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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n Hopkins, "Luminous Beings"

by spiral 2018. 5. 15.

올해 나온 앨범 중 단연 주목할 만하다. 이런 생각을 해볼 수 있을 것이다. 언젠가, 맑스였던가 아니면 엥겔스였던가, 19세기 프랑스 사회를 이해하려면 그 어떤 역사 저술 혹은 사회학 및 경제학 저술보다도 발자크의 소설을 읽는 것이 낫다고 말한 적이 있다. 동일한 방식을 따라 자연이 무엇인지 알고 싶다면 그 어떤 생물학 저술 혹은 생화학 저술보다도 존 홉킨스의 음악을 듣는 것이 났다고 말하고 싶다. 즉, 과학 속에는 자연이 없다. 그러나 이는 수학 공식이 아닌, 이른바 책 밖의, 자연 물상 속에 자연이 있다는 말이 아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 자연을 그 자체로 경험할 수 없다. 물론, 날씨가 좋을 때 우리는 집 밖에 나가 경관을 바라보고자 한다. 자연과 하나됨을 느끼고 싶어서다. 그러나 이는 단순한 의미의 감각적 만남을 의미하지 않는다. 자연과 만나기 위해서는 최소한도의 의미화가 요구된다. 말하자면, 자연과 만나기 위해 오히려 우리는 보이지 않는 자연의 층위를 상상해야한다. 예컨대, 루크레티우스적 원자의 작용 속에서 내 몸의 일부가 분해되어 떨어져 나가고 또 내 앞의 나무로부터 떨어져나온 원자가 서로 만나 엉겨붙으며 제3의 생명을 창출해내는 것과 같은 움직임을 마음 속에 그려내야한다. 그렇지 않고서 단순히 날씨가 좋다고 문 밖에 앉아 있는 일은 멍청한 일이 되고 만다. 예컨대, 그 순간 우리는 다음과 같은 천박한 계산을 해내고야 말지 않겠는가? '이 시간에 돈을 버는 편이 낫지,' '이 시간에 영어 단어를 하나 더 외우는 편이 낫지,' '이 시간에 수학 문제를 하나 더 연습해서 시험에서 1등을 하는 편이. . .' 자연이 의외로, 예컨대, 음악 속에 있는 이유는 바로 이 인간의 개념적 특징 때문이다. 즉, 자연이, 자연 자체가 아니라, '예술이 된 과학' 속에 있는 것은 우리의 사고가 스스로 우리의 몸과 다른 몸 사이의 물리적 연쇄 작용을 상상해내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연과 만나기 위해 개념의 매개를 거쳐야한다. 언젠가 자연의 두려움을 뼈속 깊이 각인한 적 있는 인간이 자신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낸 것이 개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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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gularity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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