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으로 음악은 시간의 형식을 이룬다. 멜로디로 이루어진 주제와 시중종으로 이루어진 주제의 흐름이 시간의 흐름을 인지 가능한 형태로 제시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패턴은 제자리에 머물지 않는다. 변화 및 발전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시간은 직선적이다. 클래식 음악을 기준으로 말해보자면 19세기에 낭만주의의 형태로 완성에 이르게 되는 서양 음악은 진보하는 세계관의 산물이다. 이는 19세기 서양 문학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나는 특징이다. 소설, 특히 빌둥스로만을 생각해보라. 빌둥스로만은 주인공의 내면이 객관 세계와 부딛치며 만들어내는 시간의 구조를 그 자신의 내러티브로서 제시한다. 여기서 주인공의 내면은 변화 및 발전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바로 이 정신 세계의 변화가 E. M. 포스터가 말하는 '입체적 인물'(the round character)이 뜻하는 바다. 인간의 주관성은 객관 세계의 질서 속에서 좌절하지만 변화 및 발전하는 객관 세계의 부정된 추동력으로서 세계 내에 그 흔적이 유지된다. 소설 속에서 인물은 정지된 객관적 현실에 대비되어 작동하는 시간의 흐름을 부여하는 동력으로서 구조 내에 주어진다. 달리 말하면, 자유주의적 개인이라는 개념과 함께 주어지는 진보의 시간적 구조가 소설적 내러티브의 기반이다. 근본에 있어 낭만주의 음악이 지닌 시간의 구조 또한 이와 동일한 세계관의 산물이다. 반면 아래 샘 프리캅의 음악이 제시하는 구조는 시간성을 결여하고 있다. 근본에 있어 시작부에서 제시되는 패턴에 끝까지 변화가 가해지지 않는다. 계속해서 제자리에 머문다. 그러나 역설은 여기서 말하는 '제자리'가 그 어떤 변화-발전하는 시간의 흐름이 제시하는 목적지보다도 더 먼곳에 위치한다는 데 있다. 이는 플라톤적 이데아가 그 어떤 주어진 현실보다도 더 멀리에 위치한 것으로 여겨지는 것과 동일한 방식을 따른다. 다시 말해, 반복의 다른 말인 '제자리'야말로 가장 비현실적으로 먼 곳에 있음을 뜻한다. 유클리드적 의미의 점선면에 대한 수학적 정의를 생각해보라. 점과 점 사이의 가장 짧은 거리는 직선이라 불린다. 너무도 당연한 진리로 여겨지는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어떤 경험적 현실 속에서도 한 점과 다른 점 사이를 완전한 직선으로 이동할 수 없다. 우리의 몸과 우리 주변의 온갖 물질 사이에서 매개 작용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중력 등에 의한 힘이 우리의 직선적 움직임에 왜곡과 변화를 가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우리는 언제나 비루한 질료적 현실 속에 묶여 있을 뿐이다. 이 때문에 현실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있기 위해서는 거꾸로 아무 곳에도 가지 않아야한다. 그저 제자리에 머무는 것이 가장 먼 곳에 있는 일인 것은 이 때문이다. 직선의 진보적 시간이 멈추는 곳에 있는 것은 제자리의 현실이 지닌 그 자체의 낯섬이다. 내게 프리캅의 음악이 매력적으로 들리는 것은 그의 음악이 소리로 직선의 흐름을 만들어내지 않기 때문이다. 시간에 대조된 영원이 뜻하는 바가 바로 이 멈추어진 직선의 흐름을 말한다. 전자 음악의 요지는 영원을 음악 이전에 위치한 소리의 형태로 포착하는 데 있다. 달리 말하면, 두 점 사이의 직선은 오직 멈추어진 시간 속에서만 그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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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lling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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