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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e Pulice, "If I Don't See You in the Future, I'll See You in the Pasture"

by spiral 2023. 7. 16.

서울 거리를 다니면 너무도 피곤하다. 온갖 메세지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광고물들이 첫번째다. 가게의 간판들을 생각해볼 수 있다. 건물이 있는 곳엔 여지없이 가게가 있다. 그들 가게는 보는 사람의 욕망을 자극하여 가게 안으로 사람들을 끌어들이고자 한다. 버스나 지하철을 타면 여기저기 눈길을 끌고자 혈안이 된 문구와 영상으로 가득하다. 버스 안 디스플레이를 보면 순간적으로 흥미를 유발하는 엔터테인먼트 영상이 유튜브 영상과 같이 흘러나온다. 동시에 그 아래 뜨는 한 줄 기사 속 정치 뉴스 기사는 한국 주류 미디어의 입장을 대변하느라 바쁜 모습이다. 다른 한편 버스의 유리창에는 투명 스티커 형태로 광고가 침투해있다. 근래 형사물 혹은 깡패물 영화에서 자주 눈에 띄는 육중한 체구의 한국계 미국 배우가 근거 없는 신뢰감을 주며 상품을 팔아보고자 인상을 쓰고 있다. 길거리에는 집권 정당에서 여기저기 붙인 현수막이 온갖 저열한 문구로 보는 사람을 가스라이팅하고자 생떼를 쓰고 있다. 이제는 심지어 아파트 엘레베이터 안에까지 동영상 광고가 흘러나온다. 광고 디스플레이에 뉴스랍시고 몇짜 뜨는 문구는 거의 가십 수준이다. 엘레베이터를 탔을 때 느끼게 되는 지루함 때문에 눈길을 자연스럽게 디스플레이에 주는 나 자신이 싫어진다. 주말 창 밖에서는 술에 취한 사람이 자신의 좌절된 욕망을 허공에 대고 고래고래 풀어대고 있다. 서울이라는 시공간은 온통 욕망을 부추기는 메세지 혹은 좌절된 욕망을 토로하는 메시지로 채워져있다. 이런 시공간 속에 머물면서 자기만의 온전한 생각과 판단을 갖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게 느껴진다. 서울은 사실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저열한 공간이다. 이러한 공간 속에 머물며 저열함으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은 한가지다. 서울이라는 공간이 뿌려대는 메시지로부터 절연되기 위해 음악을 듣는 것이 그것이다. 아무런 메세지도 없는, 순수하게 소리로만 만들어진 음악만이 그러한 일을 할 수 있다. 난 아래 음악을 그러한 맥락에서 이해한다. 만약 아래와 같은 음악이 없다면 서울과 같은 공간에서 살아가는 것은 너무도 끔찍한 일이 될 것이다. 창문과 방문을 닫고 이어폰을 끼고 아래 음악을 들으라. 그렇게 다른 시공간으로 옮겨가라. 그 새로운 시공간이 예술이 우리에게 주는 선물이다. 신실한 사람들은 자신이 믿는 신이 자신을 지켜준다고 말한다. 유신론적 무신론자라면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다: 어린시절 그리고 지금까지도 세상이 가하는 고통으로부터 날 지켜주었던 것은 음악이었고 음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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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f I Don't See You in the Future, I'll See You in the Pasture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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