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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 La Tengo, "Autumn Sweater"

by spiral 2018. 5. 8.

욜라탱고의 동일 앨범에서 한 곡 더 들어보자. 아래에서 확인해야할 것은 록 음악으로서 이 곡이 포착해내고 있는 전자 음악적 특징이다. 베이스가 곡을 지배하는 방식 및 그로부터 창출되는 기계적-반복적 정서를 보라. 키보드 및 드럼을 이끄는 것은 보컬 라인이 아니라 베이스 라인이다. 이는 가사를 통해 인간적 감정을 전달하는 매체로 여겨져 온 기존의 대중 음악이 기계적 리듬의 창출을 목적으로 하는 전자 음악의 영역으로 이동하는 순간을 포착하고 있다. 욜라탱고에게는 노랫말이 있긴 하지만 의미로서 기능을 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보라. 그것은 분위기를 창출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하여 결과적으로 이 곡이 만들어내는 것은 공간감이지 시간감이 아니다. 즉, 베이스 라인과 드럼 및 키보드가 하는 일은 연속적 시간을 잘라서 그것들을 다시 공간적으로 재조립하는 것이지 단일한 화자 혹은 노래하는 단일한 자아를 통해 시중종의 이야기를 시간적으로 풀어내는 것이 아니다. 바로 이 록 음악의 공간화가 1990년대 말 소수의 비평가적 관점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 욜라탱고가 록 음악의 새 영역을 창출해낸 밴드로서 찬사를 받도록 만든 원동력이다. 물론, 그 대중 음악적 결실은 역설적이게도 자식인 전자 음악이 가져가게 된다. 요컨대, 소리가 공간화되다 못해 완전한 공간의 배경을 이루는 음이 될 때 얻어지는 것이 바로 '전자 음악' 혹은 '엠비언트 음악'이지 않은가? 전자 음악에서 노래하는 자아 자체가 사라지게 되는 이유가 여기 있다. 대중 음악으로서 록 음악이 누리던 지위가 록 음악 자신이 열어낸 영역에 의해 무너지게 되는 셈이다. 전자 음악 앞에서 록 음악이 발견한 것이란 그저 그 자신의 촌스러움이지 않았던가? 모든 소리가 배경으로 흡수되어 그 육신을 완전히 감추어 위장할 수 있게 될 때 여전히 무대 위에서 마초적으로 웃통을 까고 노래부르도록 남겨진 자아는 그저 그 자신의 알몸 속에서 수치스러움을 발견할 수 있을 뿐이지 않은가? 록 음악에서 전자 음악으로 넘어간 라디오헤드를 보라. 혹은 1990년대 초반 메틀 음악으로 밴드를 시작했던 노트위스트의 전사를 보라. 그것이 바로 1990년대 말 2000년대 초 일어난 일의 정체다. 

록 음악과 전자 음악의 관계로부터 어찌하여 스매싱 펌킨스가 오늘날 구태의연한 옛 밴드의 하나로 머물게 된 것인지 그 배경을 짐작할 수 있다. 사실 스매싱 펌킨스는 1998년에 라디오헤드보다도 더 일찍 전자음악적 요소를 그들의 새 앨범에 접목한 바가 있었다. 그것이 [Adore]라는 앨범이다. 문제는 전자음악적 요소의 도입이 이들에게 있어 드러머의 부재를 해소하기 위한 차선책으로서 선택되었다는 데서 발생했다. 말하자면, 드러머의 부재라는 문제를 드러머가 필요하지 않은 새로운 음악을 만드는 것으로 해결한 게 아니라 드러머가 사라진 빈 자리를 색다른 전자적 양념 좀 쳐서 단지 가리고자 했던 것이다. 그 결과는 맥 빠진, 록도 전자 음악도 아닌 음악이었다. 훗날 빌리 코건이 이 앨범을 회상하는 방식에서 이 문제의 핵심이 드러난다. [Adore]를 전자 음악으로 소개할 것이 아니라 어쿠스틱 음악으로 소개했어야 했다고 후회하는 발언을 남긴 게 그것이다. 이러한 문제 인식은 2000년대 중반 밴드 재결성 이후 그로 하여금 더 강력한 록-메탈 음악을 추구하도록 만드는 원동력이 된다. 그러나 문제는 2007년 기준으로도 그러한 회귀가 다만 시대착오에 불과했다는 데서 발생한다. 쉽게 말하면 [Adore]의 실패를 회상할 때 빌리 코건은 질문에 대한 새로운 답을 찾고자 한 셈이나 찾아낸 답이 완전히 잘못된 답이었던 셈이다. 여기서 전자 음악과 록 음악의 관계가 드러난다. 둘의 관계는 주어진 틀 위에서 이런 저런 답을 내놓는 문제가 아니라 록 음악이라는 질문 자체를 다시 구성하도록 요구하는 보다 근본적인 문제에 기반하고 있었던 것이다. 즉, 전자 음악은 록 음악이 자신을 지켜내기 위해 싸워서 물리쳐야할 외부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오히려 전자 음악은 록 음악 그 자신이 낳은 사생아, 즉, 우발적 진화의 산물이었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자연의 모든 위대한 진화는 적통이 아니라 우발적 돌연변이에 의해 이루어진다. 말하자면, 록 음악의 진정한 계승자는 록 음악이 아니라 전자 음악이다. 혹은, 차범근의 계승자는 차두리가 아니라 박지성이고 손흥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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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Can Hear The Heart Beating As One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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