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미야자키 하야오가 보내는 작별인사 같은 작품이다. 작품 속 큰할아버지는 미야자키 하야오 자신이 투사된 인물과 같다. 악의가 없는 세계를 구현하기 위해 평생 순수한 블록을 찾고자 했고 그렇게 찾은 조각들로 쌓아올린 탑은 그의 작품들과 같다. 그는 마히토가 그의 계승자가 되었으면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다. 젊은 세대는 자신만의 삶을 진창으로부터 다시 세우고자 하기 때문이다. 결국 그가 일구어낸 세계는 계승자 없이 무너져내린다. 아름다움의 계승과 진보가 아닌 제자리 걸음과 같은 반복을 택한 결과다. 어리석음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삶의 이치이기도 하다. 반복 속에 차이가 있기를 바랄 뿐이다.
그러나 이를 미적인 것에 대한 평가절하로 보아서는 안된다. 미적인 것은 꼭 필요하다. 주인공인 마히토가 자신이 품은 세상에 대한 악의를 다스리고 그와 함께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은 왜가리가 그를 삶과 죽음이 하나된 미적 세계로 인도하여 그 세계 안에서 깨달음을 얻고 난 후다. 그 깨달음은 악의를 정화하는 과정과 같다. 사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들 중 이 작품에 등장한 것만큼 까칠한 주인공을 본 적이 없다. 겉으로는 깍듯하지만 마히토는 세계에 대한 적개심으로 가득차 있다. 세계는 전쟁 중이고 불이 나고 사람이 죽는다. 그 과정에서 어머니를 잃게 된다. 그는 그후 아무와도 마음을 나누지 않는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세계에서 공동체로부터 유리된 인물이 주인공이 된 적이 없다. 쉽게 말해, 못된 사춘기적 감수성의 소년이 주인공인 적이 없었다. 미야자키의 주인공들은 모두 순수한 영혼의 소유자들이었다. 세계는 타락했을지언정 그들 순수한 자들이 있기에 살아갈 만한 곳이 된다. 그게 미야자키 하야오 작품의 매력이었다. 그에 비해 이 작품은 바로 그 순수한 주인공을 잃은 채로 시작한다. 마히토가 순수함을 얻게 되는 것은 왜가리의 안내로 미적 세계로 들어가 친구들을 사귀고 죽은 어머니--히메--를 만나고, 큰할아버지를 만나고 난 후다. 큰할아버지는 지금까지 미야자키 하야오의 세계 속 주인공들에게 악의 없는 순수한 영혼을 구현하도록 만든 미적 원동력과 같다. 마히토는 그로부터 아름다움을 배운다. 그러나 동시에 아름다움을 포기하고 세속으로 되돌아간다.
사실 미적 세계라고는 하지만 왜가리의 안내로 마히토가 들어가는 세계는 죽은 자의 세계이기도 하다. 삶과 죽음이 하나의 사이클로 이어진 곳, 그곳에서 키리코는 마히토에게 이렇게 말한다: "마히토라고? 정직한 자라는 뜻이군. 그래서 너에게서 죽음의 냄새가 났던 것이구나." 미야자키 하야오의 세계에서 마히토는 악의를 지니고 있지만 그의 악의는 거짓 없이 죽음이 스스로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이해된다. 아무런 가식도 없는 상태, 그래서 적의가 드러나는 상태, 그것이 정직한 자인 마히토가 처한 곤경이다. 그는 죽은 어머니를 만나고자 큰할아버지의 세계로 들어간다. 미의 세계에서는 죽음도 상상력으로 다시 생명을 얻는다. 문학의 세계가 죽은 자들을 호출해 그들의 목소리를 산 자들에게 전해준다는 것을 기억하라. 그러나 그 역도 마찬가지다. 산 자가 미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은 죽음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과 같다. 단테의 지옥문에 쓰여진 글귀를 연상케 하는 "내가 지닌 지식을 추구하는 자, 죽게 되리라"는 글귀가 쓰여진 황금문이 등장하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다. 미히토가 들어선 미적 세계는 삶과 죽음을 구분할 수 없는 세계다. 그곳에서는 죽은 자가 곧 산 자이고, 산 자가 곧 죽은 자다.
그렇기에 큰할아버지의 세계는 단순히 미화된 세계가 아니다. 마히토는 그곳에서 세속으로 돌아가 신체를 얻게 되면 인간이 되는, 인간의 영혼과도 같은 와라와라가 펠리컨들에게 잡아먹히는 것을 본다. 처음에 그는 펠리컨의 사악한 행태에 분개한다. 그러나 곧 히메가 나타나 펠리컨들을 불로 태워죽인다. 그는 안도한다. 그러나 조금 후 그는 죽어가는 펠리컨을 만나게 된다. 펠리컨은 자신들이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원래는 먹지 않았던 와라와라를 먹게 된 경위를 설명한 후 죽는다. 이 세계 속에서 삶과 죽음은 손쉬운 선과 악의 이분법으로 이루어져있지 않다. 훨씬 더 생태학적이다. 마히토는 이 지점에서 삶의 이치를 배우게 된다. 그는 펠리컨을 묻어준다. 단연 해당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의 하나다. 키리코와 만난 후 마히토가 처음으로 배우는 것은 물고기를 잡는 일이고, 잡은 물고기의 배를 갈라 음식으로서 다루는 일이다. 그 과정에서 마히토는 물고기의 피와 내장을 뒤집어쓰게 된다. 죽은 자의 피와 내장을 먹고 살아가는 것이 생명이다. 이곳에서 마히토는 생과 사의 이치를 몸소 배우게 된다. 사실 생태학적 관점에서 볼 때 영화 속에서 앵무새들이 인간을 잡아먹는다는 설정은 너무도 자연스럽다. 인간은 생태학적 대사과정의 일부를 이룰 뿐이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어떻게 살 것인가?'라고 묻고 있지만 사실 모든 것이 선택과 의지만으로 되는 세계를 그리고 있지 않다. 마히토는 세속으로 돌아가고자 결심하지만 마지막 순간 미적 세계를 무너뜨리는 것은 미적 세계 안에 잠복해있던 우연성을 통해서다. 큰할아버지와 마히토 사이에 앵무새왕이 끼어들어 멋대로 탑을 조립한 후 무너뜨리게 된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생태학적 세계관을 고려하면 이는 자연스러운 전개다. 관계론적 사고 속에서 관념의 필연성은 그 자신의 한계를 드러내게 되기 때문이다. 미학은 생태학적 세속으로부터 태어나고 그로 인해 무너진다.
미야자키 이후 스튜디오 지브리를 생각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스튜디오 지브리는 미야자키 하야오가 작고할 때 그와 함께 역사가 될 것이다. 회사가 살아남는다고 해도 더 이상 주목할 만한 회사는 아니게 될 것이다. 2025년 현재 세계는 다시 악당들의 시대로 되돌아가고 있다. 힘을 가진 자들이 멋대로 폭력을 동원해 세상을 주무르고자 하는 움직임이 갈수록 거세지고 있다. 20세기 중후반 선한 이들의 세계를 그려왔던 미야자키 하야오의 시대가 저물고 있다. 난 그의 작품을 하나 더 볼 수 있기를 바란다. 이미 새로운 작업을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를 마무리하는데 10년이 걸린 것을 볼 때 이미 80대의 나이에 들어선 그가 다음 작품을 마무리할 수 있을지는 확신할 수 없다. 그렇지만 난 한번 더 대가에 의해 선한 사람들의 세계가 그려져 스크린에 올려지는 것을 보고 싶다. 악당들이 활개치는 세계가 전부가 아니라는 믿음이 스크린에 한번 더 올려지는 것을 보고 싶다.*
* 영화의 특성상 의미론적으로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마지막 작품일 수밖에 없다. 여느 때와 달리 이번 작품를 끝낸 시점에 '은퇴'를 이야기하지 않은 것도 주목할 만한 현상이라고 본다. 그는 항상 작품을 하나 끝낼 때마다 지쳐서 더 이상 작품을 만들지 않겠다고 투정조로 은퇴를 선언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런 말이 없었다. 마치 정말로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를 했기에 더 이상 여한이 없다는 듯이 말이다. (물론 다른 맥락도 있다. 짧게는 2-3년, 보통 4-5년 간격으로 작품을 만들다 이번에는 10년이라는 시간을 쓴 만큼 스스로를 지치게 만드는 스케줄로 일을 진행하지 않았을 것이고, 그게 그로 하여금 '지쳐서 더 못하겠다'는 말을 하지 않도록 만들었을 수 있다. 또 다른 한편, 그의 은퇴선언은 제작자인 스즈키 토시오의 마케팅 기술로 이용된 측면도 있었을 것이라 본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숨이 붙어있는 한 작품활동을 계속해서 할 천생 예술가 스타일의 인물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특히 그러하다. 힘들어서 홧김에 한 두 마디 한 것을 언론에 전했다가 그게 세일즈에 도움이 되는 것을 본 후 그 후 계속해서 미야자키의 말을 같은 구실로 이용하지 않았나 싶다. 물론 내 추정일 뿐이다.) 이게 사실이든 아니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일담 혹은 소품과 같은 작품을 하나 더 만들 수 없는 건 아니라고 본다. 2008년 <포뇨>와 같은 작품 정도는 얼마든 가능하다고 본다. 물론 <포뇨> 정도의 영화라면 별로 관심을 두기 어렵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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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Boy and the Heron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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