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째서 오늘날 우리는 더 이상 카리스마 가득한 이른바 '천재적 음악가'의 출현을 보기 어렵게 된 것일까? 이름만 들어도 모두가 아는 한 시대의 음악가, 음악가 개인의 천재성이 번뜩여 아무도 모방할 수 없을 것 같은 음악을 내놓는 음악가를 오늘날 등장하는 새로운 세대에게서 찾아보기는 어렵다. 사실, 전통적 '리더쉽'의 부재라고 할 만한 현상은, 정치 뿐 아니라, 음악을 포함한 모든 영역에서도 벌어지는 일이다. 예컨대, 2000년대 이후 등장한 록 밴드 중 내 뇌리에 한 시대를 새롭게 정의내려 이끌고 갔다고 기억되는 밴드는 없다. 록 음악만 그런 것이 아니다. 대중 음악 전반이 그렇다. 반대로 오늘날은 수많은 다양한 이름 없는 음악가들의 시대인 것 같다. 이제는 누가 만든 음악인지, 해당 음악의 독창성과 그 저자에 대해 관심을 두지 않은 채 인터넷에서 흘러나오는대로 음악을 듣는다. 음악이 들려온다는 사실에 비하면 누구의 음악인지는 전혀 중요치 않다. 강한 개성을 지닌 인간, 즉, 창조자 혹은 저자로서의 인간이 음악의 전면에서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음악은 더 이상 인간의 영혼을 표현하는 한낱 도구가 아니다. 오늘날 인간의 개성으로부터 단절된 음악은 음악 자체의 시공간을 창출하는 데 복무한다. 여기에는 구조적 이유가 있다. 음악을 생산하는 데 있어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를 부르는 인간의 개별성이 크게 필요하지 않도록 만들어주는 테크놀로지의 발전이 그 한 가지 배경이다. 아래 '프렌치 키위 주스'(French Kiwi Juice)라 알려진 프랑스 음악가 벵상 팡통(Vincent Fenton)의 경우가 이를 잘 보여준다. ('프렌치 키위 주스'라니 이 얼마나 하찮은 이름이란 말인가? 이미 그의 이름에서부터 '천재 음악가'의 개성을 발견하기란 불가능이지 않은가?) 그의 음악은 근래 발전된 테크놀로지가 기존의 음악적 재능과 융합하게 될 때 어떤 흥미로운 결과가 나올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사실 음악만으로 놓고 볼때 FKJ의 음악에 그리 대단한 것은 없다. 소리만 들으면 그냥 편하게 들을 만한, 인터넷에서 흘러나오는, 이름이 중요치 않은 음악가의 음악과 같이 들릴 뿐이다. FKJ가 주목할 만한 이유는 음악을 '상연'하는 방식 때문이다. 아래 링크된 영상을 보라. 그는 스튜디오에서 믹싱 작업을 통해 잘 조합된 것과 같은 결과물을 라이브로 상연한다. 한편, 그가 만들어내는 모든 사운드는 기본적으로 그가 현장에서 연주하는 악기로부터 나온다. 또한 그가 연주하는 악기는 다양하다. 기타, 베이스, 건반, 섹소폰 등 여러 악기가 등장한다. 흥미로운 사실은 음악만을 들었을 때는 밴드 체제를 갖추고 있을 것 같은 음악의 배경에 연주자라고는 그 혼자 뿐이라는 데 있다. 한 가지 악기를 가지고 몇 소절을 순간적으로 녹음하여 루핑 사운드로서 배경에 전개시킨 후 다른 악기를 동일한 방법으로 연주하여 쌓아올리기에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서, FKJ가 사용하는 이러한 루핑 테크놀로지는 기술적으로 대단히 새로운 것이 아니다. 동일 테크놀로지를 사용하는 음악가를 찾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내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조금 다른 곳에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테크놀로지 자체가 아니다. 오히려 요점은 테크놀로지와 함께 음악가의 지위가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보는 데 있다. 즉, 아래 영상에서 FKJ는 라이브 연주를 하고 있지만 그의 지위는 연주자에 머물지 않다. 그는 '음악 감독'의 위치에 있다. 구태여 비교하자면,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와 같다. 테크놀로지가 가능하게 한 것은 '라이브 음악 감독물'이라는 새로운 음악적 결과물이다.
FKJ가 만들어내는 음악 감독 생산물이 어떠한 특징을 지니는지 조금 더 이야기해보자. 아래 영상에서 볼 수 있듯, 그가 생산해내는 라이브 음악은 분명 청중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라이브 공연은 결코 전통적 의미의 라이브 공연이지 않다. 그렇다면 어떤 차이가 있는가? 그가 음악 감독의 위치에서 전개시키는 음악이 음악가 개인의 자기 자신과의 대화로서 상연되고 있다는 것이 핵심이다. 사실 그의 라이브 음악은 근본에 있어 '공연장을 방문한 물리적 청중'을 그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 그보다는 음악 감독 그 자신을 음악 생산의 첫번째 청중으로 설정한다. 즉, 그가 음악 감독으로서 음악적 아이디어를 전개할 때 그의 청자는 그 자신이지 다른 누가 아니다. 무엇보다 그는 그가 라이브로 연주하여 녹음한 음악으로부터 순간적으로 이탈하여 그 자신의 음악을 청중으로서 듣는 위치에 놓여있다. 다시 말해, 그는 연주자이면서 동시에 그 자신의 청중이다. 그렇게 그 자신의 음악을 청자로서 즐기다가, 마치 타인이 만든 음악을 인터넷에서 듣다 영향을 받아 그것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믹스 음악을 만들어내듯, 들려오는 소리에 또 다른 연주를 덧붙인다. 생각해보라. 이는 인터넷 소설을 여러 독자들이 돌아가며 쓰는 것과 비슷한 일이다. (거꾸로 말하면, 다수의 작가가 참여하는 연재물 이야기 자체가 음악 영역에서 말하는 '믹스' 혹은 '리믹스'와 같은 것이지 않은가? 여기서 사라지는 것이 전통적 의미의 창조성의 원천으로서의 '저자'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연주자인 그는 공연장에서 청중인 그 자신과 대화를 만들어간다. 이것이 그가 음악을 '감독'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여기서 음악 감독직은 결코 클래식 음악에서 지휘자들이 보여주는 것과 같은 중앙집권적 리더쉽을 요하지 않는다. 오히려 FKJ에 있어 음악 감독직은 인터넷에서 음악을 듣는 음악 청자의 지위를 동시에 지니고 있다.
음악 청자의 위치를 점유하는 음악 감독의 위치와 관련하여 어째서 FKJ의 작업이 시각적 층위를 또한 중요시 여기는 것인지 그 이유를 유추할 수 있어야한다. 한 예로, 그의 라이브 영상들은 색채의 측면에서 무척이나 세련된 시각적 배경을 포함한다. 아래 영상도 예외는 아니다. 무대의 벽에 그려진 그림의 특성을 보라. 무엇보다 색채 위주이고 분위기를 창출하기 위한 목적에서 의도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동일 곡의 뮤직비디오 또한 인상적이다. 해당 뮤직 비디오의 영상에서 비추어지는 것은 드론으로 공중에서 촬영된 여러 도시의 풍경들 뿐이다. 모두가 공간감을 창출하기 위한 것이다. 볼리비아에서 촬영한 다른 라이브 영상의 배경도 마찬가지다. 라이브 연주임에도 정작 관중은 한 명도 없고 배경에는 아름다운 하늘과 태양의 빛만이 보인다. 여기서 오늘날 변화한 음악의 위상을 감지할 수 있어야한다. 오늘날 음악은 시각적 공간성의 일부로서 작동한다. 예컨대, FKJ는 연주자로서 충분히 준비된 숙련도를 지니고 있지만 그가 악기를 연주하는 목적은 악기를 통해 연주자 개인의 자아를 표현하기 위함이 아니다. 그의 연주는 테크놀로지를 통해 공간적 분위기, 즉, 어떤 새로운 공간에 와있는 것과 같은 느낌을 창출하기 위한 목적에 복무할 뿐이다. 다시 말해, 음악은 공간을 채우는 공기이지 음악가의 주관성이 표출되는 창구가 아니다. 이는 오늘날 음악이 더 이상 음악가가 지닌 개성과 개인성의 문제가 아니라는 뜻과 같다. 이제 음악은 시공간의 문제 자체다. 아래 영상에서 관중들이 취하는 태도를 보라. 이들은 한 음악가를 향해 '팬덤'을 표하기 위해 저곳에 모인 것이 아니다. 저들은 심지어 음악 '공연'을 '관람'하기 위해 저곳에 모인 것조차 아니다. 저들은 그저 편하게 앉아서 혹은 누워서 음악이 제공하는 새로운 시공간 자체를 경험하기 위해 저곳에 모여있다. 그래서 저들에게 가장 적절한 청취의 도구는 '헤드폰'이다. 공연장에서 쓰이는 대형 스피커는 오늘날 시공간을 경험하기 위한 음악을 전달하는 적절한 도구가 아니다.
잠시 음악의 시공간화 일반에 대해 생각해보자. 음악의 시공간화는 1990년대 록 음악의 영역에서 '록스타'들이 사라짐과 동시에 자기 발밑이나 바라보며 그저 연주를 할 뿐인 '슈게이저'들이 탄생했을 때 시작되었다. 즉, 여기서 사라지는 '록스타'가 바로 그 '록 음악의 저자로서 개성을 지닌 개인'이다. 록 음악의 시공간화가 시작되는 지점에 있는 음악가의 하나가 '욜라탱고'(Yo La Tengo)다. 이들의 공연을 보러가는 것은 새로운 시공간을 즐기기 위한 것이지 '록스타'의 마술적 개성에 취하여 '록스타'를 '교주'로 모시는 유사 종교적 경험을 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음악의 시공간화를 이룬 또 다른 축은, 물론, 전자 음악 계열에서 발견된다. '엠비언트' 음악이 그것이다. 한편, 이러한 전통이 오늘날 유튜브 등의 시각 매체의 발전과 함께 '로파이 칠합' 등으로 불리는 모음집 형태로 발전하고 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러한 영상물의 특징은 평온한 시공간의 장면을 묘사한 시각적 배경이 함께 주어진다는 데 있다. 음악은 그 공간을 채우는 공기와 같다. 결과적으로 그 안에서 경험하는 것은, 전통적 의미의 음악이라기보다, 시공간 자체다. 실제로 해당 영상을 볼 때 사람들의 반응은 눈 앞에 보이는 저 배경 안에 들어가 머물고 싶다는 것이지 지금 들려오는 음악의 저자가 누구냐는 질문이 아니다. FKJ의 라이브 공연을 공연장에 앉아 헤드폰으로 듣는 것과 유튜브 영상을 헤드폰을 끼고 보는 것이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은 일인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헤드폰은 새로운 시공간을 즐기기 위해 기존의 물리적 시공간으로부터 청자를 단절시켜주는 명상의 도구와 같다.
이제 거꾸로 말해보자. 음악의 시공간화 현상은 오늘날 청자들이 고향 상실의 문제를 겪고 있다는 말과 같다. 오늘날 사람들은 더 이상 물리적 현실 속에 머물 '집'을 가지고 있다고 느끼지 못한다. 1인 가구가 늘어가는 현상을 보라. 이제는 집에 가봤자 아무도 없다. 그러한 곳은 더 이상 집이라 불리기 어렵다. 이제 '집'은, 차량이 주차장에 주차되듯, 끊임없이 이동할 운명의 육신이 해가 진 동안 잠시 멈추어 서는 곳일 뿐이다. 혹은, 이제 물리적 '집'은 브램 스토커의 소설 [드라큐라]에 나오는 백작이 홀로 자신의 성에 머물 때 지하에 모셔진 관에 들어가 자는 것과 별로 다르지 않은 일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이제 인간에게 정서를 느끼도록 해주는 것은, 물리적 집이 아니라, 온라인이라는 시공간 안에 있다. 여기서 드라큐라 백작이 어째서 성밖으로 나가 사람들의 피를 빨아야만 하는지 그 이유를 생각해보라. 그리고 한번 그에게 물린 사람 또한 어째서 다른 이들에게 거역할 수 없는 유혹의 대상으로 현상하게 되는지 그 이유를 생각해보라. 오늘날 물리적 세상으로부터 사라져 없어진 정서의 뒤에 잠복해있는 것이 바로 정신분석적 의미의 '욕망'이지 않은가? 음악의 시공간화는 이러한 문화적 배경 속에서 이해되어야한다. 그것은 사라진 '집'을 새로운 방식으로, 예컨대, 테크놀로지를 통해, 되찾고자하는 시도와 같다. 비슷한 맥락에서 오늘날 사람들이 카페나 여러 다양한 공간을 찾아다니는 이유를 생각해보라. 오늘날 카페가 제공하는 것은 물리적 마실것으로서의 '커피'가 아니다. 그것은 시각적 의미의 '공간'이다. 그 시각적 공간은 아늑한 집과 같은 모습을 포함하고 있다. 카페에서 들려오는 음악은 바로 이 공간을 완성하는 마지막 퍼즐과 같다. 음악 없이 시공간은 완결되지 않는다. 음악은 시각적 공간에 덧붙여지는 또 하나의 공간과 같다. 현대 물리학이 말하듯, 시간은 공간의 한 가지 차원이다. 시간의 흐름을 자각케 하는 소리의 연쇄 자체가 공간의 한 가지 차원이다.
FKJ로 되돌아가자. 오늘날 음악은 삶의 공간으로부터 사라져버린 사람들의 소리를 찾아내기 위한 시도와 같다. 살인 사건을 다루는 영화에서 탐정은 살해된 사람의 흔적을 논리적 추리를 통해 더듬어가며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그 이야기를 재구성해내고자 한다. 공간적 음악에서 음악 감독은 사라진 밴드 구성원들의 자리를 몸소 더듬어가며, 즉, 악기를 손에 쥐었다 놓았다 하며, 사라진 음악을 완성해가고자 한다. 그것이 FKJ가 홀로 온갖 악기를 다루어가며 라이브 공연을 상연할 때 하고자 하는 일이다. 전통적 음악의 관점에서 보자면, 무엇인가 애처로우며 불완전하게만 보이는 모습이다. 우리는 더 이상 '비르투오소'(virtuoso)를 지닌 '천재 연주자-음악가'를 볼 수 없게 된 것인가? 더 이상, 예컨대, 재즈 씬에서 키스 자렛과 같은 인물이 나오기를 기대할 수 없는 것인가? 아마도 그럴 것이다. 오히려 우리가 앞으로 만날 새로운 시대의 음악가는 밴드 구성원의 결여를, 혹은 가족의 결여를, 테크놀로지를 통해 자기 자신과의 대화로 바꾸어놓고자 하는 FKJ와 같은 사람들이다. 오늘날 음악이 시공간화되는 것은 음악이 결여와 맞닿아있기 때문이다. 물론, 음악에 있어 결여의 문제는 항상 있어왔다. 그렇다면 차이는 무엇인가? 과거에는 이 결여를 연주자가 지닌 '자아의 주관성'이, 공간성과 구분된 시간성의 모습으로, 메웠다. 오늘날은 '주관성'을 대체하는 기계 외골격(exoskeleton)을 입은 듯한 모습의 음악가들이 '테크놀로지'를 통해 이 결여를 공간적으로 메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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