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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윤, "여기에"

by spiral 2020. 11. 9.

'쾌적하다'는 말을 하기에 적절한 곡이다. 분명 비평적 관점에서 주목할 만한 곡은 아니다. 사실 많은 경우 '기분 좋다'고 느껴지는 곡과 '훌륭한' 곡은 일치하지 않는다. 어째서 그럴까? 쾌적한 곡은 음악을 그저 삶의 한 부분으로서 여길 때에만 중요하다. 음악이 삶의 규형을 잡는 데 필요한 요소들 중의 하나로서 복무한다는 뜻이다. 그러한 곡은, 예컨대, 입에 맞는 음식, 마음에 드는 옷, 좋은 풍경, 유쾌한 사람들과 같은 요소들과 동일선상에 있다. 여기서 음악은 결코 절대적이지 않다. 청자의 삶을 지탱하는 한 가지 배경 요소로서 상대적으로만 중요하다. 말하자면, 음악은 집을 짓는 데 필요한 여러 재로 중 한 가지 재료와 같다. 없으면 허전하지만 그렇다고 없다고 해서 문제되는 그런 요소라고 하긴 어렵다. 그에 비해 비평적으로 주목할 만한 곡은 이 모든 삶의 요소를 절대적으로 대체하는 음악을 말한다. 이 경우 음악은 음식을 대신하고, 풍경을 대신하고, 사람들을 대신하고 기타등등 그 모든 것을 대신할 수 있다. 음악이 기성의 주어진 세계 자체를 대체한다는 뜻이다. 사실 이것이 셸리가 시인을 두고 '세계의 공인되지 않은 입법자'라고 말하는 이유다. 이를 '예술의 자율성'이라 한다. 세계 자체를 대신 하는 대안적 세계, 그것이 예술의 자율성이 뜻하는 바다. 그러나 그러한 예술은 결코 '쾌적'하지만은 않다. 오히려 불편한 경우가 많다. 뛰어난 예술적 세계를 지닌 사람들이 살아서 큰 주목을 받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 있기도 하다. 사실 그러한 이유로 휴식이 필요할 때는 그 자신의 자율성을 크게 강조하지 않는 평범한 소시민 같은 예술, 평범한 보통 사람들의 음악을 듣는 편이 낫다고 느끼게 된다. 생각해보라. 아래 곡이 쾌적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너무도 평범한 현실을 노래하고 있기 때문이다. "언제나처럼 우린 여기에"라고 묘사되는 풍경보다 더 친근하여 사랑스러운, 평범한 이야기, 평범한 곡조가 또 어디 있단 말인가? 이것이 '행복'의 정의이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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