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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임 별, "친밀한 적들 (Friendly Enemies)"

by spiral 2018. 10. 10.

3년 전 대학원 수업에서 한 교수가 문학을 공부하지 않았다면 무엇을 했겠느냐고 물었을 때 철학을 공부했을 것이라 답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러나 난 지금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 이 길을 가지 않았다면 난 물질화된 이미지로서 공간을 다루는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공간을 디자인하는 건축가가 되었을 것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사실 3년 전의 답은 다른 방식으로 이해될 수 있다. 예컨대, 철학에 이끌리는 것은 단단한 집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어깨 위에 지고다니던 집을 잃어버려 헐벗게 된 달팽이의 모습을 떠올려보라. 물질이 액체가 되어 녹아내리는 장면, 더 나아가 기체가 되는 장면, 흙이 물이 되고 최종에 기체가 되어 공중으로 사라지는 모습, 혹은 물질이 불길에 휩싸이며 타버리는 모습, 그것이 정신이 발생하는 순간을 다루는 철학이 세상을 보는 방식이다. (인류 최고의 발명품이 언어라면, 지구가 생산해낸 최고의 발명품은 물이지 않은가? 물이야말로 모든 변이의 시작을 이루지 않는가? 돌과 같은 고체가 물이 되는 순간,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의 흐름이 발생하는 순간, 두 개의 다른 것 사이에 수축이 발생하여 둘 사이에 길이 나게 될 때, 물질로부터 생명이 발생하지 않는가?) 그래서 직접적으로 물질을 다루지 않는 철학에 전통적으로 대조되어온 것은 문학 혹은 예술이다. 예술 혹은 문학은 흔히 질료를 지닌 미학적 형상의 문제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내가 문학 연구자로서 하는 일은 문학의 형상을 분쇄하여 공기 중으로 그 먼지를 불어날리는 것이다. 난 내 손아귀에 한줌 흙의 모습으로 문학을 쥐고 싶은 게다. 그러나 역설이 여기서 발생한다. 바로 그 수학화된 존재로부터만 새로운 것을 구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건축가는 바로 여기서 탄생한다. 가라타니 고진의 말을 빌려보고 싶다. 철학은 '건축에의 의지'다. 그러나 그것은 오직 자연적 형상의 수학적 분쇄 위에만 세워질 수 있다. 

아래 모임 별의 곡은 공식적으로 발표되기까지 무려 8년 가까이 걸렸다. 아래서 사실 우린 2010년의 흔적을 듣고 있는 게다. 여기서 보는 것이 바로 건축에의 의지다. 이름조차 얻지 못했던 단 하루만에 작곡된 곡이 실제로 완성되기까지 끈덕진 8년이 필요했던 셈이니 말이다. 흥미로운 것은 최초 이 곡이 말 그대로 그저 폐허 위에 세워진 표지석과 같이 서있었다는 사실이다. '비행선'이라 불리는 서울의 한 술집이 공간을 잃어버리게 되었을 때 그 마지막을 기리고자 급하게 만들어져 불리워진 곡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비행선'이라는 물리적 공간은 2010년 10월 9일 사라졌다. 남은 것은 그날 그 공간의 공기를 진동시켰던 소리다. '비행선'이라는 공간을 형상을 가진 소리의 형태로 보존한 결과물이 이 곡이니 말이다. 그 보존 공사에 8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이 곡은 공간의 기억이다. 아래 곡에서 우리가 듣는 것은 '비행선'이라는 가게의 벽을 타고 진동했던 소리가 기억이 되어 지금 이 순간 2018년에 그 어떤 콘크리트 벽 없이 우리 귓전에서 유령과 같이 울리는 소리다. 건축을 단순히 물질의 문제로 이해해서는 안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오히려 건축은 비물질적 신체의 문제다. 그것은 사라져버린 육신들을 지금 이곳 우리가 속한 공간에 소환하는 작업이다. 오직 그렇게만 콘크리트 덩어리에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다. 오직 그렇게만 냉담한 기하학적 콘크리트 공간은 사람들이 혹은 유령들이 모이는 친밀한 장소가 될 수 있다. 그렇지 않을 때 공간은 그저 수용소 혹은 창고가 될 수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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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 없는 금] (Nobody's Gold)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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