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음악에는 두 가지가 공존한다. 황제의 화려함을 대변하는 웅장한 메인 테마와 황제의 초라한 퇴장을 예견하는 듯한 멜랑콜리한 도입부와 간주. 아마 이 둘의 대비가 이 음악을 들을 만하게 만드는 요소일 것이다. 이 음악으로 류이치 사카모토가 젊은 나이에 세계적인 인지도를 얻게 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중국을 배경으로 한 영화의 음악을 일본인이 맡았다는 것이 당대 서구 사회에서 일본의 위상이 어떠한 것이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1980년대 동양은 사실상 일본을 통하지 않고서는 서구인들 사이에 각인될 수 없었다. 그 정도로 당시 동양에는 일본의 경쟁자가 없었다. 문화적으로 홍콩이 다소간 주목을 받을 수 있을 뿐이었다. 반면 2020년대 서구에서 그 위상을 누리는 것은 한국이다. 지금이라면 동양 관련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한국을 대표자로 내세울 것이다.
1987년 개봉되었던 [마지막 황제]는 중국에 관한 영화이지만 감독부터 이탈리아인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흥미롭게도, 문화, 특히 대중문화의 영역에서 중국은, 1980년대는 말할 것도 없고, 대단한 경제적 성장을 이룬 지금도 거의 영향력이 없다. (10대들 사이에서 중국이 스마트폰용 게임을 통해 침투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고, 이 부분에 대해서는 주목을 할 필요가 있다. [붕괴]라는 이름의 시리즈가 대표적이다.) 볼 만한 대중문화는 자본주의적 욕망과 그 탐욕에 대한 성찰의 계기를 제공하는 민주주의가 결합할 때 등장하기 때문이다. (한국이 정확히 이 경우에 맞아떨어진다. [오징어게임]의 경우를 보라. 기본적으로 자본주의적 생존투쟁에 관한 이야기다. 그러나 그에 대한 고찰이 담겨있다.) 이 가설이 맞다면 중국은 앞으로도 본격적인 의미의 문화적 패권은 얻기 힘들 것이라고 예상해볼 수 있다. 중국은 탐욕스러운 자본주의라는 요소는 갖추고 있지만 민주주의 대신 공산당 1당 지배 체제를 정치 시스템으로 운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난 그들의 시스템에 문제제기를 할 생각이 없다. 심지어 장점도 있다고 본다. 그러나 해당 체제로 전세계를 상대로 한 문화적 패권은 얻기 어렵다는 말을 해보고 싶다. 물론 이 말은 개별적인 작품이 훌륭하지 않을 것이란 뜻이 아니다. [삼체]의 경우에서보듯 중국의 상상력은 과학소설과 같은 특정 분야에서 두각을 보인다. (여기에는 배경이 있다. 중국에서 상상력의 범주는 개인이 아니라 공산당이 정한다. 예컨대, 그들은 좀비물은 허락하지 않는다. 반동적 혹은 퇴폐적이라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학소설은 그렇지 않다. 진취적으로 미래를 사유하는 양식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허락된 상상력의 범위 내에서만큼은 훌륭한 결과물이 나오고 있는 셈이다.) 이미 노벨 문학상도 두 번이나 받았다. 그러나 한 국가의 문화 전반이 세계 문화의 패권을 쥐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쉽게 말하면, 중국은 문화의 층위에서 자본주의의 탐욕을 성찰하고 그러한 과정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시스템이 아니다. 중국은 자본주의의 탐욕을 공산당의 통제로 해결하고자 한다. 나는 이것도 일종의 해결법이 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공산당의 통제만으로 자본의 탐욕을 완전히 다스릴 수는 없다. 물론 그렇게라도 통제가 이루어지는 것이 무도한 자들이 완전히 돈의 힘으로 세상을 지배하는 것보다는 나을 수 있다. (물론 또 다른 한편, 자본가의 타락을 통제하기 위해 공산당에 힘이 실릴수록 거꾸로 이번에는 공산당 내 엘리트주의 및 부패라는 문제가 발생할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정치체제가 그 자체로 자본의 욕망을 통제하게 되면 문화가 나설 곳이 없게 된다는 데 있다. 문화, 특히 오늘날 대중문화는 자본주의의 표현인 동시에 그에 대한 사유를 행하는 도구와 같다. 이 말은 문화가 자생적으로 자본으로부터 태어나는 동시에 스스로 자기 자신을 통제하는 양식이라는 뜻이다. 물론 문화 또한 완벽하지 않다. 욕망 앞에서 힘 없이 물러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때때로 볼 만한 광경이 만들어진다.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과 같은 작품을 생각해볼 수 있다. 반면 중국은 문화가 스스로 자본주의적 삶의 방식에 대해 성찰할 기회를 주지 않는다. 문화 대신 당이 나서기 때문이다. 어느 쪽이 더 나은지는 각자가 판단할 일이다. 그러나 비교적 확실한 것은 중국과 같은 정치 체제가 문화적 패권을 쥐기는 어렵다는 사실이다.
중국의 경제적 발전이 어느 정도인지 서구와 서구권의 일원임을 강조하는 한국 사회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고 있다. 반중국 정서 때문에 한국의 미디어가 중국의 실상을 전혀 파악하려 하지 않은 결과다. 중국의 대도시는 한국의 대도시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의 규모이고 거의 전부 최첨단의 모습을 하고 있다. 대부분 21세기에 만들어졌기 때문에 당연한 일이다. 쉽게 말해, 홍콩을 넘어서는 수준의 인프라를 갖춘 도시가 이미 10군데 이상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베이징이나 상하이 같이 잘 알려진 도시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한국인들 사이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충칭이나 선전과 같은 도시를 볼 필요가 있다. 홍콩인들조차 이제는 홍콩 근처의 선전으로 쇼핑을 간다. 적어도 인프라의 차원에서 중국은 어디에 내놓아도 뒤지지 않을 수준을 이미 갖추었다. 심지어는 중국을 방문한 미국인들도, 중국이 그렇게 변한 줄 모르고 있었다가, 직접 보고는 놀란다. 겉으로 드러난 것을 보고 모든 것이 미국보다 낫다는 평가까지 한다. 물론, 그런 효과를 노리고 겉으로 드러나는 부분을 더 화려하게 만들고자 신경을 쓴 결과라고 봐야한다. 내부적 문제도 많다. 그렇기에 한 나라의 실력은 외적으로 드러난 경제력만으로 판단할 수 없다. 문화적, 도덕적 패권까지 얻어야 세계의 리더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꾸로 말하면, 중국이 아직 달성하지 못한 것은 문화적, 도덕적 패권이지 경제적 패권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문화적 측면에서도 어쨌거나 계속해서 성장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고 봐야한다. 이런 현실을 무시하고 중국을 무시하는 것은 미국이 만들어놓은 20세기적 가상현실 속에서 살아가겠다는 뜻과 같다. 중국인들은 더 이상 자신들의 역사 이야기를 타국인들이 영화화해줄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일본인이 중국을 배경으로 한 영화의 음악을 만들어주기를 바라지 않는다. 아이는 결국 어른이 된다. 그렇게 되면, 좋든 싫든, 받아들여야한다. 미국의 단일 패권으로 이루어졌던 20세기식 질서는 이미 지나간 과거의 일이다. 마지막 황제의 시대가 지나갔듯이 지나갔다. 트럼프의 당선은 미국이 지나간 과거의 패권을 무법적 힘을 통해 되찾고자 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일과 같다. 그러한 조치가 단기적으로는 얼마간 다시 미국의 패권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아니다. 미국이 도덕적, 문화적 패권을 잃는 과정으로 이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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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Last Emperor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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