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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피는 집시였다, [나무]

by spiral 2021. 1. 2.

그림을 감상한다는 것은 단순히 피규어(figure)를, 의미 혹은 서사의 차원에서, 감상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색과 선 자체를 받아들이는 것을 뜻한다. 아무 것도 없는 바탕 위에 그어진 선이 전하는 질감과 색채 그 자체가 주는 감흥은 그 어떤 것보다 더 강렬하다. 프란시스 베이컨의 그림을 떠올려보라. 그 안에서 피규어는 색과 선의 층위로 물러난다. 사람과 같은 형상 속에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색과 선이 있다. 음악에 대해서도 비슷한 말을 해볼 수 있다. 침묵을 배경으로 그어지는 진동은 그 자체로 경이로운 현상이다. '없지 않으며 있다' 혹은 '없음이 있다'는 느낌은 그 순간 찾아온다. 그런 의미에서 음악은 장르적 사고의 문제이지 않다. 음악은 장르 이전에 위치한다. 소리의 형성 자체를 포착하는 음악은 보컬을 통해, 인간이 아니라, 진동을 드러낸다. 소리로서 보컬은 결코 그 어떤 말도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그 어떤 이야기도 전달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보컬이 내놓는 것은, 서사가 아니라, '무엇인가가 있다'는 순수한 신호다. 그러한 음악은 더 이상 듣는 것이지 않다. 오히려 음악을 듣는 이는 들려오는 소리를 통해 최초로 살아있게 된다. 듣는 이는 듣는 것 속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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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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