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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incEss, [PrincEss]

by spiral 2024. 3. 27.

20대에는 늦은 시간에 감수성이 예민해지는 걸 느꼈다. 새벽에 쓴 글을 아침에 일어나서 읽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부끄러움 때문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런 현상이 없어졌다. 생각이 단련되어서 사람이 좀 차분해진 건가 싶었다. 그런 면도 있을리라 본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다른 곳에 있었다. 새벽에 감수성이 더 이상 예민해지지 않는 건 멜라토닌의 양이 줄어서 생기는 일이다. 멜라토닌은 10대 시절 정점을 찍고 점점 하향 곡선을 그린다. 40대만 되어도 최고치를 찍을 때의 1/10 수준으로 떨어진다. 새벽에 감수성이 예민해지는 건 잘 시간에 멜라토닌 분비가 많아지기 때문이다. 그럴 땐 자야 마땅하다. 그러나 자지 않고 버티면 감정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낮이라도 해도 비가 오거나 해서 해가 나지 않으면 멜라토닌이 분비된다. 그러면 의식은 완전한 각성 상태에 이르지 못한다. 그 결과의 하나는 우울감이다. 감정이 사고력을 지배하기 시작한다. 멜라토닌이 충분하면 잠을 잘 수 있다는 이점이 있다. 그러나 깨어있는 동안 너무 많은 멜라토닌이 생성되면 감정의 소용돌이에 빠져들게 된다. 사실 시간이 갈수록 쓸데없는 감정을 느끼고 싶지 않다고 느낀다. 마음 속 한 구석에서 난 감정을 혐오한다. 감정에 휘둘리는 건 불쾌한 일이다. 그렇게 보면 멜라토닌이 적게 분비되는 게 꼭 나쁜 일 만은 아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삶을 살만하게 만드는 것은 감정과 결부되어있기도 하다. 새벽에 감성의 날이 곤두서는 경험은 유치하지만 또한 이상한 매력을 지니고 있지 않던가? 환영에 불과하지만 말이다. 삶의 환영이 사라질 때 삶은 시들해진다. 그럴 때면 멜라토닌이 좀더 필요하지 않은가 생각해보게 된다. 날이 갈수록 인간이 얼마나 신경계에 종속된 생리학적 존재인지 깨닫게 된다. 지금의 난 20년 전의 나와 같지 않다. 그때와 동일한 양의 그리고 동일한 패턴으로 호르몬이 분비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완전히는 아니지만 생리학적으로 상당히 다른 존재다. 다만 기억의 층위가 지속되어 여전히 스스로를 동일인으로 규정하고 있을 뿐이다.

* 아래 앨범은 1번부터 들을 것을 권한다. 그냥 누르면 4번부터 시작된다. 어째서 4번 트랙을 내세웠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별로 훌륭한 트랙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나머지 트랙이 훨씬 낫다. 뱀같이 보이는 생선 이미지로 만든 앨범 커버가 별로 유쾌하게 다가오지는 않지만 들을 만한 음악을 들려준다. 음악가의 이름은 무려 '공주'다. 물론 '공주'같은 면모는 찾아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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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incEss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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