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래 난 자연과학에 기반하지 않은 사고는 기본적으로 신뢰할 수 없다고 여긴다. 물질에 기반하지 않은 것은 상상의 산물이다. 여기서 인문학은 대체 무엇을 하는 학문인지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인문학은 기본적으로 두 가지 방식을 택할 수 있다: 1) 상상을 정당화하는 학문, 2) 상상이 작동하는 방식에 관한 학문. 첫번째의 경우 인문학은 신화 혹은 순진한 의미의 신학과 동일한 것이 된다. 그러나 두번째의 경우 인문학은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 혹은 이데올로기의 작동방식에 대한 분석을 문화론의 형태로 다루게 된다. 첫번째의 경우 인문학에는 전혀 승산이 없다. 신화가 될 때 인문학은 미신으로 전락할 것이다. 두번째의 경우 인문학은 정당성을 지닌다. 그러나 스스로 정당성을 획득하지는 못한다. 주어진 허구가 작동하는 방식에 대해 분석을 할 수 있을 뿐 그 스스로 그 어떤 원리나 원칙도 개진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적극적으로 세상의 진리에 대해 이야기할 경우 인문학은 교조주의와 동일시될 것이다. 인문주의의 경우 인식하는 인간의 한계 내에서 세계를 이해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인간의 관점을 거친 것일 뿐 실제로 그러한 것이 아니다.
인간을 중심에 두고 사고하는 인문학 혹은 인문주의가 충분히 고려하지 않는 것은 인간 없이 스스로 존재하는 것, 즉, 자연이다. 인간만이 남게 될 때 모든 것은 상대적이 된다. '그건 네 생각일 뿐이야'라는 식으로 관점과 관점이 서로 대립하며 헤게모니 싸움을 하게 된다. 거짓 뉴스가 판을 치게 되고 아무 것도 믿을 수 없게 되어 세상이 난장판이 된다. 힘을 가진 자가 온갖 수단을 동원해 자기 입장을 관철하고자 할 뿐인 세계가 남겨지게 된다. 이쯤되면 인간적 관점의 외부로 나가는 일은 필수적이 된다. 인간의 외부에는 자연이라 불리는 물질계가 있다. 오늘날 인문학이 정당성을 잃어가는 이유, 반대로 자연과학이 승리하는 이유는 오늘날 비인간적 물질계를 다루는 학문이 자연과학이기 때문이다. 자연 자체로 돌아가는 방법은 두 가지다. 1) 인간 인식과 물질이 관념의 차원에서 하나된 것으로 여겨졌던 칸트 이전 형이상학으로 돌아가는 것, 2) 관념의 매개 없이 물질을 수량으로 다루는 해부학적 기계론의 세계를 전개하는 것. 오늘날 동시대 철학은 전자에 관심을 기울인다. 반면 자연과학은 당연히 두번째 경우에 속한다. 공통점은 양자 모두 인간적 관점의 한계를 건너뛰고자 한다는 데 있다.
21세기에는 인문학 또한 기본적으로 자연과학에 기반해야한다. 인문학을 자연과학으로 환원해야한다는 뜻이 아니다. 인문학은 자연과학이 한계에 이르는 곳에서만 발현되어야한다는 것이다. 이미 자연과학이 다 밝혀놓은 것을 가지고 다만 그것에 대해 공부하지 않아 알지 못한 상태에서 인문학이 가설의 차원에서 내놓는 이야기는 대부분 헛소리에 불과하다. 예컨대,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는 질문은 더 이상 철학적 논쟁거리 자체가 아니다. 자연과학의 관점에서 볼 때 당연히 먼저 생긴 것은 유전자다. 자기 복제를 행하는 유전자가 원시적 생명체의 차원에서 발생한 후에야 오랜 시간에 걸쳐 진화를 거쳐 닭이라는 개체 혹은 종이 나올 수 있게 된다. 여기서 구태여 따지자면 유전자 그릇 역할을 하는 것은 달걀이다. 그러나 닭보다 달걀이 먼저라고 말하는 것에는 오해의 여지가 있기도 하다. 유전자는 달걀 이전에 개체 혹은 종의 생식세포 안에도 있다. 생식세포 없이 달걀은 있을 수 없다는 뜻이다. 이렇게 되면 다시 무한 반복의 함정에 빠지게 된다. 진짜 요점은, 닭이냐 달걀이냐를 따지는 게 아니라, 개체 혹은 종라는 형태를 가지기 이전에 어떤 형태로든 유전자가 먼저 있어야한다는 사실을 보는 데 있다. 유전자가 발현되는 순간은 물질이 생명으로 도약하는 순간을 뜻한다. 유전자의 발생은 물질 내에서 질적 단절이 발생했다는 것을 뜻한다. 바로 이 질적 단절의 발생이 닭이든 달걀이든 그 모든 것에 유전자가 앞선다는 말의 의미다. 즉, 유전자의 발생 이전에 있는 것은 생명--닭 혹은 달걀--이 아니라 물질이다. 따라서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는 질문은 문제 설정 자체가 올바르지 않은 경우에 든다. 진화론이라는 관점이 없을 때에나 나오는 유사질문에 불과하다.
중요한 것은 유사질문을 두고 '철학적 질문'인 것처럼 착각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철학적 질문은 가장 최신의 자연과학 내에서만 가능하다. 즉, 최고의 과학자들이 봉착하는 난제에 가서야 가설의 차원에서 던질 수 있는 게 철학적 질문이다. 거꾸로 말하면, 최신의 자연과학을 공부하지 않은 사람이 던지는 질문은 철학적 질문일 수 없다. 그냥 잘 알지 못해서 던지는 유사질문일 뿐이다. 오늘날 철학자들이 영향력을 잃은 이유는 대부분의 질문이 과학에 기반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점에 종종 난 소위 인문학자라는 사람들의 자연과 물질에 대한 이해가 사실상 원시적 수준에 머물고 있다고 느낀다. 물론 나 또한 예외는 아니다. 내가 가진 과학지식은 지극히 제한적이다. 난 지금 과거 내가 받은 20세기식 인문학 교육의 특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역설적이지만 오늘날 철학을 가장 잘 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은 과학자다. 철학자가 아니다. (물론 난 그들이 전통적 의미의 철학적 개념을 사용할 줄 모른다고 느낀다. 이 부분은 과학자들이 배워야할 부분이다.) 대학의 철학과는 대부분의 과거의 철학을 역사적으로 다루는 분과일 뿐이다. 동시대 철학은 과학자들이 행하고 있다. 이 점을 알지 못한 채 오늘날 아직도 인문학이 동시대적 맥락에서 철학적 질문을 던질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은 순진한 발상에 불과하다. 이러한 변화한 학문의 조건을 고려하지 않는 인문학은 관심의 대상일 수 없다.
아래 영상의 화자인 앤듀르 후버먼은 신경과학자다. 신경과학이라는 말이 생소하다면 그냥 뇌과학자라고 이해해도 된다. 스탠포드 의대 교수다. 미국 지상파 토크쇼에도 등장하는 등 2020년 팬데믹 이후 셀럽 과학자가 된 사람이다. 우리 몸이 실제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상당히 자세하게 다루어준다. 키워드는 소금과 뇌다. 흥미롭게 들었다. 내가 몸소 겪어본 바를 정확히 설명해주기 때문이다. 상식과 달리 내 신체가 잘 작동하는 소금의 양은 하루에 7-8그램이다. 물론 소금과 소디움은 다르다. 소금 1그램에 소디움 0.39그램이 들었을 뿐이다. 그렇다고 해도 소금 7그램이면 소디움 2.7그램이다. 8그램이면 3.1그램이다. 이 정도를 섭취하지 않으면, 몸이 정상 작동하지 않는 것을 느낀다. 심각하지는 않지만 다소간 저혈압이 발생하며, 앉았다 일어날 때 현기증이 난다. 전반적으로 기력과 집중력이 떨어진다. 종종 다리에 쥐가 나기도 한다. 게다가 난 매일 30분씩 뛴다. 예컨대, 26도 정도의 기온에 30분을 뛰게 되면 대략 0.25에서 2그램까지 소디움을 잃게 된다. 이 기준에서 내가 하루에 섭취하는 소금이 하루에 7-8그램 정도다. 그 정도는 먹어야 몸이 정상적이 된다. 물론 땀을 적게 흘린다면 소금 5-6그램도 괜찮을 것 같다고 여긴다.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더 먹어도 문제되지 않을 것 같다고 느낀다. 그러나 또 다른 요소도 고려해야한다. 저탄수화물식을 할 경우 소디움은 더 쉽게 배출된다. 난 근래 하루에 당을 포함하여 탄수화물을 하루에 60그램 정도만 섭취한다. 아주 낮은 수치도 아니나 그렇게 높은 수치도 아니다. 이런 조건 속에서는 소금 섭취가 좀더 필요하다. 중요한 것은 내 정신 상태가, 내 자아 자체가 체내 소디움의 양에 따라 달라진다는 데 있다. 이렇게 말해보고 싶다: 내 자아는 짭짤하다. 내 신체가 충분히 짜지 않을 경우 내 자아는 실체를 잃고 사라진다. 생각하는 능력이 상실되면 자아가 있을 수 없다는 뜻이다. 자아는 정확히 물질로부터 발생한다.
이데올로기론, 문화론, 문화분석, 문화연구 등은 모두 인간이 어떻게 사실에 기반하지 않은 허상의 세계를 작동시키는지에 관한 논의다. 중요한 논의다. 그러나 이런 논의에는 더 이상 새로울 것이 없다. 거의 동어반복이 되고 있다. 근래 난 인간의 생각과 상관없이 물질 자체가 작동하는 방식에 관심이 있다. 20세기 동안 인문학자들이 경멸했던 기계론의 세계가 내 관심사이다. 지난 세기 인문학자들의 이야기를 잘 들어보면 그들이 기계론을 제대로 탐구하지 않은 채 그저 기계론을 비판하느라 바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재밌는 사실은 기계론에 대해서는 거부감을 표하면서도 유물론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여기는 인문학적 분위기가 또한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앞뒤가 맞지 않는 일이다. 기계론 없이 유물론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기계론을 제거하면 순수 관념론만이 남을 뿐이다. 헤겔이 자연철학에 깊은 관심을 보인 이유가 여기 있다. 그의 관념론은 전혀 순수하지 않다. 그의 관념론은 자연과학적 이해력에 기반해서만 작동한다. 헤겔 관념론의 기초는 자연과학적 유물론이다. 그러나 오늘날 이런 사실은 잘 인지되지 않는다. 다시 지난 세기를 떠올려보자. 저명한 20세기 문학비평가 중에 자연과학적 기계론의 세계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서 문학비평을 한 사람이 있었던가? 그들의 비평에 전혀 등장하지 않는 것이 자연과학이다. 인문학이 자연과학과 아무 상관이 없다는 식으로 살았던 20세기는 정말 기괴한 세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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