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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닉, 혹은, 그 어릿광대의 세 아들들에 대하여

by spiral 2023. 3. 2.

근래 이적이 어떤 음악을 하는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가 20대에 했던 음악은 기억한다. 패닉의 1996년작 [밑]이 한 예다. [밑]이란 앨범에 그는 그가 가진 모든 재주를 다 쏟아부었다. 그 시절 그는 세상과 긴장 관계에 있는 음악을 들려주었다. 아래 "그 어릿광대의 세 아들들에 대하여"라는 곡이 들려주듯 그는 알레고리를 통해 사회 내 모순에 대해 이야기를 할 줄 아는 자였다. 광대는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는 사람이다. 예컨대, 그는 외줄 위에서 춤을 추며 사람들의 이목을 끈다. 겉으로는 늘 웃고 있다. 그러나 그는 언제 줄 위에서 떨어질지 모른다. 사람들이 그에게 등을 돌릴 때 그의 인생은 끝이다. 인생은 줄타기와 같다. 한 순간 화려한 춤사위에 사람들이 주목하는 듯하지만 어느 순간 바로 그 관심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죽음은 사회적이다.

사회적 죽음의 형태는 다양하다. 동급생에 의한 폭력에 의한 것일 수도, 국가의 폭력에 의한 죽음일 수도, 사회적 참사일 수도, 내전에 의한 죽음일 수도, 외세의 침략에 의한 죽음일 수도 있다. 이러한 죽음은 자연적 죽음과 달리 당연하지 않다. 일어나지 않았을 수 있는 죽음이 사회적 죽음이기 때문이다. 그 결과 사회적 죽음은 살아남은 자들 사이에 기억의 문제를 남긴다: "세상의 그 어떤 서러운 죽음도 그냥 잊혀지진 않는다." 억울한 죽음을 기리는 후속 세대들이 있기 때문이다: "춤추는 광대는 서럽게 갔어도 마음은 여기 남아있다." 광대의 아이들이 남아서 그를 기억하기 때문이다. "어릿광대의 세 아들들에 대하여"는 민중에 관한 노래다. 1990년대에 한국의 록음악이 민중가요 전통과 맞물렸던 드문 사례다. 후렴구에서 사용되는 꽹가리 소리가 말하듯 광대의 세 아들들의 이야기는 민중의 축제 소리를 담고 있다. 그러나 그 축제 소리 안에는 온갖 고통스러운 기억들이 다 서려있다. 사회는 후속 세대가 앞선 세대의 기억을 이어받을 때 유지된다. 인간은 기억을 통해 하나가 된다. 기억을 통해 하나된 집단을 민중이라 부른다. 사회적 기억을 전수받지 못할 때 민중은 그저 대중이 될 수 있을 뿐이다.

패닉의 사례가 주목할 만한 이유는 이적이 20대에 대중문화의 아이콘으로서 사회적 기억의 문제에 대해 논하고 있었다는 데 있다. 즉 1990년대까지 사회적 기억은 20대에 전해져 재생산되고 있었다. 반면 근래 한국 사회가 와해되어가는 바탕에 있는 현상은 사회적 기억이 전수되지 않고 있다는 데 있다. 이제는 심지어 대통령이 나서서 일제에 침략 행위에 저항한 행위를 기리기 위한 3.1절에 '우리 민족이 세계적 흐름을 파악하지 못해 일제에 주권을 빼았겼던 것에 비해 지금 우리는 과거 군국주의 일본과 파트너 협력 관계를 맺어 새로운 흐름에 동참하고 있다'는 망언 수준의, 일제 식민사관에 오염된 논평을 공식적으로 내놓을 정도에 이르렀다는 것이 이를 잘 보여준다. 심지어는 '일본에 협력하는 것이 3.1 운동 정신'이라는 정신 나간 주장을 대통령이 하고 있다니 이게 말이 되는가? 일본의 식민지배는 우리가 힘이 없어서, 우리가 잘못해서 일어난 일이라는 썩어빠진 일본 극우들의 주장이 대통령의 입을 통해 나오고 있는 것이다. 대통령의 논리에 따르면, 모든 죽음은 자연에서 먹이사슬에 따라 죽음이 일어나는 것과 동일한 의미에서 자연적 죽음일 뿐이다. 자연 속 죽음을 우리는 억울한 죽음이라 부르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일제의 식민지배에 의해 죽은 자들도 억울한 죽음일 수 없으며 힘센 자에 의해 약한 자가 먹힌 결과일 뿐이라는 뜻이다. 그렇기에 그 어떤 죽음도 기억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이것이 일제에 저항한 3.1 운동의 정신을 기리기 위한 날에 한국의 대통령이라는 자가 내놓은 말의 요지다.

대통령의 3.1절 기념사의 논리대로라면, 10.29 참사는 당일 이태원에 간 사람의 잘못에 불과하다. 이는 학폭을 당한 사람이 힘센 사람의 분위기를 파악하지 못해 일어난 일, 강자의 논리에 동참하지 못해 일어난 일이기에 당한 사람이 못난 것이고 잘못이라는 발상과 같다. 해당 논리에 따르면 아우슈비츠에서 유태인이 나치에 의해 학살 당한 것도 유태인이 못나서 일어난 일에 불과하다. 강도가 집을 털고 살인을 하고 가도 당한 놈이 약하고 못나서 당한 것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최근 있었던 경찰청 고위직 인사참사가 이들의 약육강식에 기반한 폭력적 세계관이 정확하게 표현된 결과이지 결코 예외적 실수와 같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들의 세계는 모든 것이 약육강식의 논리에 기반한다. 대통령의 3.1절 망언은 국가를 하나로 묶는 끈을 끊는 행위와 같다. 화해와 통합이 아니라 반목과 갈등을 키우는 행위와 같다. 보통 '보수'는 외세를 적으로 삼아 국가 내 단결을 꾀한다. 거꾸로 지금 정부는 외세와 내통하여 국가 내 갈등과 반목을 키우는 일을 하고 있다. 대단히 위험한 반보수적 발상이 아닐 수 없다. 여기서 문제는 20대다. 대통령의 발언은 아직 세상 경험이 상대적으로 적은 10대와 20대 사이에 잘못된 신호를 줄 수 있다. 저러한 논평을 지속적으로 듣게 되면 일게 보르게 식민사관을 내면화하게 된다. 이는 국가의 기상을 걲는 대단히 위험한 일이다. 대통령의 발언은 역사의 허리를 자르려는 시도와 같다.

미국 대학에서 가르치다 보면 한국 학생들을 만나게 될 때가 있다. 미국 학부 유학은 대학원 유학과 달리 돈이 없으면 하지 못한다. 그렇지 않은 부류도 있겠지만 많은 수는 자비로 한다. 이는 이들 대부분이 돈 있는 집 자식들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난 이들을 보며 이들이 한국을 이끌 미래의 엘리트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들이 한국의 정치계에 뛰어들게 될 경우 이준석 같은 인물이 될 확률이 훨씬 더 크다고 본다. 이준석에게 결여된 것은 한국의 역사에 대한 이해 및 그에 기반한 공적 가치에 대한 의식이다. 난 미국에서 공부하는 한국인 유학생들이 과연 한국의 역사에 대한 이해를 얼마나 지니고 있을지 의문이 들 때가 많다. 과거 한국의 대학생들이 대학가에서 공적 가치에 대해 배울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스스로 자생적으로 키워온 지적 전통이 있었기 때문이다. 난 미국에서 공부하는 유학생들이 그런 경험을 누리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미국의 대학은 한국의 사회 정치에 대해 가르치지 않는다. 선후배로부터 배울 기회도 없다. 기본적으로 미국 대학에서 한국인 유학생은 소수다. 유학생들은 사회적 기억을 공유함으로써 공동체에 소속된 느낌이란 것을 갖기 어려운 위치에 있다. 공동체에 소속되지 않으면 사회적 책임감을 배울 기회를 갖지 못하게 된다. 막연하게 종교 집단에 찾아가 소속감을 느낄 수 있을 뿐이다. 한국 사회의 문제나 한국 사회가 나아가야할 방향에 대해 지적으로 성찰할 기회가 이들에게 주어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러한 상태에서 한국 인터넷 커뮤니티에 들락날락하게 된다. 문제는 오늘날 인터넷 커뮤니티가 20년 전과 달리 더 이상 지적 성찰의 기능을 수행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지난 20년 동안 지적 소속감이 아니라 감정적 소속감에 기반하는 방향으로 발전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유학한 대학생이 한국 사회에 거리를 취할 수 있을 것이며 그래서 비판적 지성으로 기능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그다지 사실이 아니다. 그러한 일이 벌어지려면 완전히 미국 사회에 동화된 후여야 한다. 그런 상태에서 한국 사회에 돌아와 한국에서 벌어지는 것들을 낯선 눈으로 볼 수 있어야한다. 그러나 오늘날의 현실은 미국 대학교에 다니지만 한국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활동하는 것이 얼마든 가능하다. 유학을 하고 돌아와도 한국 사회에 낯선 시선을 던지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는 뜻이다.

미국 대학에서 전공 지식은 익힐 수 있다. 그러나 그 이외의 것에 대해서는 지적으로 학습하고 사고할 기회를 얻지 못한다. 이러한 상태에서 유학생들이 한국에 돌아와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해 과연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주장하는 것 이상으로 논평하여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뉴스가 전하듯, 3.1절에 심지어 일장기가 걸리는 세상이다.* 개인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국가 따위 없어도 된다는 발상이 퍼져나가고 있다. 국가가 없어져도 타국에서 자신은 잘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라는 발상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지금 해외에서 한국인들이 무시당하지 않는 것은 국제사회가, 특히 서구의 국가들이 한국이 역사의 질곡을 거치며 사회정의에 대한 민주적 정치 감각을 발전시켜온 점 및 그에 기반하여 투명하게 경제 시스템을 운영하는 점 등을 존중하는 한에서다. 그러나 과연 지금 우리가 사회가 그러한 방향으로 가고 있는가? 국제 정치는 냉혹하다. 지금 한국의 정부가 하듯 비민주적-폭력적으로 나라를 운영하며 자신들 눈치나 보는 식으로 나오면 그저 졸개로 여겨 무시할 뿐이다. 그렇게 되면 해외에서 한국인이 받는 평가도 절하될 것이다. 국가 시스템 없이 개인의 힘만으로 대접을 받을 수 있는 세상이 아니다. 후진국 출신이지만 돈 있다고 대접받는다? 겉으로는 그렇게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속으로는 비웃는다. 새로운 세대에게 사회의 기억, 즉, 역사를 전수해야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사회적 기억을 잊게 될 때 그 사회는 몰락한다. 새로운 세대로 하여금 어떻게 "그 어릿광대"를 기억하도록 할 것인지에 대한 질문이 필요한 시점이다.

* 극우가 이끄는 일본은 쿨하지도 힙하지도 않다. 극우 일본은 폭력적이고 전쟁을 꿈꾸는 위험한 집단일 뿐이다. 사실상 평화헌법은 무력화됐다. 일본은 지금 미국의 승인하에 다시 전쟁을 할 수 있는 국가가 됐다. 이게 얼마나 위험한 신호인지 자각하지 못하면 역사의 비극이 또 다시 반복될 것이다. 혹시라도 대만을 중심으로 동북아에 다시 전쟁이 일어나게 되면 한반도도 안전하지 못할 것이다. 20대가 취직 걱정 대신 전쟁터로 끌려가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는 뜻이다. 그것도 일본군의 지휘 하에 있는 식민지 군대와 다를 바 없는 곳으로 말이다. 일본이 지휘하는 군대가 과연 한국군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전략을 쓸 것인가? 한국군을 총알받이로 쓰고도 남을 것이 일본의 극우이지 않은가? 정말 일본 극우가 우리를 동등한 파트너로 볼 것 같은가? 지금 벌어지는 일이 진정 '화해'이고 '미래'이고 멋진 신세계일 것이라 믿는가? 그러나 그게 바로 이완용이 나라를 일본에 넘겼을 때 자신을 정당화한 발상이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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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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