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발표된 지드래곤의 신곡을 들으면서 느끼는 것은, 근래의 케이팝 아이돌의 음악과 달리, 지드래곤까지는 내 감수성이 허용한다는 사실이다. 지드래곤의 음악이 근래 나오는 음악보다 더 훌륭해서 그런 것인지까지는 확신하지 못하겠다. 그보다는 그의 음악까지는 상대적으로 어린 시절인 20대 후반에 접한 바가 있어서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사실 지디는 이미 오래된 음악가다. "홈스위트홈"이라는 신곡을 들어보면 알겠지만 그 옛날 빅뱅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구성을 지니고 있다. 더불어 훌륭한 후크송 후렴구를 지니고 있다. 이런 구성이 정점에 이르렀던 것이 2010년 전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물론 그 시절 가장 영향력 있었던 음악가가 빅뱅이다. 이번 지디의 신곡은 그 시절의 기억을 소환한다.
또 다른 신곡인 "파워"에 대해 이야기보자. 이 곡의 성질은 "홈스위트홈"과는 조금 다르다. 그렇게 대중적인 스타일이 아니다. 그렇기에 "파워"는 곡의 예술적 완성도에 있어 충분히 높은 점수를 줄 수 있다. 실험적인 요소와 스타일 두 가지를 다 가지고 있다. 이는 이미 지디가 2012년경에 정점을 보여준 구성이다. "원오브어카인드"나 "크레용"이 대표적이다. 사실 당시 난 이 두 곡을 들으며 록의 시대가 끝났다고 느꼈더랬다. 한낱 아이돌에 불과하다고 여겼던 부류 속에서 성장한 인물이 음악적 창의성과 대중성의 측면에 있어 록씬이 보여주던 것을 넘어섰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기존이라면 록음악가 보여주었어야할 창의성이 힙합을 하는 부류에게서 발견되었다는 사실은 록음악에 충실한 사람 입장에서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었다. 당시 한국의 록음악가들은 소박하고 자족적인 가내수공업 인디 록음악의 형태로 퇴보하고 있었다. 장기하류 음악 혹은 브로콜리너마저류의 음악을 떠올려보라. 물론 그런 음악 자체에는 문제가 없었다. 다만 록이 주류의 위치에서 한 구석으로 물러나고 있다는 신호라는 점에서는 문제였다. 록이 세상을 지배하기를 바랬던 나로서는 반갑지 않은 현상이었다. 젊은이의 창의성이 대중성과 함께 폭발하듯 드러나는 창구가 록에서 힙합으로 넘어간 것이다.
이쯤에서 한 가지 지적하고 싶은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입장에서 지디의 음악은 들을 수 있지만 최근의 케이팝 음악은 즐기지 못한는 것이다. 난 여기에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지디는 이른바 '아티스트'의 개인성이 인물의 형태로 드러난 시대가 배출한 마지막 인물과 같다. 이 점이 핵심적이다. 원래 '아티스트'의 개인성을 극대화한 장르는 록음악이었다. '록스타'라는 개념이 대표적이다. 지디는 힙합이라는 장르 속에서 성장한 인물이지만 시대적으로 록음악이 개방했던 '아티스트의 시대'가 끝나는 지점과 겹친다. 2010년경 내가 록음악에서 힙합으로 헤게모니가 넘어갔다고 여길 수 있었던 것은 장르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둘 사이에 공유되는 지점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2020년대가 가까워지며 케이팝이 보다 분명하게 시스템에 의한 기획과 산업의 문제가 되면서부터는 '아티스트'라는 개념 자체가 성립하지 않게 된다. 예컨대, BTS의 맴버 중 그 누구도 개인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 난 이들 맴버 중 기억나는 이름이 거의 없다. 유일하게 RM은 기억한다. 그러나 그의 정체성은 지디가 보여준 뒤틀린 반항기와 같은 것을 지니고 있지 않다. UN에서 연설을 할 때 보여주었듯 올곧은 느낌이 훨씬 더 강하다. 믿음직하고 좋은 청년이라는 느낌이지 시대와 불화하는 인물 특유의 독특성을 지니고 있지 않다. (RM은 교양 티비 프로그램인 '알쓸신잡'의 진행자로 참여하기도 했다. 과연 우리는 [알쓸신잡]을 진행하는 지디를 상상할 수 있는가? 랩핑을 하는 것과 같은 불규칙한 리듬을 지닌 화법을 사용하며, 끊임없이 꼼지락거리며 움직이는 몸동작을 선사하는 지디가 진행하는 '알쓸신잡'을 상상할 수 있는가? 교양은 인내심을 요한다. 꼼지락거리는 모든 변화의 흐름을 멈춘 후 정지 속에서 사유를 해야만 달성되는 것이 교양이다. RM은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지디는 붙잡기 위해 한쪽을 누르면 다른 한쪽으로 불거져 나오는, 형태를 지니지 않은 젤리 같은 인물이다. 그렇기에 지디는 흥미롭다. 오늘날 예술은 붙잡을 수 없는 것에 맞닿아 있다. 그러한 것을 창의성이라 부른다. 그러나 그렇기에 반대로 지디는 원리와 원칙을 상징하는 도덕적 인물은 될 수가 없다.) 이것이 힙합의 시대 또한 끝났다는 뜻일 것이다.* 전지구적 케이팝의 시대가 열렸다는 것은 인물의 시대가 끝났다는 뜻과 같다.
지드래곤의 신보를 접하며 기존의 팬들이 내보이는 댓글을 보면 그 키워드가 '추억'에 맞추어진 것을 알 수 있다. 삼십대 중반에 이른 팬들이 그들 자신의 10대 및 20대 시절을 추억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그들의 찬란했던 시절의 기억이 지드래곤과 함께 돌아왔다는 것이 핵심이다. 기억이 전면에 온다는 것은 해당 음악가가 근본에 있어 동시대적 혹은 물리적이지 않다는 뜻과 같다. 난 이 지점에서 지드래곤의 신곡이 내 입장에 충분히 즐길 만하게 들린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내가 듣기에 즐길 수 있는 곡은 동시대적 곡일 수 없다. 지드래곤은 지나간 '아티스트의 시대'의 마지막 아이콘이다. 물론 난 그에게 록음악가들에게 주는 것만큼의 창의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미 너무 많이 프로그래밍과 프로듀싱에 의존하게 된 시대에 속하는 인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번 신곡만 해도 "파워"의 경우 지드래곤이 작곡자로 이름을 올리고 있지만 미국인 전문가 힙합 프로듀서가 세 명이나 더 달라붙어 작곡, 어레인징, 프로듀싱에 개입한 것을 알 수 있다. 사실 이러한 작업 방식은 이른바 '천재적' 개인의 작업 방식이 아니다. 전문가 시스템에 의한 창의적 협업이라 부르는 편이 낫다. 그럼에도 지드래곤에게는 '아티스트'의 마지막 흔적이 있다. 그것이 그를 특별하게 만드는 요인이고, 내가 그의 음악에 최소한도로 공감하도록 만드는 요인이다.
"파워"에 대해 조금만 더 이야기해보자. 지드래곤의 들을 만한 곡들이 늘 그랬지만, 이 곡의 특징은 '아티스트'의 개인성을 내면에서 외적 스타일로 뒤틀어놓는다는 데 있다. 이 친구의 음악은 '나는 특별하다'는 메세지를 개인의 통합된 내적 목소리를 통해서가 아니라 신경질적으로 들리는 기묘한 목소리를 통해 드러낸다는 데 있다. 요점은 그의 기묘한 목소리를 일반 청중이 흉내를 내기가 무척 어렵다는 데 있다. 쉽게 말해서 지드래곤은 따라부를 수 없는 노래를 부른다. 사실 바로 그게 '랩'의 정체성이다. 랩은 '통합된 자아의 내면을 지니고 있지는 못하지만 나는 그럼에도 독특하며 특별한 사람이야'라는 주장을 하기 위한 장치와 같다. 달리 말하면 랩은 자기 자신만의 방언을 구사하는 능력과 같다. 방언이기에 내용의 측면에서 아무도 못알아들을 수 있다. 그러나 겉으로 드러난 짓껄이는 행위 자체가 스타일로서 받아들여진다면 랩은 거꾸로 전지구적 보편어가 될 수 있다. 이게 랩과 힙합이 2010년대에 '내가 제일 잘나가'라고 외치며 '스타일' 하나로 주류 대중음악의 지위로 올라선 방식이다. 기존 '아티스트'는 내적 자아를 지니고 있었다. 청중은 '아티스트'가 내놓는 개인적 이야기의 메세지에 공감하고 같이 따라부름으로써 '팔로워'가 되었다. 영미권의 1980-90년대 록스타들이 내한하여 공연을 할 때 한국의 청중이 선사하는 "떼창" 문화를 생각해보라. 따라부르는 행위는 아티스트의 이야기를 '팔로우'하는 가장 중요한 행위 중 하나다. 반면 지드래곤의 '아티스트'성은 아무도 그의 랩을 따라부를 수 없게 만듬으로써 달성된다. '따라해볼테면 따라해봐, (어차피 못할테니)'가 핵심이다. 관객 입장에선 그냥 매료된 채 바라보는 수밖에 없다. 이것이 그가 독특성을 획득하는 방식이다. 동시에 이것이 2010년대 초반 전성기 시절 동안 많이 이들이 지디를 '자기 자랑이나 할 줄 아는 혹은 겉멋만 부릴 줄 아는 공허한 아이돌-젊은이'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하도록 만든 원동력이다. (사실 이는 사실이기도 했다. 예컨대, 흥미롭게도 지디 자신이 회고하며 말하길 그 당시 자신의 삶이 겉으로 드러난 화려함과 대조적으로 내적으로 공허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서는 얼마전 유퀴즈에서 행한 대담을 참고하라. 한번 음악 산업의 시스템 속에 끼워져 돌아가기 시작하면 그 누구도 겉멋을 위주로 행동하지 않을 수 없다는 뜻이다.) 지디의 이러한 특성이 정점에 올랐던 것이 2012년경이다. 이번 "파워"는 기존의 요소를 여전히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이번에는 한 가지가 바뀌기도 했다. 자신이 만든 랩을 배경음악 정도로 깔고 춤을 추는 식으로 변화했다는 게 눈에 들어온다. "파워"의 뮤직비디오를 보면 알겠지만 화면 속 지디는 랩을 하지 않는다. 그냥 여기 저기 돌아나니며 장난스러운 동작 혹은 춤과 같이 보이는 동작들을 할 뿐이다. 물론 여전히 계획된 안무의 형태라고 보아야겠지만, 춤의 모습이 또한 굉장히 느슨해진 것을 알 수 있다. 군무의 느낌보다는 덩실덩실 춤을 추는 느낌이다. 나이가 들어 여유가 생겼다는 뜻이다. 앞으로는 자기 하고 싶은대로 '인생을 즐기겠다'는 뜻이다. 뮤직비디오에서 드러나듯 지디의 춤은 주변의 백댄서들의 춤과 양상이 완전히 다르다. 기본적으로 같은 동작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백댄서들은 기계처럼 딱딱하게 힘을 줘가면서 춤을 추는 반면, 지디는 같은 동작을 덩실덩실 부드럽게 바꿔서 춘다. 이게 그가 그 자신의 독특성을 지켜내는 방식이다. 자신은 더 이상 오늘날 클리세가 된 군무의 일원이 아니라는 말을 하는 것과 같다. 옛날 용어로 말하자면, 일종의 '성숙'이 이번 컴백을 이해하는 한 가지 키워드다. (물론, 그는 '도덕'의 상징이 되기에는 여전히 전통적 '교양'과 거리가 먼 인물이다. 그건 그보고 '지디'가 아니라 인간 '권지용'으로 살라는 뜻일 테다.) 지디도 중년으로 들어서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이것이 그가 유퀴즈 대담에서 자신이 더 이상 '굿보이'가 아니라고 한 말의 의미일 것이다.
* 물론 힙합의 시대가 끝난 후 다시 돌아온 것은 의외로 록이다. 로제와 마스의 "아파트"라는 곡을 보라. 올리비아 로드리고도 좋은 예다. 모두 사실상 록음악의 문법을 차용하고 있다. 그러나 기존의 록은 아니다. 록의 문법을 사용했으나, 반항기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정제 탄수화물로 만든 가공식품과 같다. 혹은 최고의 제빵기술로 무장한, 겉모습부터 무척이나 화려하며 입에 넣으면 혀에 착착 붙는 맛을 지닌 빵을 만드는 최고급 빵집의 빵과 같다. 로제와 마스의 곡은 한국의 "아파트"라는 놀이문화를 차용하여 주목을 받지만 사실 로제라는 인물이 보여주는 창법이나 스타일은 너무도 미국적이다. 노랫말도 전부 영어다. 듣고 있으면 올리비아 로드리고의 곡과 정체성에 있어 거의 차이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미국에서 팔리는 미국화된 한국의 김밥을 보는 것과 같은 느낌이다. 잘못되었다는 뜻이 아니다. 완전히 미국 현지화된 미국 시장을 노리고 만든 곡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더 쉽게 미국인들 사이에서 어필을 한다는 뜻이다. 사실 여기서 보다 중요한 사실은 다음과 같다: 오늘날 우리가 보는 것은 케이팝의 팝음악화다. 1990년대 한국의 대중음악을 주도했던 음악가들은 미국의 팝음악 및 록음악에 선망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은 한국의 음악을 촌스럽다고 여겼다. 그래서 미국의 팝음악을 들었다. 그러나 그들이 2000년대 이후 미국의 대중음악을 본떠서 케이팝이란 것을 만들게 되자 한국의 새로운 세대는 더 이상 미국의 팝음악에 귀를 기울이지 않게 됐다. 완성도의 측면에서 미국의 것과 대등하게 되자 구태여 알아들을 수도 없는 영어로 된 음악을 들을 필요가 없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자국 음악 중심 청취 태도에는 자국의 음악에 안주한 채 갈라파고스화되어 영향력을 일어버리게 될 문제의 소지가 있었다. 일본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그러나 2020년대에 우리가 보는 것은 다시 한번 케이팝과 미국의 팝이 만나는 장면이다. 갈라파고스화되기는커녕 케이팝이 곧 팝이 되어가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좋은 현상인지 아닌지, 앞으로 어디로 갈지는 조금 더 지켜볼 일이다.
** 나 또한 동일한 경험을 서태지가 2000년에 컴백했을 때 했었다. 각 세대에게 늘 일어나는 일이라는 뜻이다. 딱히 음악가 혹은 음악이 절대적으로 위대해서 일어나는 일이라고 할 수 없다는 뜻이다. 물론 실력과 영향력이 없는 음악가에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모든 시대는 그 시대의 음악가를 지니고 있기도 하다. 예컨대, 10년 뒤 쯤에는 동일한 일이 BTS 팬들 사이에서 일어날 것이란 뜻이다.
--
Power (2024)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