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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roshi Yoshimura, [Surround]

by spiral 2023. 10. 22.

한국에서 9년 만에 겪는 가을이다. 적응을 하지 못하고 있다. 미국에서라면 이맘때는 한국보다 훨씬 춥기 때문에 난방이 들어오고 그렇기 때문에 집 안에서 옷을 많이 입지 않아도 됐다. 외출할 때를 빼고는 옷차림새에 별로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다. 실내에서는 얼마든 반팔을 입고 생활을 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은 그렇지 않다. 같은 10월이지만 기온은 더 높다. 그래서 난방을 할 정도는 아니다. 그러나 추위가 없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옷으로 체온을 유지하지 않으면 안된다. 예컨대, 기온이 비슷해도 해가 나는 날과 아닌 날 사이에 차이가 커서 옷을 입는 정도가 달라진다. 최근 낮에 해가 들 때는 반팔을 입어도 될 정도였다. 그러다 최근 해가 나지 않는 날 조깅을 한 후 체온 조절에 실패했다. 뛸 때 느꼈던 더위에 집에 돌아오는 길에 반팔 차림으로 있은 후 다시 몸을 충분히 따뜻하게 해주지 않은 채 추운 곳에 장시간 머물다 감기에 걸렸다. 내 기억으로는 6-7년 만에 걸린 감기다. 미국에 머물던 초창기, 환절기에 변화하는 기온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채 이불을 충분히 덥지 않고 자다가 한번 걸린 후 처음이다. (코로나는 예외로 치자. 증상도 달랐고, 개인적이라기보다는 사회적 현상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내 경우 감기에 걸리는 이유는 전부 동일하다. 체온 조절에 실패하여 저체온에 장시간 노출되면 걸린다. 체온이 떨어지면 체내 면역력 기제가 비활성화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 틈을 타 잠복해있던 바이러스가 기를 펴기 시작하면 감기가 찾아오는 게 아닌가 한다.

익숙했던 환경이 바뀌면, 주변의 환경은 스트레스의 요인이 된다. 신체는 환경에 종속적이다. 신체는 '관계론적' 혹은 '생태학적'이라고 말해볼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인문담론에 있어서 흔히 '생태학적' 내지 '관계론적'은 좋은 말로 쓰인다. 그러나 거꾸로 말하면 생태학적 삶은 스트레스에 노출된 삶을 뜻하기도 한다. 스트레스는 내가 아닌 다른 것과의 관계에서 오기 때문이다. 내가 아니기 때문에 '나를 위협하는 요소'로 다가오게 되고, 그러한 맥락에서 관계는 스트레스의 원천으로 작동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이렇게 말해볼 수도 있다: 생태학적 삶은 바이러스와 관계론적으로 이어진 삶을 뜻한다. 이는 관계가 그 자체로 좋은 것으로 여겨질 이유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관계는 그 자체로 나쁜 것도 아니다. 그러나 관계는 스트레스의 원인이 될 경우 인간에게 있어 심리 혹은 도덕 차원을 열어내며 '나쁜 것'으로서 재정의되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나쁜 놈'과 '착한 놈'의 구분, 혹은 '상대편'과 '내편'의 구분은 이렇게 태어난다. 이것이 '생태학적 삶'이 '사회학적 삶'으로 전환되는 방식일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너'와 '나'를 구분하는 사회학적 삶은 편협하다. 그래서 최근 인문담론은, 말하자면, 바이러스와의 관계조차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생태학적 삶을 꿈꾼다.

그러나 개체 단위에서 생태학적 삶은 고통스럽기도 하다. 한 예로, 생태학적 삶은 관계 속에서 힘 센자가 약한자를 포식하는 행동을 잘못된 것으로서 탄핵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자연사 다큐멘터리를 보면, 초식동물도 종종 맹수들을 뿔로 받아 쫓아버리기도 한다. 자연에서는 흔히 말하는 '힘 센자'가 늘 힘 센 것도 아니란 뜻이다. 그렇다고 해서 '먹고 먹히는' 관계가 뭐 그렇게 멋진 삶일 것인지, 그에 대해 답을 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여기서부터는 자연사의 세계가 아니다. 인문담론의 세계, 해석의 세계다. 그러나 자연사의 세계를 벗어나 수학의 세계로 가는 방법도 있다. 자연과 수학은 다르다. 수학은 변화하는 자연이 아니라 영원한 법칙의 세계를 뜻하기 때문이다. 물론 최근 수학은 법칙이 아니라 행렬과 패턴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기도 하다. 패턴은 법칙과는 다르다. 예컨대, 먹고 먹히는 움직임은 패턴의 문제로 이해될 수 있는 면이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패턴의 추상성이 자연의 모든 것을 포괄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자연은 감각적 경험의 대상이기도 한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추상은 대단히 매력적이다. 그러나 감각 또한 포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한 예로, 개체로서 느끼는 고통은 감각의 문제이다. 고통 없이 인문적 해석에 대한 추구는 있을 수 없다는 게 핵심적이다. 사실 인문학은 고통에 예민해야 할 수 있다. 그러나 고통에 예민하다는 말을 고통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삶과 등치시킬 필요는 없다. 오히려 행복이 무엇인지 예민하게 느끼는 자가 고통을 예민하게 느낀다고 말해보고 싶다. 여기서 인문학자와 과학자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정리해보고 싶다: 과학자는 추상 속에서 아름다운 패턴을 발견하고 기뻐하는 반면 인문학자는 추상 속에서 수학적 아름다움과 동시에 그것이 숨기고 있는 고통을 발견한다. 

* 열은 기본적으로 원자나 분자가 진동하며 만들어내는 에너지다. 이는 기본적으로 유기체의 신체에도 적용된다. 즉 신체 활동이 제대로 이루어지려면 분자나 원자 단위에서 충분한 운동량이 발생해야한다. 즉, 열이 없다는 뜻은 신체의 원자가 활동을 멈추고 있다는 뜻과 같다. 사실 원자가 신체가 원하는 방식대로 움직이기를 멈추는 현상을 죽음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물리학적 및 화학적 관점에서 서술한 것이다. 생리학적 관점에서 보다 정확히 말하면, 인간 신체 내에서 에너지를 생산하는 것은 미토콘드리아다. 여기서 미토콘드리아가 세포 내 원자들을 진동시키는 역할을 한다고 가정해볼 수 있다.

물론 원자가 움직이거나 서로 충돌하며 내는 에너지가 곧 생명 현상에 지탱하는 에너지원인 것은 아니다. 예컨대, 전자의 운동에 기반한 전기가 직접적으로 생명 현상을 떠받치는 에너지원인 것은 아니지 않던가? 이로부터 유기체 내에서 원자의 진동을 세포가 이용할 수 있는 형태로 변화하는 발전소와 같은 게 미토콘드리아일 것이라고 유추해볼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면 미토콘드리아 자체는 세포가 사용하는 에너지원, 즉, ATP를 자기 자신의 에너지원으로 쓰지 않는다는 뜻이 된다. 즉 미토콘드리아는 세포 내에 있지만 세포와는 다른 기제로 작동하는 측면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야 미토콘드리아를 발전소로 이해하는 게 가능해진다. 발전소에서 전기가 생산되지만 발전소의 발전 과정이 자신이 생산한 전기를 기반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지 않던가?++ 다시 말해 미토콘드리아는 음식물의 형태로 전달되어 체내에 들어온 연료를 보다 직접적인 방식으로 그 자신의 에너지원으로 처리할 것이라 추정해볼 수 있다. 즉, 미토콘드리아가 동식물의 사체에서 얻은 원료를 이용해 원자 단위에서 운동 에너지를 만들어내는데 그 과정을 통해 세포가 사용가능한 에너지원인 ATP가 만들어지는 것이라 말해볼 수 있다.

다시 체온의 문제로 돌아가자. 주변의 기온이 그다지 낮지 않은데 정상 체온보다 낮다는 것은 미토콘드리아가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말일 수 있다. 미토콘드리아가 일을 잘 하지 못하게 되는 이유로 두 가지를 생각해볼 수 있지 싶다. 첫째로, 연료가 없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밥을 먹지 못한 경우 말이다.+++ 둘째는, 스트레스를 받는 경우다. 스트레스 호르몬에 장시간 노출되면 미토콘드리아는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 이는 과학적으로 밝혀진 바다. 물론 미토콘드리아가 아무리 일을 열심히 해도 주변의 기온이 너무 낮으면 결국 체온을 상실하게 된다. 문제는 열 혹은 에너지원을 상실하게 되면 세포들이 늘 하던 일을 하지 못하게 될 것이란 데 있다. 면역 작용이 그 한 예다.

+ 마치 이는 미토콘드리아는 세포 내에 있지만 세포가 아니라는 말과 같이 들리기도 한다. 실제로 미토콘드리아는 그 자신만의 DNA를 지니고 있다. 기이한 일이지 않은가? 인간 신체의 일부인데 자기만의 DNA가 있다니 말이다. 사실 이 때문에 미토콘드리아가 원래는 인간과 별개의 생물이었을 것이라는 추정이 과학자들 사이에서 통설로 받아들여진다.

++ 혹시 그런 일도 있는지까지는 확인해보지 않아서 모르겠다. 있을 수도 있을 것 같긴 하다. 발전소에서 한번 생산된 전기는 바로 사용되지 않으면 사라지게 되는데 사용처가 없다면 자기 자신의 시설을 돌리는 데 사용해볼 수 있지 않은가? 관련 기술자가 아니라서 잘은 모르겠지만 이론적으로는 생각해볼 수 있는 일이지 싶다.

+++ 물론, 무엇을 어떻게 먹었느냐도 중요한 요소다. 연소가 잘되는 좋은 연료를 넣어주어야한다는 뜻이다. 당화 반응을 생각해볼 수 있다. 쓸데 없이 당을 많이 섭취하게 되면 남아도는 포도당이 혈액 속을 떠돌다 단백질 등에 붙어 세포 구조를 파괴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세포가 제대로 작동할 수 있을리 없다. 사실 당화 반응은 대표적인 노화 현상의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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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ndscape 1: Surround (reissued in 2023; originally released in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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