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의 진가를 알고 싶다면 현실의 너절함에 노출된 후 음악을 들어야한다. 미디어의 자극적인 언어를 통해 들려오는 세상사,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이 결여된 저널리즘적 글쓰기, 제목 장사 기사들, 오로지 기업의 입장에서 쓰여진 광고와 다를 바 없는 경제지 기사들, 다음이나 네이버 같은 포털에 의해 편집된 여행사 및 항공사 실적을 올리기 위해 쓰여진 여행 관련 기사들, '웨이팅'이 폭발한다는, 혹은 '개미지옥' 식당에 관한 선정적 포스트들, 항상 이미 당신만큼은 놓치고 있다는 엄청난 맛의 음식을 자랑하는 식당, 혹은 다른 곳에는 없고 오직 여기에만 있다는 음식에 관한 포스트들, 이런 것들을 대하고 있으면 세상은 흥분 상태에 있지 않고서는 존재할 수 없는 것 같이 보인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먼지 하나조차, 일차원적 감각을 자극하기 위해 들떠있는 모습이다. 그럴 때면 저열함이 내 삶 속으로 축축하게 스며드는 것을 느낀다. 그러나 그러다 문득 좋은 음악을 만나게 되면 모든 흥분 상태가 정지하는 것을 느끼게 된다. 아래 베토벤의 소나타가 한 예다. 듣고 있으면, 그의 음악이 세상에 없는 것, 즉, 저열하지 않은 것을 그려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술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현상'(Schein)하는 장소와 같다. 듣는 순간 다음이나 네이버 같은 포털이 어떻게든 제공하고자 애쓰는 '개미지옥' 따위는 사라지고 없다. 고상함은 저열함의 정화다. 저열한 것들이 고상함을 가능하게 한다. 그러나 그 역도 마찬가지다. 고상함은 저열함 없이 태어날 수 없다.
좋은 문학 작품이 무엇일지에 대해 잠깐 이야기해보자. 좋은 작품은 단순히 고상한 작품을 뜻하지 않는다. 훌륭한 작품에는 저열함과 고상함이 동시에 들어있다. 오직 그런 작품만이 훌륭한 작품으로 여겨진다. 클리셰와 같은 예로, 셰익스피어의 극작품을 생각해보라. 그의 작품은 결코 고상하지 않다. 그러나 저열하지만도 않다. 그의 작품은 저열함이 고상함을 낳는 순간, 역으로 고상함이 그 자신의 저열한 진실을 드러내는 순간을 담아내고 있다. 예컨대, 그가 만들어낸 인물 중 가장 유명한 인물의 하나는 의외로 폴스태프(Falstaff)다. 그는 광대와 같은 자다. 셰익스피어가 높게 평가 받는 이유는 그가 주어진 역할에 고정되어 한낱 꼭두각시일 뿐인 유형화된 인물을 그려내는 것에서 벗어나 그 자신의 욕망에 따라 변칙적으로 움직이는 인물을, 작품의 플롯을 망가트릴 위험을 무릅쓰고서 창출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흔히 그의 작품은 인간 욕망의 우여곡절이 만들어내는 인생의 희노애락을 잘 담아내고 있다고 일컬어진다.
셰익스피어의 탁월한 인물 묘사 능력 덕분에 20세기 초에 오면 A. C. 브래들리(Bradley) 같은 비평가에 의해 인물 비평이 셰익스피어 비평의 한 표준으로 올라서게 된다. 물론 L. C. 나이츠(Knights) 같은 비평가 입장에서 보기에 그러한 일은 엄연히 형식의 관점에서 분석해야할 문학 작품을 앞에 두고 '맥베스 부인 아이가 몇명이었지?'라고 묻는 넌센스에 불과한 일로 여겨졌지만 말이다. 그의 입장에서 보기에 셰익스피어 작품이 지닌 고상한 언어적 형식을 두고 저열한 인간에 관한 이야기나 하는 것은 비평의 본령에서 벗어난 일이었다. 전자와 후자의 차이는 아마추어 비평과 전문가 비평의 차이와 같다.
흔히 사람들은 비평 훈련을 받지 않고도 작품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고 믿는다. 작품에 자신을 닮은 인간들이 나온다고 여긴 결과다. 여기서 벌어지는 것은 픽션과 현실의 혼동이다. 이 때문에 영화나 문학 비평이 전문적 훈련이 필요 없이도 가능한 일과 같이 여겨지게 됐다. 이상하게도 과학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조심스러워하면서도 유독 예술에 대해서는 다들 한 마디하고 싶어하지 않던가? 문학교육이 교양교육과 같이 여겨질 때 그 바탕에 있는 것이 바로 이 픽션과 현실 사이의 구분 불가능성이다. 나에 대해 이야기하듯 작품 속 인물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기 때문에 문학교육은 전공을 불문하고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교양교육의 핵심적 요소로 여겨진다. 이에 비해 과학교육은 전문가들의 영역으로 여겨진다. 과학자들은 그들만이 아는 기술적 용어를 사용한다. 과학의 언어, 즉, 수학을 익히지 않으면 접근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문학교육에는 그러한 장벽이 없다.
그러나 문학 접근에 전문적 장벽이 없다는 말은 사실 소설이 등장한 이후의 이야기다. 셰익스피어의 극작품을 비롯한 르네상스기 극작품은 사실 문학 전통에서 볼 때 좀 예외적인 경우다. 왜냐하면 전통적으로 문학 교육은, 극작품이나 소설이 아니라, 시문학 교육을 뜻했기 때문이다. 셰익스피어의 희곡만해도 사실 그의 언어는 그 자체로 시적이다. 운율, 라임, 행수의 제한, 장르, 장르에 따른 주제의 한정 등의 규정에 맞추어져 씌어 있다는 뜻이다. 이는 시의 영역에 장벽이 있다는 것을 뜻한다. 시는 규정을 알지 못하면 이해할 수 없는 장르다. 그래서 영국에서 전통적으로 시는 엘리트 교육을 받은 귀족들의 문화 양식으로 여겨졌다. 이를 요즘식으로 여겨서 전문가의 영역이었다고 말하기에는 다소의 어폐가 있다. 그러나 시는 아무나 쓰는 것도 아무나 읽는 것도 아니었다. 이에 비해 셰익스피어의 소네트에 섹스 이야기 나오는 것은 사실 그가 시의 규정을 깨면서까지 저열하고 추잡한 것에 대해서 할 말이 많은 사람이었다는 것을 뜻한다. 실은 이것이 그를 위대한 작가로 만든 동력이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은 단순히 고상하기 때문에 높은 평가를 받는 게 아니다. 그는 귀족적 언어 규정에 저열한 인간의 욕망을 담아내는 능력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특별한 평가를 받는 것이다.
브래들리와 나이츠는 각각 셰익스피어의 두 측면을 대변한다. 브래들리는 셰익스피어의 인간적 욕망에, 나이츠는 셰익스피어의 고상한 언어적 형식에 주목한다. 달리 말하면, 브래들리는 셰익스피어의 물리적 측면에, 나이츠는 셰익스피어의 수학적 측면에 관심을 갖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과학에서 수학이 장벽 역할을 하듯 시에서는 언어적 형식이 장벽 역할을 한다. 일반적으로 시의 언어가 이해하기 어려운 이유가 여기 있다. 그것은 마치 외부자가 수학의 언어를 이해하기 어렵다고 여기는 것과 같은 현상이다. 이를 응용해서 말해보자면, 일반인들이 문학 작품을 읽고 작품 속 인물에 대해 마치 자기 이야기처럼 말하는 것은 중력에 의해 떨어지는 자신의 몸에서 F=ma의 증거를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떨어질 때 무서워서 죽는 줄 알았어'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후자의 언어는 과학의 관점에서 말하면 맥락에 맞지 않는 아마추어적 어리석음의 산물이다.
사실 전문적 문학 비평가들은 작품을 읽고 자신과 인물을 구분하지 못하는 일반 독자의 언어 앞에서 '어이가 없다'고 여긴다. 물론 겉으로 말은 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감정'에 대해 날것 그대로 이야기하는 것이 문학인 줄 안다. 그러나 문학은 형식의 문제다. 전통적으로 문학은 아이가 사탕을 먹고 '아이 맛있어'라고 말하는 것을 시적이라 여기지 않는다. 문학은 '맛있다'는 감정을 표현하는 언어에 어떠한 운율과 라임이 부여되었는지, 또한 해당 언어가 얼마나 효과적으로 비유적 언어를 작동시키는지를 확인하고자 한다. 그것이 '문학성'의 핵심이다. 이것이 나이츠와 같은 비평가가 브래들리의 비평을 비판할 때 말하고자 하는 요지다.
여기까지만 말하면 전문적 문학연구자인 내가 깨나 '꼰대'와 같이 여겨질 것이다. 물론 난 형식주의 비평의 요소가 없는 문학 비평을 좋은 비평이라 여기지 않는다. 그러나 여기엔 반전이 있다. 오늘날에는 그 어떤 전통도 버티지 못하지 않던가? 막말로 '포스트모더니즘'이란 것이 등장한 이후에는 심지어 공장에서 대량 생산된 깡통 음식을 가져다가 예술이라고 말하게 되었지 않았던가? 포스트모더니즘의 관점에서 말하면, 아이가 사탕 먹다가 '아 맛있어'라고 내뱉은 언어도 시적 언어인 것이다. 물론 이 정도 수준의 것을 가지고 '반전'이라 말하는 것은 너무 저열한 이야기다. 사실 예술론의 영역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는 지나간지 오래다. 근래 포스트모더니즘에 관심을 갖는 비평가는 사실상 없다. 오히려 유물론이 성행하고 있다. 신유물론을 생각해보라. 포스트모던 껍데기는커녕 신체의 유물론적 감응이 곧 물자체와 하나되는 현상으로 여겨진다. 반전은 바로 이 맥락에서 나온다. 오늘날 가장 고상한 미국의 비평가들, 예컨대 저명한 시카고 대학 영문과의 교수들은 픽션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아마추어 비평에서 희망을 발견한다. 문학의 문자적 한계에 갇히지 않은 채 현실과 픽션을 넘나들며 감응하는 신체들의 배열을 비평이 다루어야할 대상으로 보는 것이다.
동시대 미국인 문학 비평가들의 이름을 언급하면서까지 문학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런 것은 논문에서 다루는 것으로 족하다. 브래들리나 나이츠는 다 죽은 사람들이다. 요즘 비평가들은 거들떠도 보지 않는 사람들이다. 아무튼, 앞서의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픽션과 현실을 구분하지 않는 신체의 감응에서 미래를 보는 일은 브래들리식 인물 비평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형식의 외부에 있는 것은 사람이 아니다. 베넷과 같은 사람의 용어로 말해보자면 '약동하는 물질'이 있을 뿐이다. '약동하는 물질'에는 형상이 있을까 없을까?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할 것이다. 없으면서 있는 형식, 있으면서 없는 형식에 대해 생각해보는 건 재밌는 일이다. 형식이 없다면 문학은 교양교육이 될 것이다. 그러나 형식이 있다면 문학은 전문가의 영역이 될 것이다. 일반적으로 시를 읽는 것보다는 더러운 폴스태프 같은 인물이 나오는 셰익스피어의 극작품을 읽는 게 더 재미있는 일인 이유, 솔직히 셰익스피어의 극작품을 읽는 것보다는 소설을 읽는 게 더 재밌는 일인 이유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도 재밌는 일일 것이다. 사실 난 지독하게 전문적인 문학 비평을 좋아한다. 최고 수준의 문학 비평가들이 써낸 글을 읽는 건 짜릿한 일이다. (고전적인 예로 폴 드만의 비평을 생각해볼 수 있다. 난 라이오널 트릴링과 같은 사람의 비평 또한 좋아한다. 물론 드만이나 트릴링이나 모두 죽고 없는 옛날 사람이다.) 그러나 동시에 난 픽션이 현실보다 더 현실적이라 여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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