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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아라 병아리"와 세계의 기원

by spiral 2022. 4. 3.

개인적으로 신해철과 넥스트에 열광해본 기억은 없다. 그러나 "날아라 병아리"라는 곡을 들으면 1994년, 이른바 '학창 시절'의 감정이 떠오를 만큼의 기억은 지니고 있다. 하루하루 자살하고 싶었던 시절, 내 주변 세상의 모든 것이 단 하나도 정상적이지 않게 느껴지던 때, 모든 사물과 사람들이 요동치며 내게 다가왔던 그 두려웠던 시절의 기억이 떠오른다. 남자 중학교 교실이란 곳은 그토록 힘의 논리가 횡행하던 곳이었다. 그런 곳에서 점심 시간마다 음악이 나왔다. 방송반이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당시 가장 잘 자나가던 곡들이 흘러나왔다. 그 중 하나가 넥스트의 "날아라 병아리"였다. 태어나 처음 경험한 폭력적인 공간을 너무도 감미로운 어쿠스틱 기타 소리가 채우고 있었다. 감상적인 나래이션 및 가사와 더불어 말이다. 그리고 가사는 처음으로 알게 된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중학생 입장에 그보다 더 감정적으로 기묘한 순간도 없었다. 신해철은 자의식 과잉으로 이루어진 시절의 정서를 잘 포착해내는 인물이었다. 거창한 그의 앨범 제목을 생각해보라: '넥스트의 귀환, 파트 1: 존재.' '넥스트의 귀환, 파트 2: 세계." 곡의 제목에도 거창한 게 많다: "껍질의 파괴," "불멸에 관하여." "세계의 문," "유년의 끝," "신이 없는 시대" 기타등등. 솔직히 말해서 손발이 오그라드는 제목이다. 근본에 있어서 근대 철학에는 중2병적인 구석이 있다. 예컨대, 헤겔의 [정신현상학]을 그 어떤 현실적인 인간이 이해할 수 있단 말인가? '이성적인 것이 현실적인 것'이라는 헤겔의 말은 주관성의 심연에 빠져 허우적거리게 된 중학생이 다시 현실로 복귀하기 위해 발버둥치며 그려내는 '빌둥스로만'(Bildungsroman)의 과정으로 이해되어야한다. 

음악적으로 보면 사실 "날아라 병아리"는 1990년대 초중반 미국에서 유행하던 메탈-록 밴드 공식을 따르고 있었다. 평소 강렬한 록-메탈 소리를 들려주던 그룹들이 이상하게도 유려한 발라드곡들을 하나씩 뽑아내던 장면을 기억하는가? 미스터빅의 "To Be With You," 익스트림의 "More than Words," 포논블론즈의 "What's Up." 구구돌스의 "Iris" 등. 신해철은 이러한 '빅그룹'의 세계에 매혹을 느끼고 있었다. '거대함', '서사시적 세계,' '대작'에 대한 열망과 함께 말이다. 이렇듯 세계의 기원에는 주관성의 심연이 놓여있다. 1990년대가 동시대 대중음악의 기원을 이루는 시대인 이유는 바로 이 주관성의 심연 때문이다. 한국 대중음악계에 있어 많은 새로운시작이 1990년대에 이루어졌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서태지와 함께 랩-댄스 음악의 시대가 처음 열렸고, 힙합 음악의 영역이 열렸고, 곧이어 인디 록밴드들과 함께 얼트록의 영역이 열렸다. 많은 사람들이 이 시절을 낭만이 있었던 시대로 기억하고 추억한다. 사실 이는 단순한 환영만은 아니다. 오늘날 우리가 아는 10대 및 20대를 중심으로 한 대중음악의 영역이 최초로 열린 것이 실제로 1990년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시절이 동시에 서구 대중음악에 대한 유치한 동경 및 열등감으로 점철된 시절이었기도 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낭만의 다른 이름은 유치함이다.

거대함은 추상적이고 때때로 볼품없을 정도로 유치하다. 그러나 거대함에 대한 동경이 사라질 때 세계는 신비로움을 상실하게 된다. 근대 철학의 기원에 있는 철학자들이 숭고에 대해 논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칸트가 대표적이다. 숭고는 그의 미학를 이루는 핵심 정서 중 하나다. 헤겔은 미학의 종언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에게서는 철학 자체가 무한에 대한 사유를 끼고 작동한다. 물론, 그는 진짜 무한과 가짜 무한을 구분한다. 그에게 진짜 무한은 단순히 유한에 대비되었다는 의미에서 무한하지 않다. 요점은 세계에 대한 사변 자체가 유한자에 기반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는 데 있다. 이는 무한이 유한자가 느끼는 착시 현상 혹은 공상이란 뜻이 아니다. 지속하지 못하고 사라지는 것, 존재하지 않는 것 속에서 이성적인 것 혹은 사변이 발생하는 것을 볼 수 있어야한다는 뜻이다. 한편 오늘날 제정신인 과학자는 무한이란 말 앞에서 거부감을 느낀다. 양화된 개념으로 포착할 수 없는 헛소리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이는 거대함에 대한 추구 일반을 중학생 단계에서 겪는 근거없는 사변적 세계 경험으로 여기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이 또한 충분히 공감하여 이해할 수 있다. 사실 오늘날은 철학의 시대가 아니다. 과학의 시대다. 사변 없는 현실성의 시대 말이다. 그러나 무한을 수학적 개념으로 만든 것은 수학자인 칸토어이기도 했다. 19세기에 수학자는 수 속에서 영원을 보고자 했다. 영원은 단순히 양화된 수학적 이해력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칸토어는 보다 직접적으로 신을 생각하고 있었다. 흔히 철학에서 존재라고 불리는 것이 바로 이 세계의 영원한 기원으로 올라가고자 하는 열망으로부터 나오게 된다.

20세기 들어 사변에 대한 거부는 철학 내부에서도 강력하게 대두된다. 예컨대, 하이데거는 플라톤으로부터 시작된 수학적 존재론을 다시 시학의 관점에서 보고자했다. 그에게 수학적 존재는 미적 존재를 망각한 결과였다. (물론, 정작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을 펼쳐보고 그 안에서 현실적 구체성을 발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시적 존재든 수학적 존재든 일반인이 이해할 수 없기는 매한가지라는 뜻이다.) 철학자들 사이에서 하이데거는 여전히 중요하게 읽히는 철학자다. 20세기 초중반 많은 철학자들이 그의 철학에 열광했다. 철학의 황금기가 찾아올 것 같았다. 그러나 하이데거 이후 철학의 시대는 거꾸로 저물게 된다. 지금 21세기 기준으로 일반인 사이에서 철학에 대한 관심은 사그라들었다. 남겨진 것은 차가운 과학과 뜨거운 미학이다. 그리고 그 둘의 대립이다. 예컨대, 오늘날 과학에 기반한 음악가를 찾아볼 수 있는가? 혹은, 음악에 기반한 과학자를 찾아볼 수 있는가? 만약 그러한 일이 일어난다면 양쪽 진영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할 것이다. 과학자는 그러한 자를 유사-과학자라 부를 것이고, 음악가는 그러한 자를 감정이 없는 죽은 음악을 하는 자라 부를 것이다. 두 경우 모두 전문가답지 못한 짓을 하고 있다고 비난 받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보는 전문가식 과학과 미학의 대립은 1990년대가 끝났다는 것을 뜻한다. 우리가 흔히 낭만적으로 기억하는 1990년대는 전문가 과학자의 세계 및 전문가 음악가의 세계 이전에 위치한 철학적 유치함의 세계를 뜻하기 때문이다. 1990년대 한국의 대중음악에서 보듯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전문가적-산업적 세계의 기원에 있는 것은 거대한 것을 사고하는 철학적 사변이다. 기원에는 유치함이 있다. 유치함은 아무 것도 가지고 있지 못한 자가 그리는 세계의 원초적 모습을 담아낸다. 삶의 풍요로움을 박탈 당한 자가 그려내는 세계는 '무'를 닮아있다. 그러한 세계는 때로 죽음의 모습을 하고 찾아온다. 그러나 잃을 것 또한 없기에 그들은 죽음으로부터 삶을 다시 재구성해내게 된다. 우리가 오늘날 흔히 '현실'이라 부르는 전문가들의 세계, 기술문명의 세계, 산업의 세계는 그렇게 사변 위에 세워져있다. 전문가들이 '현실'이라 부르는 세상은 사실 비존재에 대한 유치하지만 거대한 사변에 기반하고 있다. 헤겔이라면 이 비존재와 존재의 상호작용을 정신(Spirit)의 현상학이라 부를 것이다.

실러의 시구를 차용한 헤겔의 [정신현상학] 마지막 구절을 기억해보자. 그는 이렇게 말한다: "오직 정신들의 세계가 담긴 잔으로부터 / 절대정신에게 그 자신의 무한이 거품처럼 솟아난다." 건조한 과학자의 눈 혹은 현실적 구체성만을 사랑하는 시인의 눈으로 이 구절을 평가해보자면, 세상에 이만큼 유치한 구절도 없다. "날아라 병아리"로 돌아가보자. 사실 대단히 유치한 제목의 곡이지 않은가? 그리고 사실 유치한 내용의 가사에 불과하다. 그러나 유치해지지 않고서 세계의 주춧돌을 놓을 방도는 없다. 유치해지지 않고서 세계를 낭만적으로 경험할 방도는 없다. 신해철이 '마왕'이라고 불렸던 것은 이 거대한 유치함 때문이었다. 그는 "유년의 끝"에 대해 '빌둥스로만'의 관점에서 이야기하지만 그것은 그만큼 그가 소년 시절의 마음을 소중히 여긴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가 어른이라면 그것은 그가 영원한 유치함의 소유자, 영원한 소년인 한에서다.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볼 수 있지 싶다. 과연 21세기 한국의 대중음악계는 새로운 '마왕'을 낳을 수 있을 것인가? 21세기에 우리는 다시 아마추어 철학자가 만들어내는 대중음악을 들을 수 있을 것인가? 예컨대, 가장 반실용적인 학문인 철학을 대학에서 공부한 후 그 지식을 신해철과 같이 대중음악 시장에서 실용적으로 사용하고자 하는 기괴한 장면을 낭만적으로 다시 볼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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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Return of N.EX.T Part 1: The Being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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