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오프온오프(Offonoff) 혹은 콜드(Colde), 크러쉬(Crush) 등의 영상에서 근래 가장 트랜디한 유형의 남성성이 무엇인지 살펴볼 수 있지 싶다. 먼 옛날 '마초'라 불리는 '남자'가 있었다. 그는 '여자'가 자기를 사랑하는 것을 '의무'라 여겼다. 오늘날 그러한 방법은 낡았다. 역효과만 낳을 것이다. 여성으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자신을 사랑하고 보살피고 싶도록 만드는 게 더 쉬운 방법이지 않은가? 말하자면, 무척 달콤해서 보고만 있어도 '내 애인 삼고 싶다'는 느낌을 자아내는 것이 오늘날 우리가 만나는 새로운 남성이다. 그들은 랩도 한다. 한때 랩을 한다는 사실은 욕설을 하는 거친 남자의 이미지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아래서 랩은 R&B적 달콤함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장치에 다름 아니다. 달콤함은 영상을 만드는 방식에서도 발견된다. 거의 모든 영상이 예쁜 공간을 담은 사진들의 연속을 보는 것과 같다. 공간의 연속성을 분쇄하는 폭력적이고 현란한 시각적 편집과 같은 것은 없다. 결과적으로 추억이 서린 '장소'의 느낌을 낸다. "Photograph"라는 곡의 영상이 특히 그러하다.
한편, 마지막 두 영상은 한 가지를 더 지니고 있다. 강아지들, 혹은, '반려견'들. 그러나 그토록 '귀엽고' '사랑스러운' 그들에겐 '사연'이 있다. 주인에게서 버려진 개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에겐 그들을 돌보는 사람들이 있다. 콜드는 그들 중 하나다. 이렇게 말해볼 수 있지 싶다: 노래를 '스위트'하게 할 줄 아는 남자는 능히 '유기견'도 사랑할 줄 안다. 칸트가 그랬던가, 동물을 어떻게 다루는지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고. 예컨대, 동물을 학대하는 사람은 사람도 학대할 것이다. 거꾸로 말하면, 동물을 보듬을 줄 아는 사람은 사람도 보듬을 줄 알 것이다. 비슷한 방식으로 오늘날 그가 어떤 남자인지 알고 싶다면 그가 '반려견'을 다루는 방식을 보라고 말하고 싶다. 아래 마지막 영상에서 방청객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여성들의 표정을 보라. 화면에 반려견이 나올 때 그들의 환한 얼굴은 이미 만족을 드러내고 있다. 콜드와 크러쉬는 다만 사랑스러운 반려견들의 뒤를 따를 뿐이다. 잠시 옛날로 돌아가보자. 옛날에는 '개'들이 '주인'의 뒤를 따랐다. 예컨대, 19세기 '마초'의 뒤를 따르던 '개'들의 정체성은 어떻게 달랐을까? 총을 들고 말을 타고 달리며 취미 생활로 사냥을 하던 시절이었다. 그들에게는 주인이 맞추어 쓰러트린 귀여운 산토끼의 피흘리는 몸을 물어서 흔들어 숨통을 완전히 끊어놓는 충직한 '사냥견'들이 있었다. 여겨서 '반려견'은 찾아볼 수 없다. 그들은 '개'를 '사용'했다. 이렇듯, 동물은 그들을 사용하는 인간의 정체를 보여준다.
어째서 동물을 통해 인간을 이해하는 일이 가능해진 것인가? 오늘날 반려견이 전혀 '쓸모없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보아야한다. 19세기까지 '말'이 그랬던 것처럼 사람이나 짐을 실어나르는 것도 아니고, '소'처럼 밭을 갈거나 우유와 고기를 제공하는 것도 아니고, '닭'처럼 계란과 고기를 제공하는 것도 아니다. 물론, 한 때 '개'는 집을 지키는 동물이었다. 그러나 더 이상은 아니다. 오늘날 '삶의 동반자'라는 의미를 지닌 '반려견'은 순수한 인간 정서의 구현물이다. 달리 말해보자. 반려견을 산책시키는 것은 '애정'에 목줄을 메어 남들 앞에 전시하는 일과 같지 않은가? 헤겔은 말을 타고 지나가는 나폴레옹을 보고 시대 정신이 말을 타고 지나가고 있다고 했다. 오늘날 '개'와 산책하는 인간은 '애정'과 산책하고 있다. '개'를 '고기'로 먹는다는 사실 앞에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마치 '인간'을 먹는 것과 같은 충격을 느끼는 이유가 여기 있다. 오늘날 '개'가 아무런 '쓸모 없는' 존재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만약 반려견을 먹는다면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을 독점하여 소유하고 싶은 욕망에 미쳐 그를 살해한 다음 그의 육체를 구워서 먹는 일과 같을 것이다. (실제로 적지 않은 사람들이 성욕을 느낄 때 상대를 '먹고 싶다'고 섬뜩하게 마치 식인종과 같이 말하지 않던가?) 비슷한 방식으로 '애인'은 '쓸모'의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쓸모 없음'의 문제다. 그것은 순수한 정서, 특히, '스위트함'의 문제다.
그렇다. 가장 적은 돈을 주고 거꾸로 '쓸모'의 최대치를 뽑아내고자 할 때 '갑질'이니 '착취'니 하는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그것이 '최저임금'으로 정의내려지는 양화된 인간의 정체이지 않은가? 오늘날 '애인'의 존재가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쓸모'와는 정반대되는 경우다. 달리 말하면, 눈 앞의 상대를 '쓸모 없음'의 관점에서 보게 될 때 그는 당신의 '애인'이 된다. 이것이 칸트가 '아름다움'의 경험을 정의하기 위해 도입한 '목적 없는 합목적성'이란 말의 정체 아닌가? 한편, 여기에는 역설이 있기도 하다. 놀랍게도 오늘날 인간은 '애인'의 가장 이상적인 모습을 '반려견'에서 발견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21세기판 '실천이성비판'이 제기하는 질문은 다음과 같은 정반대의 모습을 띨 것이다: '우리는 과연 인간을 반려견과 같이 대할 수 있을 것인가?' 즉, 오늘날과 같은 인간 혐오의 시대--인종 혐오, 노인 혐오, 젊은이 혐오, 남자 혐오, 여자 혐오, 기타등등 혐오--에 가장 인간적인 도덕률을 담아내는 구호는 역설적이게도 다음과 같다: '모든 인간을 당신의 반려견 대하듯 하라.' 다시 말하면, '당신이 길거리에서 만나는 모든 개를 인간을 대하듯 하라'라고 말하는 '휴머니즘'의 시대는 이미 예전에 끝났다.
오늘날 '변려견'은 한낱 '개'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 동반자에게 한 편의 '시' 혹은 살아서 움직이는 '문학적 비유'와 같다. 아감벤이 말했듯 오늘날 인간의 삶은 '인간의 동물화'에 기반하고 있다. 멀리 갈 것도 없다. 스스로를 벌레, 즉, '~충'이라고 칭하는 '일베식' 어법을 보라. 그것은 '자기-비하'라는 옛 도덕주의적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는 성질의 현상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형이상학이 땅으로 내려와 육체와 함께 하는 방식에 가깝다. 혹은, 카프카의 '변신'은 어떤가? 거대한 곤충과 같은 괴물로 변해가는 그레고르 잠자의 '변신'이 오늘날 우리 인간 삶에서 벌어지는 일이지 않은가? 흥미로운 사실은 오늘날 정작 동물의 삶은 '동물의 인간화'를 달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과거 동물과 다름 없는 존재로 여겨졌던 '노예'가 '인간' 사이에서 일하는 노예로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최소한으로나마 인간이 되어야했다. 동일한 방식으로 오늘날 '개'는 인간과 정서를 나누기 위해 최소한도로 인간이 되어야한다. '반려견'의 등장은 동물계와 인간계 사이의 구분이 사라지고 서로 융합되는 현상의 시작과 같다. '반려견'은 인간화되고, 인간은 '반려견'화된다. '개통령 강형욱'의 등장을 보라. 오늘날 그의 등장은 필연적이다. 그는 두 세계를 잇는 '에이전트'와 같다. 말하자면 '포스트휴머니즘'은 '반려견'과 함께 진행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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