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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도 들어본 적 없는 음악'

by spiral 2022. 2. 9.

밀로스 포먼 감독의 1984년작 [아마데우스]의 핵심을 이루는 장면을 꼽으라면 단연 살리에리가 모차르트의 곡을 묘사하는 장면일 것이다. 사실 이 영화는 살리에리가 내놓는 모차르트 음악에 대한 감상기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영화 내내 끊임없이 모차르트의 음악에 매료된 그의 모습이 묘사된다. 그리고 그의 음악 감상기가 펼쳐져나온다. 시쳇말로 하자면, [아마데우스]는 살리에리의 '팬심'에 관한 영화다. 그의 설명을 듣고 있으면 모차르트의 곡이 지닌 아름다움이 체감되어 느껴진다. 그의 설명 없이 해당 곡을 듣는다면 결코 느끼지 못할 아름다움이다. 사실 이 영화는 의외로 살리에리 없이는 아무 것도 아니다. 겉으로는 모차르트의 천재성에 관한 영화인 것 같다. 하지만 그의 천재성은 살리에리의 음악적 식견이 없이는 인지되지 않는다.

엄밀히 말해서, [아마데우스]에서 살리에리는 이론가 혹은 비평가다. 영화의 이야기 구조가 이로부터 비롯된다. [아마데우스]는, 의심의 여지 없이, 비평가 살리에리에 관한 영화다. 아름다움 앞에서 그가 전개하는 비평적 음미에 관한 영화다.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큰 문제가 하나 발생하게 된다. 영화 속 인물로서 그는 비평가가 아니라 작곡가다. 이로부터 도출되는 다음과 같은 질문이 영화의 중심 내러티브를 구성하게 된다: 한낱 음악 비평가로 태어난 자가 음악가의 길을 추구하게 될 때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그리 어렵지 않다. 음악가가 된 비평가는 자신의 비평적 식견을 통해 인지된 훌륭한 음악의 이상을 구현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지난한 노력을 통해 세속적으로 인정 받는 당대의 음악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론적 지식 없이 이상을 구현하는 힘인 천재가 결여된 이유로 역사에 남는 최고의 음악가는 되지 못할 것이다.

바로 여기 음악가 살리에리가 멈추어서는 지점에서 모차르트라는 인물이 등장하게 된다. 둘은 비평가와 음악가로서 완벽한 대조를 만들어낸다. 살리에리와 달리 모차르트는 영화 속에서 세상 물정이라고는 모르는 철부지로 묘사된다. 그는 고통스러운 지식과 담론의 세계 속에 있지 않다. 그는 자기의식의 매개 없이 곧바로 하고 싶은대로 한다. 말하고 싶은대로 말한다. 작곡하고 싶은 음악을 작곡한다. 천재는 신의 영역에 직접 연결되어있다. 그렇기에 인간 사이의 세속적 논리를 모른다. 인간의 관점에서 말하자면 그는 자폐적 인간이다. 천재의 생각은 곧 신의 생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단순한 공상으로서의 생각이 아니다. 이미 물리적으로 구현된 생각을 뜻한다. 반면 이론 및 비평은 신으로부터의 소외를 의미한다. 이론에 있어서 생각은 결코 물리적 실천력을 지니고 있지 않다. 이렇게만 보면 살리에리는 저주 받은 자다. 실제로 영화에서 그는 그렇게 묘사된다.

그러나, 이미 말했듯, [아마데우스]의 진짜 주인공은 살리에리다. 무엇보다 이 영화는 살리에리의 자서전 속은 고백록(confession)이라는 형식을 따른다. 이 영화의 형식은 살리에리의 자기의식이 외적 세계와 부딪치며 내놓게 되는 감탄 및 고통으로 주조되어있다. 영화 속 천재 모차르트는 바로 그러한 그의 비평적 상상력이 만들어낸 산물이다. 모차르트에게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살리에리의 자서전적 자아다. 신의 음성은 오직 한낱 인간만이 들을 수 있다. 다른 동료 인간으로 하여금 신의 음성을 들을 수 있도록 번역을 해주는 동료 인간이 바로 이론가이고 비평가다. [아마데우스]는 아름다움 영역에 매료되어 이끌려왔으나 신의 도구가 되지 못한 자들, 오직 신의 목소리를 지적으로 알아볼 수 있을 따름인 자들, 지적인 인간들, 흔히 비평가라 불리는 자들을 위한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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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보 상으론 별 것 없었어. 아무 것도 아니었어. 도입부는 단순해. 거의 코믹해. 리듬이 하나 있을 뿐이야. 바순이랑 바셋 혼이 몇개 있어. 녹슨 아코디온 소리나 다름 없지. 그런데, 그러다가, 갑자기, 저 높은 곳에서, 오보에가 등장해, 높은 곳에 음표 하나가 동요도 없이 매달려 있는 거야. 클라리넷이 이어받을 때까지, 클라리넷이 그 음표를 달콤하게 적셔서 놀라운 기쁨의 구절로 만들 때까지. 재주 넘는 원숭이가 써낸 곡이 아니었어. 나로선 단 한번도 들어본 적 없는 음악이었어. 갈망으로 가득찬 소리였어, 채워질 줄 모르는 갈망으로 가득찬 소리. 신의 음성을 듣는 것 같았어.

On the page, it looked simple, nothing. The beginning simple, almost comic. Just a pulse. Bassoons, Basset horns. Like a rusty squeezebox. And then, suddenly, high above it, an oboe, a single note hanging there unwavering, until a clarinet took it over, sweetened it into a phrase of such delight. This was no composition by a performing monkey. This was a music I've never heard. Filled with such longing, such unfulfillable. It seemed I was hearing the voice of G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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