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원슈타인의 곡은 자이언티가 2011년에 출사표를 내듯 발표했던 "클릭미"라는 곡에 비견할 만하다. 원슈타인의 곡도 보란듯 '나야!'라고 주장하는 곡을 내놓고 있기 때문이다. 두 곡을 비교해보면 9년 만에 음악적 트렌트가 얼마나 변했는지 알 수 있다. 2011년에 자이언티는 세련되게 자신의 고유한 아이덴티티를 만들어내고자 애를 쓰고 있었다. 가사의 내용부터 온통 자신의 이른바 '라이프스타일'에 관한 것이었다. 자신의 독특성을 직접 주장하고자 했다. 그에 비해 아래 곡에서 원슈타인이 취하는 출발점은 '마네킨'이고 심지어 '엄마가 골라준 것 같은 카라티'다. 개성이라고는 없는 것들, 표준적 스타일의 정수들이 그의 출발점이다. 그는 그의 평범한 배경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평범하지 않은 마네킨,' '얼마가 골라준 것 같은 카라티'도 자신만의 것으로 만들 수 있는 사람으로 재규정된다. 말하자면, 스타일을 규정하는 방식이 변한 것이다. 영상을 보면 알겠지만 지난 2010년대 주류 음악계를 지배했던 멋진 스타일에 대한 강조는 없다. 머리는 사자 같고, 화장도 없다. 수트는 엉망이다. 마치, 이름 없는 평범한 소시민으로서 회사에 출근하는 첫날인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수트가 어색한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엄마'에게 잘 다녀오겠다고 집을 나선 그는 곧 수트를 입고 물 속으로 뛰어든다. 이것이 '업무 시간'에 묶인 '마네킨'이 생명을 얻는 방식이다. '엄마'의 등장에 대해 조금 생각해보자. 개성을 직접적으로 강조하는 사람이 '엄마'를 등장시킬 수는 없는 법이지 않던가? '개인'이란 '엄마' 없이 외계 우주로부터 태어난 자를 칭하는 용어이지 않던가? 예컨대, 10대 시절 남들 앞에서 '엄마'를 숨기고 싶지 않았던 자, 그런 적 한번도 없다 말할 수 있는 자, 과연 있는가? 10대 시절 늘 '엄마'에게 하고 싶었던 주장이란 결국 '난 나야' 혹은 '나 좀 놔둬'이지 않았던가? 그러나 아래 곡에서 '나'는 '엄마'를 등장시킨다. '나야!'라는 곡의 제목이 마치 '엄마, 나 왔어!'라고 말하려는 것인듯 말이다. 기존의 문법이 뒤집어져있다. 요즘식으로 말하면, ''엄마'가 거기서 왜 나와?'다. 원슈타인의 곡이 살아있는 감각을 보여주는 이유가 여기 있을 것이다. 편안하도록 구속됨이 없는 곡이다. 이 자유로움이 원슈타인이 '나야!'라고 말하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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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oo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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