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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메이징 그레이스"

by spiral 2021. 5. 31.

아래는 존 뉴턴(John Newton)의 "어메이징 그레이스"(Amazing Grace)라는 찬송가의 가사다. 어려서부터 들었고 워낙 곡조가 좋기에 기억하는 곡이다. 특히 그리스의 가수 나나 무스꾸리(Nana Mouskouri)가 불렀던 판본은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한 가지 이상했던 것은 무스꾸리가 들려주었던 은총의 느낌이 정작 교회에서 실제로 찬송가로 불려졌을 때는 전혀 찾아오지 않더라는 데 있었다. 어째서 그랬던 걸까? 아마도 그 이유가 찬송가의 한국어 번역에 있지 싶다. 사실 한국어 찬송가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은 "어메이징 그레이스"와 같은 곡이라고 할 수 없다. 아래 가사 번역을 비교해보라. 첫 번째 것은 영어 원문에서 내가 직접 번역한 것이고, 두 번째 것은 공인 찬송가 판본이다. 한국어 찬송가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의 가사가 "어메이징 그레이스"의 가사가 담고 있는 은총의 느낌을 사실상 상실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조금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사실 뉴턴은 '죄' 혹은 '죄인'이라는 말 자체를 사용하고 있지 않다. 내 입장에서 보기에 'wretch'를 '죄인'이라 번역하는 것은 다소 과도한 의역이다. 일반적으로 'wretch'는 죽을 운명을 지닌 비참한 처지에 빠진 인간의 삶 일반을 지칭하는 말이다. 그에 비해 기독교의 원죄 개념은 인간의 유한성을 형이상학적 구원의 관점에서 보다 직접적으로 처리하고자 한다. 즉, 기독교에서 '죄'는 어디까지나 '구원'을 뜻하는 코드명으로서 여겨진다. 기독교에 있어서 즉자적 죄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죄는 항상 이미 대자적이다. 죄는 늘 신의 응시 속에 있다. 이것이 악을 신의 섭리 내부에 포괄된 것으로서 다루는 신정론(theodicy)의 핵심이다. 이 때문에 기독교에서 인간 유한성은 그 자체로 신의 형이상학 내부에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기독교적 관점에서 'wretch'를 '죄인'이라 번역할 수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나 뉴턴은 'sinner'가 아니라 구태여 'wretch'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여기서 'wretch'와 'sinner' 사이에 간극이 있다는 점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사실 이 둘을 동일한 것으로 다루는 것은 인간 경험의 단계를 건너뛴 채 곧바로 천국으로 직행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마치 타락하여 인간으로서 태어날 틈도 없이 구원이 가능한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사실 기독교적 형이상학은 인간을 통해 '역사'하는 층위를 분명히 지니고 있다. 예수가 바로 그 인격의 층위를 뜻한다. 예수는 "사람의 아들"(son of man)이다. '역사'의 층위가 간과되면 기독교는 더 이상 기독교라 할 수 없다. 율법에 기초한 유대교라면 모를까.

아래 한국어 찬송가 가사가 어떻게 인격의 층위를 다루는지 그 방식을 살펴보자. "나 같은 죄인 살리신"에서 인격의 층위는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라는 구절에서 발견된다. 다시 말해 한국어 찬송가는 하나님이 그 자체로 의인화하는 특징을 과도하게 강조하는 면이 있다. 물론, 교리화된 기독교는 신을 흔히, 예수라는 인격의 차원과 관계 없이, 그 자체로 의인화하는 경향을 보이기도 한다. 창조주가 창조된 세계의 외부에 거한다는 관점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놀라운 은총'이 비인격적 '소리'의 모습으로 '나'에게 현상학적으로 찾아오는 '달콤한' 경험을 묘사하는 "어메이징 그레이스"의 가사를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의) 은혜"라고 소유격의 관점에 종속된 은총의 형태로 번역하는 것은 뉴턴이 그려내고자 하는 바를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일이다. 사실 의인화된 신이라는 개념보다 형이상학적 사유를 유치하게 만드는 것도 없다. 사유의 교리화가 이로부터 시작된다. 신을 의인화하여 '왕'이라던가 '주(인)님'(Lord)라던가 하는 식으로 묘사하는 사고를 생각해보라.

마찬가지로 "잃었던 생명"이라던가, "광명"이라는 식의 명사화된 번역어 또한 과도하다. 이는 뉴턴의 시적 언어가 지니고 있는 특정 요소를 하나 포착한 후 못으로 때려박는 폭력적인 번역이라 할 만한 것들이다. 결과적으로 공식 한국어 찬송 번역은, 번역이라기보다, "어메이징 그레이스"의 가사를 특정 관점에서 해석하여 요약-정리한 판본에 가깝다. 그렇다면 어째서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이란 곡은 함의를 명사화하는 경향을 띠게 된 걸까? 이는 찬송가를, 은총의 경험을 포착하는 현상학적 징검다리로서가 아니라, 인간 경험 없이 교리 자체를 직접 전파할 수단으로 본 결과일 가능성이 크다. '광명'이라는 단어의 일반적 용법을 생각해보라. '자수하여 광명 찾자'라는 문구가 대표적이다. 교화적-교육적 목적을 지닌 도덕주의적 문구다. 그러나 뉴턴이 사용하는 '앞을 본다'라는 표현은 흔히 '광명'이라는 말이 맥락화하는 것처럼 단순히 도덕주의적이지 않다. 현상학적 경험의 층위를 포괄하기 때문이다. 현상학의 기본이 '본다'는 시각 경험에 바탕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Amazing grace!, how sweet the sound / That saved a wretch like meI once was lost, but now I am found / Was blind, but now I see 

‘Twas grace that taught my heart to fear / And grace my fears relieved / How precious did that grace appear / The hour I first believed! 

Through many dangers, toils and snares / We have already come / ‘Twas grace has brought us safe thus far / And grace will lead us home 

The Lord has promised good to me, / His word my hopes secures; / He will my shield and portion be, / As long as my life endures

Yes, when this flesh and heart shall fail, / And mortal life shall cease; / I shall possess, within the veil, / A life of joy and peace

The earth shall soon dissolve like snow, / The sun forbear to shine; / But God, who called me here below, / Will be forever mine 
놀라운 은총! / 나 같이 비참한 자 살리는 / 그 소리 얼마나 달콤한가 / 나 한때 길을 잃었으나, 지금은 구조되었네 / 한때 눈이 멀었지만, 지금은 앞을 보네 

내 심장으로 하여금 두려움을 느끼도록 가르친 것은 은총이었네 / 그리고 은총이 내 두려움을 달래주었네 / 그 은총 얼마나 소중하게 보이는지 / 내가 처음 믿음을 가졌던 그 시간!

많은 위험과, 고생, 유혹을 거쳐 / 우리는 이미 도착했네 / 우리를 여기까지 안전하게 데려다준 것은 은총이었네 / 은총이 우리를 고향으로 이끌어줄 것이네

주님은 내게 약속해주셨네 / 그의 약속이 내게 희망을 굳건하게 가져다주네  / 그가 내 방패이자 양분이 되어주실 것이네 / 내 삶이 지속되는 한

그렇네, 이 살과 심장이 멈추는 날 / 육신의 삶이 끝나는 날 / 난 진실을 가리는 장막 안에 소유하게 될 것이니 / 기쁨과 평화의 삶을

대지는 곧 눈과 같이 녹아서 사라질 것이고 / 태양은 빛을 내기를 멈출 것이지만 / 나를 여기 낮은 곳으로 불러내신 / 하나님은 영원히 나의 것이리

 

John Newton, "Amazing Grace"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 큰 죄악에서 건지신 주 은혜 고마워 나 처음 믿은 그 시간 귀하고 귀하다 / 이제껏 내가 산 것도 주님의 은혜라 또 나를 장차 본향에 인도해 주시리 / 거기서 우리 영원히 주님의 은혜로 해처럼 밝게 살면서 주 찬양하리라

 

"나 같은 죄인 살리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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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spel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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