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노을은 한국의 록음악가다. 2001년생으로 알려졌다. 파란노을은 한국 청중 사이에서 크게 알려져있지 않다. 오히려 밴드캠프에 올린 곡이 영미권 청자들의 주목을 받게 되며 알려진 케이스다. 이 과정에서 피치포크의 리뷰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 중심에 있는 앨범이 2021년작 To See the Next Part of the Dream이다.* 모든 소리를 포스트록 정서로 다 찌그러뜨려버린 결과 오늘날 보기 힘든 스타일을 창출해내고 있다. 첫곡 "아름다운 세상"은 야심적이기까지하다. 곡을 진행하는 방식 및 기타로 특정 분위기를 창출하는 감각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러나 기존 포스트록과 완전히 동일하지는 않다. 푸른노을의 경우 포스트록 특유의 심미적 요소가 누메탈이나 펑크록 스타일로 넘어가는 측면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포스트록에서는 보컬이 없거나 있어도 중요하지 않다. 인간적 감수성이 그렇게 강하지 않다는 뜻이다. 그러나 파란노을의 곡은 대부분 보컬을 지니고 있다. 물론 소리만으로는 무슨 말인지 알아듣기 힘들 정도로 숨겨져 있긴 하다. 그럼에도 보컬이 등장하게 되면 인간의 감정이 곡에 개입하게 된다. 이는 파란노을에게 할 말이 좀 있다는 뜻과 같다. 동시에 보컬에서 알게 모르게 울분의 정서가 느껴진다. (이러한 경향은 근래 인디록 밴드들이 공유하는 한 가지 특성이기도 하다. 예컨대, 왑띠라는 밴드의 "시체"라는 곡을 보라.) 앨범의 후반부로 갈수록 그렇다.
보컬을 통해 무엇인가 하소연을 하고자 하는 특성은 파란노을의 앨범이 파란노을 개인의 성장소설과 같이 작동하는 면이 있다는 뜻이다. (파란노을 자신은 이를 '컨셉 앨범'이라는 말로 설명하고자 한다.) 사실 파란노을은 To See the Next Part of the Dream의 앨범 소개글을 통해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다. 소개글은 다음과 같다:
내가 들어본 첫번째 한국 인디록 음악가가 아직도 기억이 난다. 그의 음악은 완전히 아마추어적이었고 난해했다. 두번째 음악가는 내 음악 인생에 큰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제대로 홍보가 되지 않았다. 지금 그들은 인터넷에서 사라져 보통의 삶을 살고 있다. 하지만 그들의 음악을 들으면 내가 가져본 적 없는 기억이 여전히 떠오른다. 어두운 작은 방에서 혼자 음악을 레코딩하고, 지인들에게 데모 앨범을 나누어주고, 클럽에서 밴드를 만드는 등의 기억 말이다. 2000년대 초반의 기억이다. 낭만이 있었던 시절이었다. 홍대 클럽에서 소규모 공연을 가졌던 시절, 계획도 없이 하루하루를 살았던 시절, 결코 잊지 못할 기억이다. 난 그들과 같이 되고 싶다.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싶다, 그들의 남은 인생 동안 인구에 회자되는 사람이고 싶다. 이 작품을 통해 내 흔적을 조금이라도 남기고 싶다. 멍청할 정도로 시대착오적인 꿈일지도 말이다. 이 앨범은 내 꿈에 대한 답변과 같다. 이 앨범은 몸은 성인이 되었으나 마음은 아직 어린 아이인 사람에 관한 것이다. 현실과 이상 사이의 거대한 괴리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 그는 자신이 재능이 있다고 믿을 뿐 아니라 분명 미래에 세계 투어를 하는 록스타가 될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지금 21살인 그는 사실 기타 한번 연주해본 적이 없다. 노래 실력은 개떡 같다. 키나 외모도 평균 이하다. 모든 면에서 전부 평균 이하다. 청소년기를 지니 성인이 되어 이제 현실을 직시하게 된 그는 이제 어찌할 것인가? 이 앨범은 내 청소년기에 영향을 준 작품들의 흔적들을 담고 있다, [릴리슈슈의 모든 것], [NHK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잘자푼푼], [신세기 에반게리온]과 같은 작품들 말이다. 숨기기보다는 솔직하게 말하려고 한다. 지난 3년간 내가 느꼈던 것들이 솔직하게 담긴 앨범이다. 망상, 열등감, 과거, 부적응, 현실도피, 판타지, 환멸,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 가장 보통의 존재, 무기력, 자살 등. 이러한 감정을 둘러싼 주절거림만이 이 앨범에 담겼다. 극복은 없다. 달콤한 위안의 말 같은 것은 해줄 수가 없다. '괜찮을 거야'라는 말은 해줄 수가 없다. 그저 세상에 나 같은 '적극적인 패배자'들이 좀더 많이 있기를 바랄 뿐.**
20세의 이른바 '영 어덜트'(young adult)가 작성한 것이라는 느낌이 물씬 드는 글이다. 위의 진술은 2020년대에 한국의 10-20대가 1990-2000년대 록음악 문화를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를 보여주는 사료로서 주목할 만하다. 요점은 이상하게도 2001년생의 문화적 참조점이 거의 전부 1990년대 중반에서 2000년대에 이르는 시기에 나온 작품들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 파란노을은 이를 "시대착오"로 묘사한다. 사실 록음악 자체가 시대착오적이지 않던가? '한물간 장르'이지 않던가? 그러나 여기서 과연 록음악의 시대착오성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방식에서 시대착오적인 것인지 아니면 조금 다른 맥락을 지니고 있는 것인지 질문을 던져볼 필요가 있다. 사실 만 20살의 신체가 느끼는 것이 그 자체로 시대착오적인 것이 되기는 쉽지 않다. 불과 20년을 살아온 젊은 신체는 생물학적 관점에서 아직 세상을 더 알고 싶어할 가능성이 크다. 에너지로 넘치는 신체가 이미 일어난 일에 고착되는 것은 그렇게 쉽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난 파란노을이 느끼는 시대착오성에 실은 동시대적 이유가 있다고 말해보고 싶다.
무엇보다 다음을 분명히 하고 싶다: 근본에 있어서 록은 시대착오적인 장르가 아니다. 한국에서 1990년대를 거치며 발흥한 얼트록은 K-Pop으로 달려진 동시대 상업적 대중문화의 시대를 열어낸 장본인이다. 아이돌 산업의 원형을 제공한 서태지와 아이들의 서태지가 록커였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즉, 한국에서 록음악은 1988년 형식적 민주화가 이루어진 이후 6공화국 헌법 아래서 한국 사회가 최초로 자율적 혹은 전통을 전복하는 반항적인 방식으로 개척한 대중문화 양식의 하나다. 이 점에 있어 록음악은 전통을 거부하는 동시대 대중문화로서의 정체성을 늘 최소한도로 지닌다. 한국에서 록은 대중문화의 본격적 발흥 이전 자생적 문화의 형태로 존재해온 민중성, 예컨대, 민중가요의 정체성을 공유하고 있지 않다. 민중성은 과거로부터 전수되어오는 전통의 문제다. 그에 비해 대중문화는 자연에 기반하지 않는다. 민중문화와 달리 대중문화는 근본이 없는 문화다. 산업으로서 살아남지 못하는 양식은 도태되어 사라질 뿐이기 때문이다. 즉, 대중문화의 영역에서 전통의 논리를 대신하는 것은 유행의 논리다. 록의 시대착오성은 록이 한국의 전통적인 음악이라서가 아니다. 록이 시대착오적인 것은 단지 대중문화 양식으로서 유행에서 뒤처져 있기 때문이다.
2023년을 기준으로 록은 유행에서 뒤처진 음악양식이 맞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도태되어 사라질 수 없는 양식이기도 하다. 어째서 그러한가?2010년대 이후 한국의 대중문화가 급속도록 체계화-산업화되면서 대중음악이 상류화되었지만 사회의 모든 부분이 상류화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문제가 핵심적이다. 즉, 사회에는 늘 비주류 정신을 지닌 사람들, 즉 사회 내에서 목소리가 온전히 재현되지 않는 부류가 있다. 문제는 이들을 위한 감정적-문화적 배출구가 필요하는 데 있다. 2000년대까지는 이들의 정서를 대변한 것이 록음악이었다. 푸른노을의 진술에서도 볼 수 있듯 1990년대에서 2000년대까지가 '낭만을 지닌 시대'로 기억되는 이유는 비주류 서브컬처 정서를 대변하는 록이 주류의 위치에까지 오르는 것이 가능한 시대였기 때문이다. 단순화해서 말하자면, 록을 통해 소외된 자들이 세상의 한 가운데서 꿈을 이루는 것이 가능했다. '록스타의 꿈'는 '언더독'의 인생역전 스토리와 같았다.
문제는 2020년대에 들어 대중문화의 층위에서 서브컬처 혹은 언더독의 정서를 대변하는 공식 채널이 축소되고 있다는 데 있다. 무엇보다 K-Pop은 정서의 측면에서 비주류를 위한 음악이지 않다. 고도로 훈련받은 음악 산업 엘리트들이 만들어내는 음악이기 때문이다. K-Pop의 영역에서 다듬어지지 않는 날것의 정서는 아마추어적인 것으로 여겨져 기각된다. 뉴진스를 보라. 신체적으로 아이들에 불과하지만 어른들처럼 완벽한 가창력과 안무를 선사한다. 아이들 자신의 솔직한 감정, 예컨대, 패배와 질투의 경험, 그 후에 따르는 복수심과 야심 등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은 유치한 동시에 위험한 청소년기의 여드름내 나는 정서이기에 용납될 수 없다. 산업은 여드름을 내보이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만약 여드름이 있다면 완벽한 화장을 통해 가려질 것이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위에 인용된 파란하늘의 글이 내보이는 청소년기 감수성은 끔찍한 것으로 여겨진다. 완벽한 화장, 완벽한 가창력, 완벽한 안무는 그 자체로 자살 등의 감수성을 불러일으키는 위험한 청소년기 감수성에 대한 검열과 같다. 여기서 기억해야할 것은 대중음악의 영역에서 청소년기의 반항적 감수성을 공식적으로 허락했던 몇 안되는 장르의 하나가 록이었다는 사실이다. 록은 청소년기의 정체성이 어른들의 간섭 없이 스스로 자기만의 미적-사회적 양식을 찾아가는 '빌둥'(성장)의 과정과 같았다. 그러나 바로 그 록은 2020년대에 더 이상 대중음악의 영역에서 환영받는 유행의 양식이 아니게 되었다. 좌충우돌이고 거칠지만 청소년들이 록을 통해 그 자신만의 '교양'을 찾아갈 꿈을 박탈 당하게 된 셈이다.
여기서 과거 록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고자 했던 자들이 2020년대에 록음악 대신 택하게 되는 것의 하나가 일베문화라는 사실을 지적하고 싶다. 일베의 경우에서 보듯 미적 승화의 양식이 결여된 비주류 문화는 정치화된다. 자연이 사라진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정치다. 여기에는 그 어떤 문제도 없다. 문제는 일베류의 정치성이 지성을 결여한 결과 혁명이 아니라 폭력적 극우정치로 환원된다는 데 있다. 극우정치는 약자를 희생양으로 삼아 현실의 문제를 감정적으로 해소하는 강자의 폭력에 의존한다. 근본에 있어 극우정치가 파시즘이라 불리는 이유가 여기 있다. 사회적 문제의 구조적 바탕을 보지 않은 채 손쉬운 특정 희생양-범인을 찾으려할 뿐이기 때문이다. 과거 록음악을 하는 사람들이 그 모든 반사회적 정서에도 불구하고 극우 정치로 환원되지 않았던 이유는 음악이 현실 속에서 겪는 온갖 좌절과 실패의 경험을 그 자신만의 미적 형식을 통해 승화할 수 있도록 해주었기 때문이었다. 반면 일베에게는 자율성을 지닌 미적 형식이 없다. 여기서 일베의 등장이 대중문화 일반이 상류화된 결과라는 점을 볼 필요가 있다. 대중문화가 K-Pop으로 명명되는바 대기업에 의해 돌아가는 체계적 기획의 문제가 되면 자율적 독립성에 기반하는 록음악은 설 자리를 잃게 된다. 여기서 록음악과 함께 사라지는 것이 비주류 정신을 지닌 자들이 거칠지만 독립적으로 꿈을 꿀 공간이다. 그 자신의 감정을 담아낼 미적 형식을 잃게 될 때 비주류 청년들에게 남겨지는 선택지는 일그러진 인터넷 유사-정치 행위다. 2010년대 이후 10-20대는 '성장'이라는 미적 형식 대신 '정치'의 언어를 얻게 되었다. 그러나 그 '정치'란 것이 모든 것을 근원으로 되돌리는 본연의 정치가 아니라 유사 정치에 불과한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이렇게 되면 아이도 어른도 아닌 림보의 상태에 빠지게 된다. 키덜트 문화가 그 한 증상일 수 있다.
파란노을이 말하는 "시대착오," 아이돌의 시대인 2020년대에 록스타가 되고자 하는 꿈을 지니게 된 자의 "시대착오"는 2020년대 한국의 대중문화가 비주류 정신을 대변할 공간이 지니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현상이다. 모든 것이 기획의 산물이 되면 문화는 엘리트화된다. 최고의 실력을 가진 아이들이 어른들이 만들어낸 시스템 하에서 오디션이라는 경쟁을 뚫고 선택된다. 그후 고도의 훈련을 받은 후 데뷔를 하게 된다. 거대 기획사의 도움을 받는다는 것은 그들과 유착된 언론의 도움을 받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아이돌 산업계에서 BTS가 다소 독특한 경우였던 이유는 그들이 이른바 3대 기회사 외부에서 언더독의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다. 상대적으로 덜 산업화된 경우가 BTS였다는 뜻이다. 그 결과 청중들이 그들의 처지에 공감하게 되고 그렇게 해서 세계적인 위치에까지 오르게 된다. 그러나 이들조차도 실은 선택된 자들이었다. 인디 록음악을 하는 청년들에 비하면 말이다. 진짜 언더독은 인디록 음악가들이다. 이들은 아주 작은 시장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파란노을이 묘사하고 있는 사라져가는 인디 록밴드들의 모습이 이러한 배경 속에서 나오게 된다.
파란노을의 아래 앨범이 내보이는 디스토션 걸린 기타 사운드 뒤에 숨고자 하는 삶의 태도는 인디록이 시대와 불과하고 있다는 뜻과 같다. 인디록에게는 주어진 시공간, 즉 동시대적 현실 자체가 없다. 인디록은 현재적 의미의 물리성을 지니고 있지 않다. 과거의 "기억"에 기반할 수 있을 뿐이다. "기억"은 비물리적 현상이다. 여기서 말하는 기억은, 파란노을이 말하듯, "한번도 존재한 적 없는 것"의 기억을 뜻한다. 즉, 여기서 "기억"은 한 개인의 "추억"이 아니다. 오히려 한 시대 자체의 비경험적 무의식을 뜻한다. 실현하고 싶었으나 좌절된 집단의 기억은 비경험적 무의식의 형태로 전수된다. 파란노을에 앞서 사라져간 인디밴드들의 기억을 생각해보라. 한국에서 록음악은 사라져간 인디밴드들의 집단적 기억을 후속 세대가 기억하여 다시 한번 물리화하고자 꿈꿀 때 이어지게 된다. 인디록 밴드들에게 현실은 이루어지지 못한 것들의 기억으로 존재한다. 스콜라철학(Scholasticism)에서 비물리적 존재(immaterial beings)는 천사이거나 악마 둘 중 하나를 의미했다. 말할 것도 없이 인디록 밴드의 음악은 빛과 어둠이라는 두 극단을 오간다. 객관적으로 현실 속에서 인디록 밴드는 거칠기 짝이 없는, 일그러진 비주류에 불과하다. 그러나 주관적으로 이들은 빛으로 가득찬 아름다움을 꿈꾼다. 근대 이후 헤겔에게 와서 비물리성이 '정신'(Spirit)이 만들어내는 변증법적 움직임의 문제가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비주류 록음악은 잊혀진 기억의 형태로 되돌아오는 주류 대중음악의 이면이다. 록은 주류 대중음악에 의해 잊혀진 기억, 그러나 결코 완전히 잊혀질 수 없는 기억을 의미한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이야기해보자. 아래 앨범은 2021년 2월에 밴드캠프를 통해 발표됐다. 완전한 무명의 밴드로서 그저 누군가가 자신의 목소리를 들어주기만을 바라며 올린 앨범이다. 그랬던 것이 밴드캠프 추천 시스템에 의해 사람들의 이목을 끌게 되어 지금에 이르게 되었다.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피치포크였다. 영미권 인디록 청자들 사이에서 피치포크의 영향력은 크다. 기본적으로 영미권 록음악 시장이 훨씬 더 클 뿐만 아니라 말이다. 여기서 영미권 사람들이 푸른노을에 반응하게 된 바탕에 이들의 출신, 즉, 한국의 서울 출신이라는 사실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란 점은 분명하다. (밴드캠프는 음악가의 출신지역을 명시한다.) 2021년 초는 코로나가 아직 한창이던 시기다. 코로나 대처에 있어 보인 합리성 및 민주성으로 인해 (지금과 달리) 한국이 국제 사회에서 큰 존경을 받고 있었던 시절이다. 2020년 초에는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아카데미 시상식을 휩쓸기도 했었더랬다. 이러한 국가적 배경이 없었더라면 피치포크가 완전한 무명의 밴드 음악에 구태여 리뷰까지 하는 일은 벌어지기 힘들었을 것이라 말해볼 수 있다. 피치포크 입장에서 보기에 파란노을은 번들번들한 주류 K-Pop만 있는 줄 알았던 나라에 그에 걸맞는 비주류 록음악 또한 있더라는 매력적인 사실의 발견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말하자면, 한국의 문화가 영미권의 문화가 가지고 있는 특성, 즉 높은 완성도로 산업화된 주류 음악과 실험성을 가진 비주류 음악이라는 두 축을 모두 지녔다는 것이 증명되는 순간과 같았을 것이다. 21세기에 문화는 한 국가의 자본주의적-민주주의적 역량 및 모순이 표현되는 창구와 같다. 오늘날 문화는 단순히 개인의 능력 혹은 개인이 지닌 문제적 태도 등에 기반해 작동하지 않는다. 문화는 국가적 경제 및 사회 시스템의 작용 및 시스템이 지닌 모순이 일으키는 반작용의 문제다.
* 파란노을의 영어식 표기는 Paranoul이다. 영미권 사람들 입장에 '패러놀'이라 들릴 것이다. 여기서 연상되는 것의 하나는 '패러노멀'(paranormal)이다. 초자연적 현상을 일컫는 말이다. 파란노을이라는 이름이 그 자체로 영미권 사람들 사이에 현실초월적 매력을 일으킬 것이란 뜻이다. 사실 파란노을이란 한국어도 그다지 일상적이지는 않다. 일반적으로 노을의 이미지는 붉은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붉은 하늘이어야 마땅한 것이 시퍼런 색으로 현상할 때 우리는 죽음의 느낌을 받게 된다. 장밋빛 볼이 파란 시체의 볼로 전환되는 느낌을 생각해보라.
** 원문은 영어로 되어 있다. 한국어 번역은 내가 한 것이다. 의미론적으로 불분명한 표현들의 경우 맥락에 기반해 다소 과하게 의역했기 때문에 원래의 의도에 부합하지 않는 번역이 있을 수 있다. 원문은 다음의 링크에서 확인할 수 있다: https://parannoul.bandcamp.com/album/to-see-the-next-part-of-the-dream.
*** 주류 대중음악이 그 자신의 기억을 전수하는 방식을 보고 싶다면 뉴진스의 "디토"라는 곡을 보라. 뉴진스 또한 그들이 경험한 적 없는 1990년대의 기억을 후대에 전수하고자 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기억은 음악산업의 중심에 있는 엘리트들의 기획을 통해 만들어지고 전수된다. 어떤 면에서 문화는 누구의 기억이 주도권을 잡느냐의 문제다. 한국 록음악의 미래는 1990년대 인디록 음악가들의 기억을 후대에 어떻게 전수할 것이냐는 질문을 던지는 데 달렸다. 푸른노을이 흥미로운 이유는, 주류 대중문화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록의 입장에서 흐려져가는 기억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록의 기억은 푸른노을을 통해 어떤 새로운 신체를 얻을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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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 See the Next Part of the Dream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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