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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임 별, "태풍 전날 밤"

by spiral 2018. 10. 27.

새로운 지식을 효과적으로 학습하고자 한다면 인간의 두뇌가 어떻게 지식 및 기억을 다루는지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뇌의 구조 혹은 뇌의 작동 방식에 관한 뇌과학 지식이 필요하다는 뜻이 아니다. 구태여 뇌가 만들어내는 전기 자기력을 탐침봉으로 확인한 후 그 위치를 물리적으로 포착하지 않더라도 경험적으로 두뇌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물리적 지도가 아닌, 인식론적 지도를 그려볼 수 있다는 뜻이다. 내 느낌은 최소한 두 개의 서로 구분된 층위가 있다는 것이다. 감정적으로 경험되는 지식을 다루는 층위가 몸 속 깊숙히 각인된 느낌으로 기저에 깔려 있다는 말을 첫째로 해볼 수 있지 싶다. 이는 육감적 지식이라 할 만한 것을 구성하는 영역으로서 보통 삶에 대한 도덕적 감각--선과 악에 관한 관념적 감각 혹은 죄의식의 감각--을 창출해내거나 혹은 예술 작품을 감상할 때 사용된다. 이는 마치 중력과 같이 느껴지는 영역으로서 언제나 그 자리에 머물며 내 의식을 침식할 것처럼 느껴진다. 이에 비해 뇌의 표면에서 대단히 민첩한 방식으로 작동하는 의식적 지성의 층위를 만들어내는 영역이 하나 더 있는 듯하다. 새로운 정보를 받아들여야 하거나 논리적 사고를 해야 할 때 이 부분을 사용하는 느낌이 든다. 고도로 추상적인 철학책을 읽을 때면 이 부분이 최고조로 각성되며, 한번 각성되면 정신과 육신이 분리되는 느낌이 든다. 예컨대, 몸이 피곤함에도 불구하고 잠을 잘 수 없는 상태로 빠져들게 된다. 물론, 거꾸로 뇌가 이 상태에 있을 때 어려운 책을 읽으면 평소 이해되지 않던 부분들이 효과적으로 처리가 된다. 그래서 피곤하지만 욕심을 내어 자지 않고 계속 책을 읽게 되는 일이 일어난다. 그러나 이는 하루 종일 언제나 원할 때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니다. 뇌가 잠에 들고 나서 이 부분을 다시 깨우려면 시간이 상당히 걸린다. 또한, 이를 효과적으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몸의 전반적 건강 상태가 좋아야 한다. 사실 내가 식단에 관심을 기울이고 매일 운동을 하는 이유는 오직 이 부분을 효과적으로 사용하기 위해서다. (사실 학자가 되어서 매일 운동을 하지 않는다면 그는 프로가 아니라고 말해야한다. 그러나 반대로 말해볼 수도 있다. '몸짱'이 되기 위해 운동하는 것보다 허무한 일도 없지 않은가? 그것은 몸이 몸을 지시하는 닫힌 우주의 악순환을 의미할 뿐이지 않은가? 그것이 바로 가장 반창의적인 상태의 육체를 뜻하지 않는가?) 

문제는 첫번째 영역에 비해 이 두번째 영역이 컴퓨터로 치자면 마치 램을 사용하는 느낌이라는 데 있다. 이 부분을 사용하여 새로운 것을 학습할 당시의 느낌은 마치 방금 머릿속으로 정리한 지식을 내가 평생 기억할 수 있을 듯 선명하게 느끼지만 정작 하루만 지나도 내가 정리했던 지식의 많은 세부가 사라져 기억이 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특성을 안다면 당연히 새로운 지식을 받아들여 처리할 때 그 생각의 흐름을 전부 글로 기록하여 남겨두어야 한다. 뇌가 기억을 못한다면 컴퓨터에 문서로 그 기억을 남기면 되기 때문이다. 재밌는 사실은 때로는 내가 정리한 내용을 나중에 다시 보고 나조차 그 의미를 완전히 복구하지 못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지식을 처리하던 당시 사용했던 만큼 뇌가 동일하게 활성화되지 않으면 그때 달성했던 것만큼의 이해를 복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고도로 추상적인 언어를 사용하여 기록한 문서의 경우에는 심지어는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쓴 것과 같이 느끼게 되는 경우도 있다. 내가 쓴 글에 내가 소외되는 셈이다. 그럴 때면, 이런 생각을 하게 되기도 한다: '아, 내 글을 읽는 교수들의 느낌이 이런 것이었을지도. 그래서 그들이 은밀하게 나를 증오-사랑하는 것인지도.' 거꾸로 말하면, 이러한 단계에서 정리된 생각은 사물에 대한 경험을 다루는 층위와 충분히 엮이지 않은 모습을 취한다. 감정으로 느껴지는 앎의 층위가 앞서 말한 첫번째 영역에 기반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보자. 추상적 단기 기억 혹은 논리 자체라고 할 만한 것은 두번째 영역에서 일어난다. 반면, 장기 기억 혹은 깊은 육감은 첫번째 영역에 든다. 여기서 '완전히 분쇄되지 않은 채 화석이 된 1억 년 전 사물의 파편과 같이 박혀 있는 삶의 추상적 지식'이라 여겨지는 것은 이 둘 사이 중간 지점에 일어난다. 이를 달성하려면 단순히 추상적으로 새로운 지식을 처리하는 것을 넘어서 그것을 깊은 삶의 감각과 연결하려는 노력을 끊임없이 해야한다. 그러나 동시에 이는 완전히 깊은 감각에 파묻히게 되어서도 안된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한 감각에 기반한 언어는 추상적 논리의 구조를 완전히 상실하게 되어 미치광이의 것과 같이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그러한 것은 '무의식의 언어'라고 할 만한 것이다. 

두 영역의 구분과 연결에 관한 이야기를 조금 더 해보자. 예컨대, 내게 추상적 기하학의 공간일 뿐인 미국 땅에서 한국의 파편을 마주하게 될 때면 잃어버린 기억과 다시 조우하게 되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게 된다. 멀리 미국까지 전달된 모임 별의 [주인 없는 금]이 내게 그러하다. 오래된 청자 입장에서 그들의 음악이 뇌의 두 영역 사이 어딘가에 위치한다고 말해보고 싶다. 어떤 면에서 음악이라 불리는 현상은 추상적 의식이 무의식의 표면을 양자역학이 묘사하듯 원자의 핵 주변을 감싸는 전자처럼 선회하다 청자의 귀를 만나 결어긋남을 일으키게 될 때 만나게 되는 비자연의 자연화와 같은 것이다. 파동과 같이 잠재성의 형태로 모든 곳에 편재하던 전자가 '외부'라 불리는 왜래성과 조우하게 될 때 실체화되며 발생하는 입자를 의식이라 부른다면 음악은 잠재성과 실재성의 중간에서만 흥미로워질 수 있다. 아래 곡의 영상에서 만나게 되는 부패한 것으로부터 이격되어 발생하는 의식의 추상성을 보라. 그것은 미래에 대한 약속이면서 동시에 달성되지 못했던 과거가 물질로부터 비물질을 창출하는 방식을 보여준다. 그것이 우리가 흔히 '유령'이라 부르는 것의 정의이지 않은가? 그런 의미에서 유령은 형체를 잃어가는 자연이 내는 몸 없는 목소리이면서 동시에 답변을 끝없이 미루는 질문의 형식 그 자체를 가리킨다. 그것이 흑과 백, 혹은, 양과 음 어느 쪽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한 채 중간을, 길을, 구천을 떠도는 것들이 취하는 존재의 비형식이다. 이러한 중간 지대에서 음악은 화성을 구성하지 않는 것을 자연이라 부른다. 여기서 자연은 비자연과 구분되지 않는다. 쉴 곳으로, 집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열망, 그것이 자연의 다른 이름이라면, 그 모든 고향을 향한 열망에도 불구하고 못된 아이처럼 끝까지 자리를 뜨지 않고자 하는 죽음 충동과 같은 고집의 다른 이름이 비자연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래 곡에서 우리가 듣는 목소리는 그것이 취하는, 고집스럽게 집으로 가고자 하지 않는, 대화의 상대와 구분되지 않는다. 목소리가 취하는 대화의 상대가 상실 자체이기 때문이다. 즉, 그것은 목소리 자신의 육신이 위치하고 있는 곳--사라진 자연--을 지시한다. 그것이 장소를 잃어버린 목소리가 말하는 방식이다. 이것이 의식과 물질 사이의 관계이자 동시에 괴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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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 없는 금]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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