런 베러드(Karen Barad) 같은 정치학이나 이론 물리학 영역에서 넘어온 사람이 근래 훨씬 더 영향력이 있지 싶다.

하먼에 대해 조금 더 이야기해보자. 그와 관련하여 흥미로운 사실은 하먼이 근현대 문학에 대해 이야기할 때만큼은 전혀 흥미롭지 못하다는 데서 발견된다. 놀랍게도 그 자신의 철학을 문학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 것인지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특히 하먼은 소설이 시와 어떤 차이를 지니는 문학인지 알지 못하는 모습이다. 거칠게 말하면, 기존 20세기 엘리트 철학자들이 그러했던 것과는 달리, 문학을 통해 사고를 단련해오지 않은 느낌이다. 루카치나 벤야민이나 아도르노 같은 사람들이 보여준 문학 이해를 보라. 그들은 철학 뿐 아니라 문학에도 능통했다. 그 전통으로부터 나온 제임슨만 해도 앞선 세대가 쌓아올린 성과를 고스란히 계승한 후 문학 연구를 발전시킨 경우라 할 수 있다. 이들이 모두 맑스주의자라는 게 하나의 연결 고리일 것이다. 맑스주의자는 아니라 해도 들뢰즈나 푸코 같은 사람 또한 문학에 대해 인상적인 비평을 많이 남긴 바 있다. 혹은 전혀 다른 계통에 속하지만 시를 자신의 사유의 원천으로 삼는 하이데거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그만큼 문학 및 예술은 항상 철학자들에게 중요한 사고의 원천이었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철학자들 사이에서 통용되어온 문학-예술이 그리스의 고전 시 문학 및 극 문학 혹은 조각-회화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즉, 소설을 중요한 사고의 대상으로 삼기 시작한 것은 사실 맑스 이후라고 봐야한다. 그런 의미에서 하먼은 맑스 이전 철학자와 같이 들리는 면이 있다. 그의 사고는 현상학에서 시작하는만큼 이미 예술적 층위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소설이라는 양식이 세공해낸 리얼리즘 이전에 위치한다. 이것이 그의 철학이 '순진한 리얼리즘'인 이유일 것이다. 

한편 최근 생태학적 사고에 기반하는 철학적 논의의 특징 중 하나는 그것이 문학 연구자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데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생태학적 사고의 전환이란 것 자체가 이미 상당 부분 반철학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사실은 이 때문에 20세기 프랑스에서 꽃을 피운 내재성의 철학을 계승 발전시키는 것을 통해 그 바탕을 수립한 것이 근래 미국에서 우리가 보는 생태학이라 말해보는 것이 가능하다. (물론, 생태학에 다른 전통이 없는 것은 아니다. 생물학이나 지질학과 같은 자연과학이나 역사학쪽에서 온 노선도 강력하다.) 달리 말하면, 20세기 프랑스에서 꽃을 피운 철학은 오늘날 미국에서 그 자체로 관심사이지 않다. 한때 '프랑스 철학'은 '이론'의 다른 말로 통용되었다. 그러나 지금 미국 학자들은 오히려 이론의 시대가 끝났다고까지 말한다. 그러나 이는 그 전통으로부터 온 모든 것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아무개의 철학을 통해본 무엇'이라고 초월적 혹은 비판적 거리를 취해야 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미국 학계에 그들의 사고가 널리 퍼져나가 이제는 토착화되었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야한다. 그렇다면 어째서 미국에서 창출되고 있는 새로운 논의의 중심이 생태학이 된 것인가? 그것은 역설적이게도 미국이라는 나라가 자연친화적 삶의 모범을 보여주기 때문이 아니라 그 반대로 가장 반생태적 자본주의의 심장부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오늘날 자본주의 비판은 자본의 생태계 침식이라는 문제를 통할 때 가장 효과적으로 달성된다.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방법에는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다. 맑스 이후 가장 강력했던 자본주의 비판은 20세기에 사회주의 및 공산주의라는 형태로 나타났다. 새로운 인간 사회 체제가 무엇이 되어야할지를 주로 고민했던 결과다. 반면 21세기에 자본주의 비판은 생태론을 통해 행해지고 있다. 비인간을 포함하는 보다 포괄적인 새로운 '삶'의 형식이 무엇일지를 고민하고자 한 결과다.

지난 20세기 이론의 시대에 단연 최정점에 있었던 만큼 해당 시대가 지난 후 해체론이 어떠한 운명을 맞이했는지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단적으로, 최근 미국 문학 연구계에서 데리다의 해체론에 관심을 두는 사람은 거의 없다. 사실 이는 당연한 결말이다. 왜냐하면 해체론 자신이 철학의 마지막 자손이기를 바랬던 셈이기 때문이다. 해체론과 함께 철학이 자살을 하고 난 후 우리가 얻은 '삶'의 새싹이 생태론이라 말해볼 수 있다. 이러한 풍토 속에서 오늘날 20세기 프랑스 철학자 중 거의 유일하게 살아남은 것은 들뢰즈다. 그의 철학이 '삶'(life)의 내재성에 기반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다. 사실은 그가 아니었으면 생태론이 문학 연구 영역에서 지금 같이 중요한 화두가 될 수 있었을까 싶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한때 1990년대 혹은 2000년대 초반 한국에서 들뢰즈가 데리다나 라캉 등과 한데 묶여 '포스트구조주의' 혹은 '탈근대' 철학자라고 소개되었던 것은 사실 농담에 다름 아니다. 들뢰즈와 데리다 사이에는 아무 연결 고리가 없다는 것이야말로 오늘날 우리가 보는 생태론적 문제의식의 핵심이지 않은가? 한때 문학 연구 영역에서 데리다의 해체론이 유행했을 때 문학은 마치 '자유 유희'(free play)의 영역에 속하는 것인듯 보였다. 그러나 오늘날 '자유 유희'는 못된 초월성의 망령이 죽지도 않고 또 나타나는 철지난 고집의 문제일 뿐이다. 데리다의 화두 중 하나가 '유령'이었다는 점을 기억하라. 들뢰즈에게서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 이 '유령론'이다. 들뢰즈가 문학 연구와 친연성을 보이는 것은 바로 그런 맥락에서다. '삶' 말이다. 육신에 스며든, 그리고 육신이 내뿜는, 개념에 아직 포착되지 않은, 정서를 다룬다고 여겨져온 것이 문학이라는 뜻이다. 흔히 이를 '정동'(affect)라 한다. 이것이 '친밀함'(intimacy)의 철학적 조상이다. 이것이 오늘날 미국 학자들이 문학을 대하는 주된 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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