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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 음악에서 BTS로, 혹은, 프론티어 정신에서 정신 건강으로

by spiral 2021. 1. 25.

스매싱 펌킨스의 1995년작 [멜론콜리](Mellon Collie and the Infinite Sadness)라는 앨범을 듣고 있으면, 백인 남성이 이끄는 미국 대중문화의 마지막 전성기는 1990년대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사실 [멜론콜리]의 매력은 앨범 특유의 남성적 포부로부터 기인한다. 2시간이 넘는 길이를 지닌 더블 앨범이라는 사실을 보라. 이미 길이에 있어서 역사에 남을 '대작'을 만들고 말겠다는 패기가 느껴진다. 내용면에서는 해당 앨범이 록 음악의 폭력성을 최대치로 담아내는 동시에 정반대의 서정성마저도 그 어느 팝음악 앨범보다도 더 섬세하게 담아내고자 한다는 사실이 눈에 들어온다. 이는 처음 세 곡만 들어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즉, 앨범과 동일한 제목을 하고 있는 첫 번째 건반 연주곡의 잔잔한 우울함과 함께 시작하여, 두 번째 팝적 감수성을 지녔으나 결코 말랑말랑하지만은 않은 야심을 드러내는 곡("Tonight, Tonight")을 지나, 마치 소리로 구타를 당하는 듯한 경험을 선사하는 세 번째 곡("Jellybelly")을 거치고 나면, 이 앨범이 지닌 감정의 진폭이 어느 정도나 극적으로 넓은지 금방 파악하게 된다. 쉽게 말해서 아름다움과 폭력이 공존하는 모습니다. 폭력이 미적으로 변한 것이거나, 아니면 미적인 것이 폭력적으로 변한 것이거나, 둘 중 하나다.

결과적으로, 펌킨스의 [멜론콜리]는 그 안에 모든 것이 다 있다는 느낌을 준다. 마치 이 앨범 이후 세계는 존재할 수 없다는 듯한 제스처와 같다. 이 앨범 한 장으로 세계를 대체해버리겠다는 야심이 느껴진다. 혹은, 아직 온라인의 세계에 완전히 갇히지 않은 미국식 초월주의가 기타를 들고 '거라지'(garage) 안에서 용틀임을 한 결과와 같이 들리기도 한다. 예컨대, 홀로 대자연과 마주해야만 하는 에머슨(Ralph Emerson)식 초월주의(trascendentalism)는 오늘날의 온라인 문화 속에서 꽃필 여지가 없다. 물론, 미국의 프론티어 정신은 한때 온라인에서 구글이나 페이스북, 아마존과 같은 기업을 낳기도 했다. 하지만 많은 후속 세대는 그저 온라인 세계 안에 갇혀가고 있기도 한다. 그렇다면 아직 온라인 세계가 존재하지 않았던 1980년대에 미국의 아이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그때나 지금이나 미국의 중고등학교 교실에서 십대들은 답답함을 느끼기는 마찬가지였다. 19세기 미국의 모습에 비하면 그들 또한 이미 닭장에 갇힌 신세였다. 대자연이 그들에게 허락되었을리 없다. 교실 밖으로 나갈 수 있다면 그게 곧 해방을 뜻했다. 그들이 교실 밖에서 찾아낸 대안의 하나는 친구들과 차고로 가서 지글거리는 기타 소리와 경쟁하듯 악을 써가며 록 음악을 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그들이 새로운 세상을 꿈꾼 방식이었다. 그들이 찾아낸 탈출구인 록-메탈 음악이 폭력적 양상을 띤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애초 그들이 노래하고자 했던 것은 아름다운 삶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에게 필요했던 것은 주어진 현실로부터의 해방이었다. 여기서 요점은 새로운 세계가 태어나기 위해 기존의 세계는 파괴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한편 최근 미국의 대중음악에서 1990년대에 스매싱 펌킨스가 보여준 것과 같은 미학적 폭력성을 지닌 젊은 음악가를 찾아보기는 어렵다. 미국의 주류 대중음악이 드디어 미학적 폭력성을 극복한 것일까? 아니면 폭력성이 음악의 영역에서조차 퇴출되어 다른 영역으로 좌천된 것일까? 이 지점에서 보아야할 것이 최근 미국에서 벌어졌던 백인 중하류층 폭도들의 의회 점령 사건이다. 즉, 최근 미국 주류 음악계에서 미학적 폭력성을 찾아보기 어렵게 된 정황은 길거리에서 날것의 폭력성을 아주 쉽게 직접 마주하게 된 정황과 동시적이다. 근래 해방을 꿈꾸는 미국의 폭력성이, 미적 형식을 얻지 못한 채, 폭도가 되어 의회로 직접 쳐들어가는 모습을 취하고 있다는 뜻이다. 1980년대에 메탈이 백인 중하류층 남성의 정서를 대변하는 음악으로 여겨졌다는 점을 기억해보라. 물론, 1990년대 얼트록은 1980년대 메탈에 대한 반발을 포함하고 있었다. 즉, 1990년대 얼트록은 1980년대 메탈의 남성성이 히스테릭하게 여성화된 판본과 같았다. 그러나 두 경우 다 여전히 백인의 음악이라는 점에서는 이견이 없었다. 다시 말해, 록-메탈 음악 자체가 애당초 백인의, 백인을 위한 음악으로서 태동했다는 뜻이다. (물론, 1960년대 말 '사이키델릭한' 록의 태동기에는 예외가 있기도 했다. 예컨대, 지미 핸드릭스는 흑인이었다. 그러나 그의 계보를 잇는 흑인 록 음악가를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여기서 '사이키델릭 록'이, 정형화된 장르로서의 록이라기보다, 블루스나 재즈적인 요소를 품은 실험적 록의 한 형태로 여겨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즉, 핸드릭스의 계보는, 록 음악이 아니라, 흑인 블루스-재즈 기타리스트 속에서 인지된다.) 즉, 록 음악이 음악 시장에서 주류의 위치를 차지하는 한은 어쨌거나 미국의 대중음악은 백인들의 것이라 할 수 있는 면이 있었다. 그러나 2020년대에 우리가 보는 것은 중하류층 백인 남성의 정서가 더 이상 미국 대중 음악계를 호령하지 못하는 모습이다. 미국 내에서 미국의 중하류층 백인 남성을 위한 자리가 점점 줄어들고 있는 것이다. 대중문화라는 무대조차 상실하게 된 그들이 직접 길거리로 나서는 것은 당연한 수순인 셈이다.

사실 1990년대까지 미국 대중음악은, 메탈이든 록이든 팝이든, 시장 전체를 좌지우지하는 큰 흐름이란 것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흐름 중 하나는 중하류층 백인 남성이 주도했다. 아이언메이든, 블랙사바스, 쥬다스프리스트 등 초창기 영국 메탈 밴드로부터 시작해 미국의 메탈리카, 메가데스, 테스타먼트, 판테라, 슬레이어, 머틀리크루, 건즈앤로지즈, 피어팩토리, 드림시어터 등으로 이어지는 백인 남성 메탈 밴드 전통을 생각해보라. 흔히 1980년대 메탈 음악은 당대 제조업 기반 노동자 계층 백인 남성이 남성성을 드러내는 과정에서 도입하게 되는 문화적 양식으로서 여겨졌다. 1990년대 얼트록은 이와는 조금 다른 배경을 지닌다. 제조업 기반 노동자 가정이 아니라, 말하자면, 무직자 알콜 중독자 아버지가 폭거를 일삼는 가정에서 여성화된 채로 자란 중하류층 백인 남성들이 히스테리를 풀어내는 문화적 양식에 훨씬 더 가깝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서, 1990년대 얼트록의 경제-가정 구조는 제조업 기반 노동자의 삶이 허락하는 최소한도의 안정성도 지니고 있지 못하다. 너바나의 커트 코베인을 생각해보라. 자동차 정비공이었던 아버지와 식당 일을 하던 어머니는 그가 9살 때 이혼을 한다. 이혼 후 코베인의 아버지는 재혼을 한다. 의붓어머니와 아버지 사이에서 새로 태어난 아이와의 관계에서 코베인은 자신이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느끼게 된다. 친어머니 또한 재혼을 하나 새 남편의 학대에 시달리게 되고, 코베인은 그 결과를 목격하면서 자라게 된다. 쉽게 말하면, 코베인은 온전하지 못한 가정 환경을 지닌 전형적인 중하류층 백인 가정 출신이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어린 시절 코베인은 또래 집단 사이에서 'faggot'('계집애 같은 놈' 혹은 '동성애자')이라는 말을 들으며 자라게 된다. 그는 전형적인 남성일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아버지 역할을 할 수 있을리 없었다. 결혼 후 그는 딸을 얻게 되지만 아버지로서의 책무를 버리고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그러나 여기서 확인해야할 요점은 조금 다른 데 있다. 즉, 1980년대식 메탈 문화와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1990년대에 코베인은, 그가 의도했든 안했든, 미국 대중 문화의 아이콘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미국 중하류층 백인 남성이 미국 대중 음악계를 지배하던 시절에는 이른바 형편 없는 배경을 지닌 중하류층 남성에게도 이른바 '인생역전'을 해볼 기회가 주어졌다는 뜻이다. 당시까지만 해도, 동성애자의 음악이든, 하층민의 음악이든, 무엇이든, 빌보드 차트는 백인 남성 음악가의 영향력이 막강한 곳이었다. 그러나 지금 미국의 대중 음악계는 조금 다른 양상을 띠고 있다. 시장 내에서 각각의 장르를 지배하는 몇몇 거대한 슈퍼스타가 있다기보다는 다양한 종류의 음악이 혼재하는 모습이다. 한 예로, 1970-80년대부터 이어져온 백인 남성 록-메탈 전통을 계승하는 2020년대의 영미권 남성 록 밴드가 누구인지 사람들은 잘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다. 2021년 그래미 록 관련 부분 후보에 오른 음악가들을 한번 보자. 흑인 레즈비언 하나(Brittany Howard), 백인 여성 리더를 지닌 밴드 하나(Big Thief), 여성 솔로 셋 (Pheobe Bridgers; Fionna Apple; Grace Potter), 영국 국적 흑인 남성 하나(Michael Kiwanuka) 등이 눈에 띈다. 특히 가장 주목할 만한 음악가인 브리트니 하워드의 음악은, 록 음악이 아니라, 흑인 영가의 느낌이 강하다. 사실 그래서 매력적이다. 순수한 백인 남성 밴드 혹은 솔로는 테임 임팔라, 스트록스, 폰테인스 D. C. 벡, 스터길 심슨 뿐이다. 그마저도 테임 임팔라와 폰테인스 D. C.는 각각 호주 및 아일랜드 출신이다. 쉽게 말하면, 미국인 백인 남성 슈퍼스타 메틀-록 밴드의 명맥은 사실상 사라지고 있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최근 빌보드 차트에서 보게 되는 것은 전에 본 적 없는 외래의 음악가다. 한국의 BTS가 빌보드 차트를 점령하게 된 일이 대표적이다.

달리 말하면, 21세기 들어 미국의 중하류층 백인 남성들은 대중음악의 영역에서조차 이렇다할 탈출구를 얻지 못하고 있다. 여기서 이른바 최근 10년 사이 미국에서 스스로를 '얼트-우파'(alt-right) 혹은 '대안-우파'라 칭하는 무리들의 성질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흔히 그들의 인종적 계급적 정체성은 '중하류층 노동자 백인 남성 트럼프 지지자'로 요약된다. 즉, 사실상 '네오-나치'와 다르지 않은 이들 '대안-우파'가 나오게 된 배경에는, 어떤 면에서, 가진 것 없는 자들에게 마지막 탈출구로 여겨지던 대중 문화의 영역에서조차 주류로서의 지위를 상실하게 된 미국의 중하류층 백인들의 박탈감과 같은 것이 있다. 이런 말을 해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음악의 영역에서 대변자를 갖추지 못하게 될 때 폭력은 보다 직접적으로 정치적이 된다. 여기서 문제는 정치 자체에 있지 않다. 바디우(Alain Badiou)가 말하듯, 사건은, 언제든 어떻게든, 일어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사건에 신의(fidelity)를 표할 의무가 있다. 문제는 '대안-우파'의 정치적 열망이, 사건은커녕, 19세기적 백인우월주의 혹은 인종주의의 형태를 띤다는 것이다. 미래의 정치가 아니라 과거의 정치가 야만의 모습으로 되돌아오는 것이다. 록 음악이라도 있었다면 괴성을 지르면서 끝내는 편이 나았을 것들이다. 그러나 지금은 안타깝게도 록 음악의 시대가 아니다. 그들이 길거리로 나서는 것은 그러한 절박한 맥락 속에서다.

오늘날 미국의 10대 및 20대들 사이에서 '정신 건강'(mental health)이 큰 사회적 이슈가 되는 배경에 록 음악과 같은 미학적 폭력성의 양식을 상실하게 된 정황이 있다고 말해본다면 어떠할 것인가? 즉, 1990년대였다면 록 밴드를 조직했을 아이들은 지금 18-9살의 나이에 집을 떠나 대학의 기숙사에서 들어와 살며 불안 증세를 호소한다. 대학에서 미국 학생들을 가르치며 최근과 같이 여러 증세를 호소하며 공식적으로 '어커머데이션'(accomodation)을 요구해오는 경우를 많이 본 적도 없지 싶다. 정상의 1.5에서 2배에 이르는 시험 시간 및 페이퍼 제출일 연장 등이 그들이 필요로 하는 사항이다. 내가 보기에 의아한 것은 사실 수업 중에는 멀쩡한 아이들이 시험이나 페이퍼 같은 부분에 있어서는 이러한 조치를 요구한다는 사실이다. 시험이나 페이퍼 제출 등이 스트레스인 것은 누구에게나 비슷하다. 나 또한 시험을 즐기는 사람이 전혀 아니다. 이들 기준으로 치면, 난 이미 20년 전에 정신병원으로 실려갔어야 했다. 차이가 있다면 내 경우 그러한 조건을 정상적인 것으로 여기고 살아갔던 반면, 이들 미국의 백인 중산층 아이들은 열심히 그들의 어려움을 호소하며 그에 걸맞는 조치사항을 요구해온다는 것이다. 어린 시절 내가 요령이 없었던 걸까? 아니면 시대가 변한 걸까?

흥미로운 것은 정신 건강 이슈에 시달리는 이들 미국의 젊은 세대(young adults)의 감정을 대변하는 음악가의 하나가 BTS라는 사실이다. 즉, 이들 세대에게 BTS의 음악은 그들이 느끼는 좌절과 절망을 딛고 일어서게 해주는 동력의 하나다. 여기서 요점은 이들에게 BTS는, 1990년대에 록 음악이 그러했듯 '악다구니의 음악' 혹은 '폭력의 음악'인 것이 아니라, '치유의 음악'이라는 것이다. 세월호와 함께 사라진 아이들에 대한 그리움을 표하는 "봄날"이란 곡이 대표적이다. 여기서 2020년대 한국의 팝 음악과 1990년대 미국의 록 음악 사이의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2020년대에 한국의 팝 음악은 "선한 영향력"이란 것을 보다 직접적으로 추구하며 정신 건강 문제에 시달리는 젊은이들을 위로하고자 한다. 그에 비해 1990년대에 미국의 록 음악은, "Jellybelly"라는 곡이 보여주듯, 음악적 형식의 층위에 있어 폭력성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경향을 지녔다. 이것이 한국식 집단적 정서와 미국식 개인주의의 바탕을 이루는 프론티어 정신이 발현되는 방식의 차이일 것이다.

달리 말하면, 2020년대 팝음악적 감수성과 가장 동떨어진 곳에 있는 것은 하위문화적 감수성이다. 하위문화적 감수성은 사회로부터 소외된 자들의 불안을 보다 직접적으로, 즉 폭력적 형태로, 포착해내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2020년대 주류 대중문화의 감수성은 소외된 개인이 품고 있는 폭력성을, 직접 드러내려하기보다, 치유하고자 한다. BTS의 "구해줘"(save me)라는 곡을 보라. "숨쉬고 싶어, 이 밤이 싫어, 이젠 깨고 싶어, 꿈 속이 싫어, 내 안에 갇혀서, 난 죽어있어, 혼자이기 싫어, 네것이고 싶어"라고 말하며 시작한다. 물론, "구해줘"라는 곡은 "난 괜찮아"(I'm fine)이라는 연작으로 이어지며 치유의 과정을 도입한다. 이러한 화해와 치유의 정서는 미국 중하류층 문화의 전공 분야가 아니다. (예컨대, 미국 하위문화를 그대로 들여온 한 가지 사례인 한국의 힙합문화를 보라. 그들이 하위문화적 폭력을 승화시키는 방법은 단순하다. 개인의 부귀영화를 '플렉스'하는 문화가 그들이 지닌 승화의 양식이다. 여기서 개인의 부를 과시하는 것이 고립된 개인이 바들거리며 취하는 삶의 양식이라는 점을 기억해야할 것이다.) 그러한 일에는 크게 재주가 없는 게 미국의 중하류층 문화다.

여기서 착각해서는 안되는 것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미국식 '나이스함'이, 중하류층 문화가 아니라, 중상류층 문화라는 사실이다. 거꾸로 말하면, 마이클 잭슨의 "Heal the World"나 "We're the World"는 미국의 중류층 문화가 대중문화화된 경우에 가깝다. 물론, 1990년대 팝음악을 이끈 것은, 셀린 디옹, 머라이어 캐리, 휘트니 휴스턴 등이 보여준 바, 전형적인 중류층의 정서이기도 했다. 그러나 미국 대중문화의 참신함은 늘 많은 부분 중하류층 문화에 빚지고 있기도 하다. 1990년대 얼트록 혹은 힙합 등이 대표적인 경우다. 달리 말하면, 미국 대중문화의 한가지 특징은, 1990년대 초반으로 치자면, '계집애 같은 놈'이 만든 음악에 열광을 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미국인들이 이주 초기부터 지녀왔던 프론티어 정신과 관련이 있다. 미국인들은 대자연 앞에서 홀로선, 그러다 파멸에 이르기도 하는, 개인의 삶 앞에서 감동할 준비가 늘 되어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서, 마음 속 깊은 곳에 '로빈슨 크루소'를 품은 채 살아가는 게 미국인들의 정체다. 심지어 고립된 개인성에 대한 반발로 선불교적 명상 문화 등 이른바 '동양적인 것'에 심취하며 빠져드는 것이 미국인들이지 않던가? 폐허가 된 문명 속에 홀로 살아남은 개인의 이야기를 그려내는 미국식 할리우드 재난 영화에서 쉽게 볼 수 있듯, 그들의 마음 속 깊은 곳에는, 예컨대, 코로나 국면에서 살아남기 위해, 국가가 어떠한 방역 조치를 취해야하며 개인은 어떤 협조를 해야하는지 등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마트에 가서 휴지를 싹쓸이해와야겠다는, 유치한 두려움이 있다.

다시 BTS로 돌아가보자. BTS가 미국의 10대 및 20대 사이에서 큰 주목을 받게 된 배경에는 최근 미국에서 기존의 백인 남성 중류층 정서가 약화되고 있다는 사실이 있다. 즉, 20세기에 공장 노동에 기반해 삶을 이어갔던 미국 백인 중산층은 21세기 들어 급격히 붕괴하고 있다. 그들은 하류층으로 내려가고 있다. 이와 동시에 최근 미국에서 새롭게 등장하는 중하류층은 인종적-문화적으로 훨씬 더 다각화되고 있다. 그들은 더 이상 기존 중하류층 미국 백인 남성의 정서에 동조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주민으로서 살아가는 자신의 목소리를 대변해줄 새로운 대중음악적 양식을 찾아내고자 한다. 그러나 그들이 찾는 것은 거친 하위문화적 정체성 또한 아니다. 그들이 찾는 것은 중하류층 '정신 건강' 이슈를 보듬어줄 '치유의 음악'이다. 바로 이러한 단계에서 새로운 이주 미국인의 정체성을 대변한다고 여겨지는 것이 BTS라 말해볼 수 있다. 미국 대중음악의 헤게모니가 거친 남성 백인 중하류층 문화에서 LGBTQ+적 정서에 보다 친숙한 비백인 이주자 2-3세대 문화로 넘어가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20세기식 하위문화적 감수성과 21세기식 LGBTQ+의 감수성이 동일하지 않다는 점을 보아야한다. 예컨대, 1980년대에 동성애는 AIDS와 결부된 마녀 사냥의 대상이었다. 그렇기에 그들의 감수성은 어딘지 모르게 날이 선 것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21세기의 사정은 많이 다르다. 예컨대, 현재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기업인 애플을 이끄는 것은 커밍아웃한 동성애자다.) 생각해보라. 미국 대중문화에서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는 것이, 예컨대, 아시아계 출신으로만 만들어진 보이그룹 혹은 걸그룹 등이다. 미국의 주류 대중문화는 비백인 문화라 할 만한 것 자체를 제공하지 않는다. 이 지점에서 이주자 가정에서 자란 젊은 세대가 느낄 소외감 및 박탈감을 생각해보라. 그들은 항상 그들의 목소리가 대중문화적으로 충분히 대변되지 못한다고 느낀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이들에게 BTS는 거의 모든 것을 만족하는 선택지로 현상한다. 즉, BTS는 하위문화적 폭력성을 지니고 있지 않으면서, 즉, 보다 보편적인 "선한 영향력"이란 것을 갖추고 있으면서, 동시에 기존 미국 대중문화가 지닌 높은 완성도 또한 갖추고 있다. 거기에다 비백인이다. 지겨운 백인 남성도, 간간히 문화적 다양성의 관점에서 등장하는 흑인도 아니다. 이 정도면 충분히 열광할 만하지 않은가? 여기서 예상해볼 수 있는 것은 지금은 이들 이주자들의 정서를 대변해주는 것이 한국에서 건너온 '수입품'이지만 시간이 더 지나면 미국 대중문화계 자체가 BTS와 비슷한 비백인 그룹을 산출해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돈이 되면 무엇이든 하는 것이 미국 대중문화의 산업적 특징이기 때문이다.

최근 미국 대중음악의 전성기가 지나갔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은 이렇듯 지금 미국 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행기적 상황과 관련이 있다. 의회로 쳐들어가는 미국 하류층 백인들의 모습은 그 한 증상과 같다. 기존에 하위문화적 정서를 통해 대중문화적 참신함의 바탕이 되어주었던 그들의 삶은 지금 희망을 잃은 채 망가져가고 있다. 여기서 한 가지 드는 생각은 저들 전형적인 미국의 백인 남성들에게는 언제나 정복의 대상으로서의 대자연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예컨대, 포드나 GMC에서 만드는 거대한 미국식 트럭을 생각해보라. 최근 본 포드의 한 트럭 광고는 걸걸한 남성적 저음의 목소리로 "Bigger boats call for tougher trucks"이라는 문구를 외며 여전히 '미국식 터프함'에 호소하고 있었다. 큰 배를 끌고 물가로 나가려면 거칠고 힘센 트럭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큰 배를 끌고 나가 대자연을 누비겠다는 발상에서부터 그러한 배를 끌 크고 강력한 트럭까지, 모든 게 미국적이다. 그들의 트럭은 그렇게 미국인스럽게 크고 거칠고 우악스럽게 생겼다. 1980년대 메탈 밴드 구성원들이 치렁치렁 몸에 달고 다니던 철제 장식이 생각나는 지점이다. 말하자면, 공장 노동의 관점에서, 혹은 대장장이의 관점에서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멋진 남성의 모습이란, 공작새의 깃털을 대신하여, 철제 장식을 다는, 그런 것이 아니었겠는가? 말할 것도 없이 메탈 음악의 디스토션 걸린 기타소리는 차가운 철제 기계가 돌아가는 소리와 비슷하다. 그래서 '철제 음악'(metal music)이라 불리는 것이지 않은가? 옛날식으로 말하자면, 대장장이의 음악인 셈이다. 

요점은 이들의 남성적 우악스러움이 그나마 1980년대에 메탈 음악이라는 미적 형식을 얻을 수 있었던 동안에는 미국의 대중음악이 전세계를 리드할 수 있었더라는 사실을 보는 데 있다. 1990년대에는, 얼트 록의 경우에서 보는 바, 다소 양상이 변해 히스테릭해지기는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백인 중하류층 남성들은 메탈의 연장선 속에서 미국식 대중음악의 양식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21세기에 들어서게 되면 미국식 프론티어 정신은 메탈-록 등을 통해 그 자신을 표현할 방도를 잃게 된다. 문제는 그와 동시에 미국의 대중음악 일반이 서서히 매력을 상실해가는 양상을 드러내게 된다는 것이다. 2000년에 빌리 코건이 스매싱 펌킨스 해체를 선언하며 반농담조로 남긴 말이 '브리트니 스피어스와 경쟁하기 힘들다고 느낀다'였다는 점을 기억해보라. 적어도 이때까지는 백인 위주 미국 대중음악의 패권에 흔들림 따위는 없었다. 그의 말은 단지 록 음악이 몰락했다는 신호 정도로 여겨졌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알게 된 것은 미국 특유의 록 음악이 주류에서 물러나자 미국식 대중음악의 매력이라 할 만한 것 자체를 상당 부분 상실하게 되더라는 사실이다. 쉽게 말해서, 지금 시점에서 볼 때, 팝 음악을 만드는 실력은 미국이나 한국이나 별로 차이가 없다. 사실 다른 누구보다 미국이 잘 할 수 있는 음악은 팝음악이 아니다. 미국적인 것은, 에머슨과 같은 사람들이 잘 포착한 바, 대자연 앞에 홀로 선 초월적 개인의 정신이다. 그리고 이 초월주의적 정신에 걸맞는 대중음악 양식은, 팝이 아니라, 록이다.

문제는 오늘날 록 음악 일반의 창의성이 고갈되었다는 것이다. 바티스 스트레인지(Bartees Strange)의 경우에서 보듯, 미국 내에서 심지어 흑인 록 음악가가 나오게 되었다는 것이 이를 잘 보여준다. 사실 미국의 대중음악의 영역에서 발견되는 현상은 21세기 들어 미국식 자본주의 모델이 생태학적 한계 등에 봉착하는 현상과 동시적이다. 즉, 오늘날 미국 자본주의의 문제는 원주민과 대자연을 정복함으로써 부를 거의 공짜로 추수하던 축복을 더 이상 누릴 수 없게 되었다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문제는 기존의 경제적 조건이 사라지자 이와 함께 미국 백인이 주도하던 대중음악의 매력도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미 말했듯, 그저 세련된 감수성으로 승부하는 팝 음악으로 칠 것 같으면 미국의 팝이나 한국의 팝이나 수준히 비슷하기 때문이다. 대자연을 잃은 미국식 프론티어 정신은 1990년대까지는 그나마 록음악이라는 폭력성을 통해 그 기운을 미학적으로 발현시킬 수 있었다. 이것이 1990년대에 미국 백인의 얼트록이 창의성을 내보일 수 있었던 배경이다. 그러나 지금 미국의 프론티어 정신은 그 어떤 미적 형식도 찾아내지 못하고 있다. 정신 건강 문제를 호소하는 미국의 10대 및 20대가 BTS를 듣게 되는 것은 바로 이 미학적 공백 속에서다. 그러나, 다른 한편, 미학적 공백과 함께 미국의 중년 백인들은 폭도가 되어 의회로 진격하고 있기도 하다.

미국의 프로티어 정신이 한번 더 비상할 방도는, 말할 것도 없이, 화성으로 가는 거다. 화성 식민지 건설이 현실이 된다면 그 선봉에는 분명 미국인이 있을 것이다. 일론 머스크를 보라. 그는 미국식 프로티어 정신의 화신과 같다. 그러나 화성에 도착하기 이전까지 미국 백인의 프론티어 정신은 어디로 갈 수 있을 것이란 말인가? 2021년 벽두에 대자연으로부터 버려져 길을 잃은 프로티어 정신은 의회로 달려갔다. 다음 목적지는 어디가 될 것인가? 미국식 프론티어 정신과 테러리즘 정신이 구분 불가능해지는 것은 자본주의의 꿈을 실현시켜주는 바탕인 풍요로운 대자연이 상실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미국 대중음악의 다음 정착지는 어디일 것인가? 첫번째로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전자음악이다. 말할 것도 없이 전자음악은 화성을 개척하는 것에 비견될 만한 작업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들어 드러나는 사실의 하나는 전자음악의 팝음악화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더라는 것이다. 이제 전자음을 사용하는 것 자체는 더 이상 새롭지 않다. 소리 자체를 개념화하기 위한 근본적으로 다른 접근이 필요한 때다. 어떤 새로운 작업이 가능할지 한번 지켜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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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llon Collie and the Infinite Sadness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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