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환의 "천일동안"은 '멜로드라마적'인 감수성을 지닌 곡이다. 가혹하게 말하면 '질질짜는' 느낌의 가사를 지니고 있다. 창법도 깨나 감상적이다. 소위 '착한 사랑'으로 대변되는 1990년대 초반 '발라드' 감수성의 정점을 보여준다. (또 다른 정점은 신승훈의 "그후로 오랬동안"이다.) 1995년 당시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던 기억이 난다. "천일동안" 같은 곡을 이해하려면 적어도 20대는 되어야하지 않던가? 10대가 좋아할 만한 곡도, 이해할 수 있는 곡도 아니었다. 물론 지금 입장에서는 오히려 생각보다 괜찮다고 느낀다. 그러나 이는 지금보니 곡의 가사가 좋다는 뜻이 아니다. 아래 곡의 가사에서 주목할 지점은 단 한군데다. 마지막 구절 "다음 세상에서라도 우리 다시는 만나지 말아요"가 없다면 이 곡의 가사는 그저 멜로드라마로 남겨질 뿐이다. 이 대목 때문에 지금 듣기에 곡이 생각보다 괜찮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가사의 마지막 구절 때문에 "천일동안"의 등장은 1990년대 초반 한국 대중음악계를 지배했던 발라드 정서가 정점에 오르는 동시에 그 끝에 이르게 된 순간으로 기억된다. 1995년 "천일동안"과 함께 발라드 양식은 '착한사랑'으로 대변되는 '순수의 세계'를 스스로 박차고 떠나고자 결심한 것과 같지 않은가? "천일동안"은 "그날 이후로 난 자유롭다"고 말한다. '경험의 세계'는 고통스럽다. 그러나 한번 각성한 사람에게 '순수의 세계'는 자유가 박탈된 구속의 상태를 의미할 뿐이다. "천일동안"이 곡을 풀어가는 방식 또한 동일한 궤적을 따른다. 곡의 시작은 1990년대 초반의 착한 발라드풍이다. 조용히 건반만을 가지고 가냘프게 노래한다. 약간의 현악기가 조심스럽게 가미될 뿐이다. 가사는 과거의 추억에 묶인 모습이다. 노래하는 자아는 아직 기존의 세계로부터 분리되지 못한 상태다. 그러나 중간에 기타 솔로가 분위기를 전환한 후에는 드럼의 비트가 강해지면서 곡의 정서가 '록 발라드'와 다를바 없는 형태로 급격히 발전한다. 현악기 및 색스폰, 그리고 코러스가 더해지며 대규모 오케스트라 곡과 같이 발전한다. 곡이 끝나갈 때쯤 창법은 거의 절규하기 직전이다. 그리고서 마지막으로 말한다: "다음 세상에서라도 우리 다시는 만나지 말아요."
푸코식으로 말하면, 1990년대 대중음악의 흐름 속에서 "천일동안"은 인간과 자연이 하나되었던 시대의 정신, 즉, 르네상스 에피스테메의 끝을 의미한다. "천일동안"은 만물로부터 분리되어나온 실존의 계몽 정신이 세계를 이끄는, 고전적 에피스테메의 시작을 의미한다. 여기서 1990년대 초반 한국의 대중음악계에 두 가지 정서가 공존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하나는 1990년대 초반 발라드로 대변되는 착한 대중음악의 정서다. 다른 하나는 1990년대 중반부터 본격화되는 반항적 록음악의 정서다. 둘은 각각 주류 문화와 비주류 하위 문화를 대변한다. 1990년대에 한국의 대중음악은 유치하다고 생각해 영미권의 록음악을 겉멋에 취해 반항적으로 찾아듣는 문화가 있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들이 거부하고자 했던 한국의 대중음악 양식이 발라드였다. 발라드의 '착한사랑' 정서 말이다. 그들에게 '착함'은 1990년대 폭력적 권위주의 교실이 강제하는 거짓 허울일 뿐이었다. 세계 경험은 이미 청소년기 교실에서부터 폭력적이었다. 그러한 그들에게 '착한 발라드'는 가당치도 않은 양식이었다. 1990년대 록이 '저항의 상징'이었던 것은 이러한 맥락 속에서였다. 브레히트의 극작품이 아리스토텔레스적 극작품을 무자비하게 탈신비화하듯 록음악은 발라드의 순진함을 뒤집어엎고자 그 시절 그곳에 있었다. 달리 말하면, 1990년대 한국 대중음악의 발전은 발라드에서 록으로의 이행에 기반하고 있었다. (물론 1990년대에는 이행의 축이 하나 더 있었다: 발라드에서 랩음악으로의 이행 말이다. 1990년대에 록과 힙합 둘 모두 발라드라는 상위문화에 저항하는 하위문화로서 발생했다는 뜻이다.)
"천일동안"이 나온 1990년대 중반이면 록음악 배경을 지닌 음악가들이 록음악을 주류 대중음악계 내부로 상당 부분 침투시킨 시기다. 서태지가 대표적이다. 사실 처음부터 그는 댄스와 발라드를 얼굴마담으로 삼아 대중 음악 시장으로 침투한 록음악의 스파이와 같았다. (물론 서태지를 발라드 가수로 기억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그의 1-2집에 실린 많은 곡은 사실 '시티팝'의 정서 기반의 가벼운 발라드곡이라 할 수 있다.) 대중음악계에서 입지가 공고해지자 전면에 메탈 음악을 내세웠던 그의 세번째 앨범을 생각해보라. 반전이 극심해서 듣는 사람 입장에서 어리둥절하고 어이가 없을 정도였다. 메탈 밴드 크래시의 안흥찬을 기용해 본격 '그로울링'마저 코로스로 넣어버린 "교실이데아"라는 곡이 대표적이다. 더불어 해당 곡의 가사는 교실 내 문제를 지적하고 있었다. 당시 교실은 무엇보다 교사에 의한 폭력의 공간이었다. 이는 당시 한국 사회 내 주된 폭력이 국가에 의한 폭력이었던 것과 같은 맥락을 공유한다. 1994년은 군사독재가 끝난지 불과 6년 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군사 정부의 후계자가 1992년까지 대통령 자리에 있기도 했었다. "교실이데아"가 교실 내 특정 개인 사이에서 벌어지는 문제, 즉 개별 학생간 폭력--이른바 '학폭'--이 아니라 '교육제도' 자체를 문제삼은 배경에 있는 것이 바로 이 권위주의 국가에 의한 폭력이다. (이와 같은 맥락 속에 있는, 보다 노골적인 곡이 패닉의 "벌레"다.) 이러한 제도적 폭력의 분위기 속에서 당시 록은 '또 다른 인격'의 형식으로 작동했다. 서태지의 "지킬박사와 하이드"라는 곡은 괜한 것이 아니었다. 사실 알고 보면 서태지 자신의 음악 커리어가 처음부터 지킬과 하이드의 이중성으로 만들어져있었지 않은가? 발라드와 댄스를 하는 서태지는 지킬과 같다. 그러나 그의 안에는 언제나 하이드라는 괴물이 있었다. 하이드가 주류 대중음악계의 표면에 직접 나서기 시작한 것이 서태지의 3집이 나온 1994년이다. 서태지의 3집이 대중음악계에 미친 영향은 적지 않았다. 이승환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발라드에서 록 발라드 정서로 발전하는 "천일동안"은 그러한 시대적 맥락 속에서 나오게 된다.
이승환의 "천일동안"은 주류 대중음악 양식인 발라드가 스스로를 내파시키고 록음악 정서로 이동하는 장면을 담아내고 있다는 점에서 음악사적 의미가 있다. 1991년 "세상에 뿌려진 사랑만큼"이라는 곡을 부르던 이승환과 "천일동안"을 부르는 이승환 사이에는 연속성과 단절이 모두 있다. 분명 "천일동안"은 "세상에 뿌려진 사랑만큼"이라는 배경 없이는 이해할 수 없는 발라드 곡이다. 그러나 이미 말했듯 "천일동안"은 한국의 대중음악이 발라드 양식 내부에서 발라드가 전제로 삼는 순수의 세계와 작별하는 순간을 담아내고 있기도 하다. 사실 "천일동안"이 나온 1995년 이후 대중음악계는 본격적으로 록 정서를 수용하게 된다. 그러나 그 수용의 과정은 그렇게 부드럽지 않았다. 록은 기존에 유행하던 한 장르에서 새롭게 유행하는 장르로 넘어가는 것 이상 혹은 이하의 문제였다. 당시 많은 록음악이 발라드 청자 입자에서 볼 때 멜로물인줄 알고 본 영화가 호러물이었던 것으로 판명나는 식으로 경험되었다는 것이 핵심적이다. 1997년 생방송 공연 중 삐삐롱스타킹의 권병준이 카메라를 향해 침을 뱉은 사건이 좋은 예다. 그저 티비에 나오는 유쾌하고 신나는 노래인 줄 알았던 것--예컨대, "바보버스"--이 알지도 못한 사이 제도권 권력을 향해 침을 뱉고 손가락 욕설을 하고 있었다. 이승환의 1997년작 [사이클] 또한 비슷한 경험을 선사했다. '발라더 이승환'을 기대하며 새 앨범을 사서 들은 기존 청자 입장에, 예컨대, "붉은낙타"는 놀라움으로 다가왔다. ("천일동안"의 반전을 지닌 가사가 가져다준 놀라움에 비하면 이미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말이다.) 요점은 당시 록음악이 기성 문화에 침투해들어간 후 본색을 드러내는 전략을 그들 특유의 문화로 차용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발라드의 탈을 쓴 록, 그러다 갑작스럽게 드러나는 록의 '마각,' 이것이 하위문화가 상위문화를 전복하는 방식이었다. 어떤 면에서 록에게 발라드는 꼭 필요한 가면이었다.*
1990년대 한국 록음악을 조금 더 기억해보자. "안녕하세요"라는 곡으로 널리 알려진 삐삐밴드의 1995년작 [문화혁명]이 나왔을 때 '음악 좀 듣는다'는 사람들 사이에서의 느낌은 '드디어 한국의 대중음악도 세련되어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물론 '세련됨'은 '발라드의 죽음'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탈발라드'가 곧 '록'이었다. 새로운 대중음악을 꿈꾸는 젊은이 치고 발라드를 죽이고 싶어하지 않은 경우는 없었다. "딸기가 좋아"라고 미친듯이 반복하며 외쳐대는 "딸기"라는 곡을 생각해보라. 그저 '제 정신이 아니다'라는 게 요점이다. 그러나 '제 정신이 아니'었기에 너무도 멋지게 들렸다. 록에서는 발라드의 단일한 '감상적 자아'가 해체되고 없다. 1990년대 록에는 '질질 짜'는 '자아' 자체가 없다. 쉽게 말해서 "다음 세상에서라도 우리 다시는 만나지 말아요"가 있고 나서 가능해지는 게 1990년대 얼트 록이다. 록보다는 메탈에 기반하고 있었지만 이 시절의 정서를 규정했던 넥스트의 야심작 [넥스트의 귀환] 1부와 2부가 각각 1994년과 1995년에 나왔다는 점도 고려해야한다. 1996년 [The Sixth Sense]에서는 공일오비조차 록음악을 전면에 내놓으며 하이드적 면모를 드러내게 된다. 1991년에 "이젠 안녕"을, 1993년엔 "신인류의 사랑"을 노래하던 공일오비였다. 그러나 1996년에 오면 졸지에 '나인인치네일즈'와의 유사성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실험적 록음악의 형태를 취했던 1996년작 패닉의 [밑] 또한 빼놓을 수 없다. 1집의 서정성을 기대했던 청자 입장에 [밑]은 이른바 '문화적 충격'이었다.1996년 전후 언더그라운드에서는 언니네이발관과 델리스파이스, 노이즈가든 등이 자의식 가득 잰 체하며 록의 시대를 준비하고 있었다. 또 다른 구석에서 크라잉넛과 노브레인은 체면 따위 잊은 채 미친듯이 소리를 꽥꽥지르고 있었다. 이들을 찾아온 관중들은 동일하게 미쳐 서로 '슬램'을 해대며 교실에서 억눌렸던 한을 분출해내고 있었다. 이 정서는 2002년 광화문 광장을 가득 채운 '붉은악마'와 함께 사회적 현상으로 발전하게 된다. 지금 한국이 누리는 '문화적 창의성'은 이러한 '하이드'적 배경 속에서 싹튼 것이다. 결코 '발라드'와 '로맨스'의 산물이 아니다. 지금과 같은 사회 분위기 속에서라면 언제든 '블랙리스트'에 올라도 이상하지 않을 삶의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 작금의 문화적 창의성이다.
1990년대 한국의 주류음악계가 주목할 만했던 것은 주류 정서와 비주류 정서가 공존하는 공간으로 작동했기 때문이다. 1990년대 주류 대중음악계는 하이드로 남겨지도록 허락받지 못한 지킬들이 살아남기 위해 스파이와 같이 침투하는 공간이었다. 록음악의 관점에서 볼때 르네상스식 전인적 인간, 자연과 인간이 하나된 조화로운 세계는 불가능한 아름다움일 뿐이었다. 1990년대 중고등학교 교실에서 가르쳐지는 것 속에 진실이나 진리는 없었다. 록은 그 비전인성의 문화적 산물이었다. 록음악에 있어 인격은 완성되어 있지 않다. 인격은 둘 혹은 그 이상으로 쪼개어져있다. 무엇인가 부족한 반쪽 짜리 혹은 반의 반쪽 짜리에 불과한 인간들이 나와서 소리를 만들어낼 때 나오게 되는 음악 양식이 록이다. 그 때문에 누군가에게 록은 '소음'으로 들리기도 했다. 1990년대 교실에서 교사의 강의 이외의 소리는 모조리 소음일 뿐이지 않았던가? 록은 권위가 지워버린 소리에 다시금 형상을 부여하는 일과 같았다. 록은 침묵 속에서 소리를 듣는 일과 다르지 않다.
록은 순수의 끝, 르네상스 에피스테메의 끝을 의미한다. 그런 의미에서 1990년대 한국 록의 표어는 의외로 이승환이 발라드적으로 내놓았다고 할 수 있다: "다음 세상에서라도 우리 다시는 만나지 말아요." 한국의 대중음악은 "천일동안"과 함께 순수를 잃어버렸다. 실제로 "천일동안" 이후 이승환의 1997년작 [사이클]의 핵심 주제 중 하나는 "아이에서 어른으로"다. 그러나 '낙원의 상실'은, 밀턴이 묘사하듯, '펠릭스 컬파'(felix culpa), 즉, '다행스러운 타락'으로 이해되어야한다. 타락은 실존의 다른 이름이다. 너무도 두려워 구속의 상태로 되돌아가고 싶어지도록 만드는 실존의 심연을 마주하고자 하는 용기를 지닌 자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자유'다. '자유'는 계몽의 빛에 의해 빛이라고는 없는 실존의 나락으로 떨어져본 적 없는 자들이 함부로 입에 올릴 한낱 '자유주의 시장 이데올로기' 따위의 것이 아니다. 자유는 일체의 이데올로기가 붕괴하는 주관성의 심연, 모든 믿음이 붕괴하며 그 어떤 확실성도 얻을 수 없다 여겨지는 심연으로부터만 나온다. 심연을 마주할 용기를 지닌 자가 하는 말이 "다음 세상에서라도 우리 다시는 만나지 말아요"다. 이 가사 하나만으로도 이승환은 한국사회의 존중을 받을 자격이 있는 1990년대가 내놓은 '원로가수'라 할 수 있다.
* 거꾸로 말하면, 최근 록음악이 큰 주목을 받지 못하는 배경에 더 이상 '발라드의 탈'을 쓸 필요가 없게 된 오늘날의 정황이 있다고 말해볼 수 있다.** 파괴할 순수한 대상을 지니지 못한 록은 공허한 광대짓과 같이 된다. 다시 한번 삐삐밴드의 이윤정을 생각해보라. 그의 보컬은 사회화되지 않은 갓난쟁이가 빼액빼액 우는 소리를 보컬화한 경우와 같다. 1995년이라는 맥락 속에서 그의 보컬은 보컬왕 발라더들의 권위에 대한 도전과 같았고 그래서 찬사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발라더들의 신성이 무너진 시대에 이윤정의 보컬은 유튜브에 올릴 심산으로 길거리에서 화려한 춤사위를 내놓지만 정작 멈춰서서 쳐다보는 행인은 거의 없는 것과 같은 운명에 처해질 가능성이 크다. 물론 오늘날 록에 남겨진 또 다른 선택지가 있긴 하다. 스스로를 심미적 대상으로 발전시키는 록을 생각해볼 수 있다. 이른바 클래식 공연장에서 듣는 '고급 록'을 생각해볼 수 있다. 1990년대 후반 2000년대 초 이 노선을 가는 록을 '포스트록'이라 불렀다. '슈게이저'들을 생각해보라. 그들의 공연과 주술적 메탈 공연을 비교해보라. 슈게이저들은 자기 '신발'(슈)만 쳐다본다(게이즈). 아예 관객을 등지고 의자에 앉아서 공연하는 밴드도 있다. 심미적 감성을 끌어내는 것이 최우선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이들의 공연은 집단 가무가 가미되는 메탈 종교 집회와 정반대 노선을 취한다. 사실 포스트록에 어울리는 공연장은 '올림픽 주경기장'이 아니라 '예술의 전당'이지 않은가? 본질에 있어 '포스트록'은 '관객 없는 록'과 같다. 클래식 공연장이 젊은이들로 들끓는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마음을 '힐링'하고자 오는 중년들의 공간이 클래식 공연장이지 않은가? (클래식계에서 조성진과 임윤찬이 희망인 이유는 그들이 젊은 인구를 차분하다 못해 노년의 느낌마저 내는 클래식 공연장으로 유입시킬 매개가 되어줄 수 있기 때문이지 않은가?) 1990년대말 포스트록이 등장했을 때 이미 그것은 록이 젊음을 잃고 중년이 되어간다는 신호였는지도 모른다.
** 물론 오늘날 정황은 또 다시 변화하고 있기도 하다. 권위주의 권력자가 검찰이라는 억압적 국가 기관을 동원해 국가를 운영하고 있는 지금 록음악은 다시 한번 나래를 펼 절호의 기회(?)를 얻고 있는지 모른다. 지금 모든 것이 1980년대로 돌아가고 있다. 법정 노동시간 한계도 1980년대 단순 공장 노동에 기반했던 후진국 시절로 되돌아가고 있고, 건강보험도 후진국 시절로 돌아가고 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라면 중고등교육도 1980년대 후진국 시절로 되돌아가지 말라는 보장이 없다. 예컨대, 학생들을 일렬로 줄 세우는 단순 시험 위주의 교육환경으로 되돌아가는 상황, 폭력을 기반으로 무너진 교권을 회복하고자 하는 상황을 생각해보는 게 작금의 퇴행적 사회 분위기에 훨씬 더 잘 어울리지 않는가? 록음악은 기존의 후진국적 삶의 조건을 받아들일 수 없는 새로운 세대가 각성을 하게 될 때 발생한다. 1990년대 록음악과 관계를 맺었던 음악가들 사이에 의외로 '고학력'자들이 많았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공일오비, 신해철, 이승환, 이적, 권병준, 루시드폴 등 이들은 대학 교육을 배경으로 음악 활동을 했던 자들이다. 사실 신해철과 이승환을 제하면 전부 서울대 출신이다. 2000년대 인디록씬에는 서울대 출신이 특히 많았다. 장기하, 브로콜리너마저, 9와숫자들, 눈뜨고코베인 등이 그 예다. 대부분 서울대 노래패 라인이 만든 '붕가붕가레코드' 소속이다. 이는 한국의 록음악 전통에 의외로 '엘리트 음악'으로서의 면모가 있었다는 뜻이다. (이는 1990년대 미국 얼트록의 사정과 흥미로운 대조를 이룬다. 미국의 1990년대 얼트록은 대학 교육을 받지 못한 하층민 백인 남성의 음악이었다. 너바나의 커트 코베인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최근 10년 사이 이들 전통은 거의 사멸했다. 반대로 최근 10년 사이 강화된 것이 엘리트 대학 출신들의 일베화다. 20대 사이에서 인디 록음악 전통이 약해지는 현상과 20대가 일베화되는 현상 사이에는 일정한 반비례 관계가 있다. 한국에서는 록음악이 탈신비화와 지적 각성의 양식으로 작동하는 측면이 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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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man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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