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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n Hopkins, "Tayos Caves, Ecuador i"

by spiral 2022. 9. 21.

근래 난 음악을 즐겨 듣지 못한다. 다만 '소리'를 들을 수 있을 뿐이다. 사실 갈수록 음악은 내게 너무 과하게 느껴진다. 설탕 범벅을 하여 인간이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자극적 음식을 먹는 것 같이 느낀다. (물론 추억으로, 과거 맛있게 먹었던 음식이 생각날 때가 있듯, 자극적인 1990년대 록 음악을 듣는 것은 여전히 가능하다. 조금 다른 맥락에서,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5번은 어떠한가? 좋은 곡이지만 지금의 내겐 너무 과하다고 느껴진다.) 그럴 때면 음악이 천천히 멈추어지며, 아주 길게 늘어진 테이브를 들을 때처럼, 단 하나의 음표 속에 영원히 머물 수 있게 되기를 희망한다. 더 나아가, 하나의 음조차도 아닌 것, 음표보다 작은 것 속에 머물 수 있기를 희망한다. 존 케이지가 써낸 4분 33초의 침묵이 그러한 것과 같이 말이다. (음악이 소리의 조직을 뜻할 때 소리는 오직 침묵을 배경으로만 태어날 수 있지 않은가? 어떤 면에서 오늘날 동시대 대중음악은 너무 음악적이다. 뭐라도 하나 더 들려주지 못한 안달이 난 모습이다. '이렇게 끼 부리는 음악에도 안넘어 올거야?'라고 유혹한다. [미국은 끼가 있다](America's Got Talent)라 불리는 끼 부리는 쇼(텔런트 쇼)도 있지 않던가? 가득차다 못해 넘친다. 훌륭한 완성도의 곡들로 넘친다. 그래서 음악으로서 흥미롭지 못하다.) 하나의 음표 속에 머물게 될 때 시간은 정지한다. 음악은 시간의 형식이다. 반면 소리는 시간의 흐름 속에 가해진 정지점과 같다. 내게 '지금, 여기'라 불리는 동시대성은 소리와 함께 시간이 멈추는 곳에서만 발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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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sic for Psychedelic Theraphy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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