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공중도둑의 [무너지기]를 문학 작품에 빗대어 말해보자면 어떤 것에 가장 가까울까? 윌리엄 모리스의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온 소식](News from Nowhere)이 어울리지 싶다. 혁명 후 모든 모순이 해소되어 사라진 유토피아적 세계의 모습을 담아내는, 사회주의자의, '소설'이라고 부르기 어려운, 종종 이른바 '공상과학'(science fiction)의 시초로 분류되기도 하는, 작품 말이다. 그러한 이유로 해당 작품은 백일몽이기도 하다. 작품 속에서 화자는 친구가 꿈에서 본 미래 사회의 모습을 이야기해주고 있을 뿐이다. 화자가 처한 시공간에 바로 그 미래 사회는 존재하지 않는다. 비슷한 맥락에서 공중도둑의 아래 앨범은 마치 장르가 없는 음악 같이 들린다. 아래 음악에서 어떤 삶 혹은 시공간에 뿌리내린 정서를 찾아낼 수 있단 말인가? '민중가요'가 아닌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흥미로운 사실은 아래 음악이 탄산 음료와 같이 합성된 가짜 정서를 유포하는 오늘날의 주류 '대중가요'도 아니라는 데 있다. 그렇다면 '인디음악'인가? 새소년을 떠올려보라. 새소년은 '인디음악'이다. 어째서 그러한가? 주류 대중 가요에 대항하는 자세가 있기 때문이다. 즉, '서브컬쳐'를 지니고 있다. 그렇다면 아래 공중도둑의 음악에는 '서브컬쳐'가 있는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주류 문화에 대한 자의식 자체가 느껴지지 않는다. 속되게 말해보자. 아래 음악에서는 이른바 '판'을 갈아보겠다는 '야심'이 느껴지지 않는다. 반대로 독특하게 명상적이고 종교적인 초월의 자세가 느껴진다. 주문을 외우듯 웅얼웅얼하는 듯한 분위기의 보컬을 보라. 여기에는 어딘지 성가대의 합창 소리와 같이 들리는 면이 있다. 21세기 종교 음악이 있다면 그것이 [무너지기]와 같지 않겠는가? 그러나 여기서 종교성은 내재적 특성을 또한 지닌다. 즉, 우리가 듣는 것은 '세상'에 대적하는 '솔로 가수' 혹은 '개인'의 단일하고 명확한 메세지가 아니라 아직 분명히 분화되지 않은 다층적이고 복합적인 '아직 오지 않은 것'의 느낌을 주는 목소리다. 여기서 요점은 보컬이 지닌 세계관을 보는 데 있다. 그것은 '주류 음악판이 무엇을 하고 있던지 그러한 것은 내 소관이 아니다'라는 태도에 비견할 만하지 않은가? 윌리엄 모리스의 유토피아 문학이 떠오르는 것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다.
달리 말해보자. 아래 음악에서 찾아볼 수 없는 것은 '적대'다. '보편'(대중가요)과 '개별'(인디음악) 사이에서 벌어지는 긴장이 없다는 뜻이다. 대신 여기서 떠올려야 할 것은 '단독성'(singularity)다. 단독성은 보편과 개별 사이의 긴장 자체를 건너뛰는 속성을 지닌다. 플라톤과 플로티누스를 비교해보라. 플라톤에게 있어 우리가 속한 시공간 안에서 마주하는 사물은 원본(이데아)의 복제물에 불과하다. 그 둘 사이의 긴장에서 원본과 복제의 변증법이 비롯되게 된다. 플로티누스의 경우는 좀 다르다. 그에게 사물은 '하나'로부터 나오는 유출 혹은 발산이다. 물론, 플로티누스에게도 '하나' 혹은 '일자'는 초월적이며 모든 존재의 근원을 이루는 이데아적 속성을 지닌다. 그렇다면 이제 유출의 문제를 현대적 관점에서 좀 뒤틀어보자. 플라톤에게 있어 사물은 이데아를 거울상과 같이 반영하는 것이지 유출이 아니란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달리 말하면, 둘 사이에는 외부적 거리가 있다. 반면 유출의 한가지 특징은 원본과 복제 사이의 연속성에 있다. 후자에서 모든 것은 서로가 서로에게 내재적이다. 물론 '완성'이라는 외적 '이데아'의 관점에서 다시 조망하면, 각각의 유출물은 DNA 조작이 실패한 결과 만들어진 기괴한 괴물들의 연쇄를 보는 것과 같을 것이다. '존재'(being)에 대비되는 '생성'(becoming)은 이 미완성의 기괴함을 그 자체로 용인할 때 얻어진다. 요점은 각각의 괴물과 같은 유출물은 단독적이며 서로 비교될 수 없다는 데 있다. 각각의 것들이 각각 자기만의 세계를 창출해내기 때문이다.
다시 장르 문제로 가보자. 사실 아래 [무너지기]에는 장르가 없다고 단정지어 말할 수 없도록 만드는 요소가 있다. 물론, 앞서 말했듯, 장르가 없는 듯이 들리는 것 또한 사실이다. 다시 유토피아 문학을 떠올려보라. 유토피아 문학은, 예컨대, '소설'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소설이 등장하기 이전부터 있어온 어떤 열망의 표현과 같다. 여기 이곳의 현실을 그려내는 '리얼리즘'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소설'이지 않던가? 만약 소설이 '유토피아'적 열망에 온전히 휩싸인 나머지 '현실'을 완전히 초월해버리면 이미 그것은 '소설'이 아니다. 그러한 이유로 모리스는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온 소식]을, '소설'이 아니라, '로맨스'라 칭한다. 그러나 알고 보면 '소설'의 놀라움은 '소설'이 '장르'의 한가지 이름이 전혀 아니라는 사실에 있다. 통속적으로 알려진 것과 달리 '소설'은, '장르'가 아니라, 거꾸로 '장르의 끝'을 의미한다. 달리 말하면, 소설은 전통적 장르를 게걸스럽게 먹어치워 자신의 것으로 활용하는 어떤 무한한 '과정'의 발생에 다름 아니다. 바흐친이 '소설화'(novelization)라는 말로 포착하고자 했던 것이 이것이지 않은가? 예컨대, 그러한 '과정' 속에서 우리가 흔히 '소설'이라고 알고 있는 것이 유토피아 문학 전통을 흡수할 때 나오게 되는 것은 '공상과학'이다. 다시 말하면, 이제 소설 속에서 '유토피아'는 과학적 사고의 관점에서 지금 여기의 현재 다음에 도래할 '미래'에 관한 논리 내 비논리적 가능성으로서 재등장하게 된다.
'소설화'의 '과정'으로부터 한가지 알게 되는 것은 오늘날 우리가 흔히 '장르'라고 부르는 것이 사실은, 대지에 뿌리내린 삶이 아니라, 해독되어야 할 '코드'에 훨신 더 까깝다는 사실이다. 비유적으로 말해보자. 흔히 '장르 문학'이라 불리는 것은 '소설'이라 불리는 OS에 깔리는 다양한 앱들과 같다. 예컨대, '유토피아'는 장르가 아니라 '코드'다. 즉, 장르적 차이는 서로 다른 OS를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OS 내 다양한 에플리케이션의 문제다. 그러나 여기서 코드가 달라지면 이미 그것이 그 자체 전혀 다른 기능을 하는 사물과 같이 되어버린다는 점을 보는 것이 중요하다. 예컨대, 음악을 들을 때 컴퓨터는 그 자체 음악 재생기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영화를 볼 때 그것은 영화 재생기가 된다. 문서 작업을 할 때 그것은 타자기다. 달리 말하면, 컴퓨터 혹은 스마트폰은 그 자체로는 아무 의미도 없는 텅빈 플랫폼에 불과하다.
위의 관점을 응용하여 아래 음악의 장르에 대해 이렇게 말해볼 수 있다: 아래 공중도둑이 내놓은 음악의 '장르'는 '무너지기'라 이름 붙여진 음반 자체다. '무너지기'는 '무너지기'일 뿐이다. 반대로 '무너지기'라는 장르-코드의 내재성을 인지하지 못할 때 받게 되는 것이 '장르가 없다'는 인상이다. 이제 이런 질문을 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반대로 이러한 단독성이 치르는 대가는 무엇일까? 음악 씬 자체가 사라져버린다는 것이다. 대중 음악 씬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음악이라는 유출이 존재할 뿐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이러한 유형의 음악에서는 유토피아가 현실을 대체해버린다. '과학적'이라기보다 '공상과학적'이라는 뜻인가? 이렇게 말해보고 싶다: '사회' 속에서 '시'가 억눌리는 것이 오늘날 너무도 자주 일어나는 일일 때 가끔 '시'가 '사회'를 완전히 '생까는' 경우와 만나는 것도 괜찮다.
* 사실 공중도둑에게서 '사회'의 흔적은, 음악 내부에서가 아니라, 외부에서, 즉, 의외로 그 이름에서 발견된다. 즉, '공중도둑'은 '공중도덕'의 패러디로 읽힐 수 있지 않은가? 바흐친이 '소설화'를 패러디가 행하는 웃음의 사회적 전복성과 연결시키는 맥락이 의외로 여기 음악 외부에서 발견된다. 이는 공중도둑에게 있어 은밀한 외재성의 형태로 작동하는 것이, 유토피아가 아니라, 사회라는 뜻과 같다. 흔히 유토피아적 소망-열망은 무미건조한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개인의 은밀한 내재성으로서, 즉, 공적 영역에 대비되는 사적 영역으로서 등장한다. 그러나 이와 달리 공중도둑에게서 은밀한 것은 개인의 내면이 아니라 사회라는 외재성이다. 이는 그만큼 공중도둑에게서 음악이 사회를 절대적으로 대체하는 내재성으로 작동한다는 뜻과 같다. 즉, 공중도둑은 사회 속에서 음악이라는 내면을 은밀히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음악 속에서 사회라는 외면을 은밀하게 작은 틈을 통해 엿본다. 이를 속된 말로 묘사한다면 어떤 말이 가능할까? 이것이 '이불 밖은 위험해'라는 관점이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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