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불어닥친 '시티팝' 열풍(?)은 주로 '우리가 알지 못했던 세련된 과거의 재발굴'이라는 측면에서 이야기된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한가지 빠진 것이 있다. '시티팝 열풍'에 섹스 어필 댄스로 무장한 아이돌 음악에 대한 피로감과 반발심이 섞여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시티팝'은 춤을 추지 않아도 되는, 그리고 춤을 추는 것을 보지 않아도 되는, 듣는 음악의 귀환을 의미한다. 혹은, '랩'이 아닌, 따라부를 수 있는, '노래'의 귀환을 의미한다. 그리고, 샘플링된 전자 음악이 아니라 실제 악기 연주로 이루어진 '생음악'의 귀환을 의미한다.
이제 '시티팝' 열풍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해보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티비 속에서 흔들리는 골반을 바라보는 것도 이젠 지쳤다.' 물론, 여기에는 '골반' 이상의 것이 결부되어있다. 한 예로, 최근 불어닥친 'YG의 몰락'을 보라. 아이돌 음악의 선구자였던 그들의 몰락은 그간 숨겨져 온 YG라는 회사의 부정과 부패가 드러나며 찾아왔다. 즉, 그들의 몰락은 '힙한' 육체의 움직임 뒤에 숨겨져 있었던 그들의 도덕적 타락이 폭로되며 찾아왔다. 말하자면, 겉으로 보기에 방부처리된 그들의 힙한 육체가 속에서는 썩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들이 저지른 짓을 보고 있자면, '그들이 만들어낸 음악은 물론이고 그들과 관련된 그 모든 세계가 이젠 다 지겹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이것이 '이제 아이돌 음악은 낡았다'고 느끼기되는 한 가지 배경이다. 거꾸로 말하면, 이것이 '우린 새로운 것을 원한다'는 느낌을 일으키는 배경이다. 여기서 바로 그 새로움을 적시에 적절한 방식으로 구현하고 있는 것이 '시티팝'이라고 말해보고 싶다.
그러나 작금의 '새로움'을 이야기할 때 '시티팝'의 정서가 또한 전형적인 '중산층'의 정서를 체현하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시티팝'을 듣고 있으면 까진 아이들 혹은 양아치의 시대가 지나고 순진한 아이들의 시대가 다시 되돌아오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되지 않던가? 다시 말하면, 오늘날 '시티팝'에서 우리는 '중산층의 도덕적 삶'에 대한 향수를 느낀다. 이와 대조적으로 YG가 생산해낸 음악의 주된 스타일인 힙합 음악 혹은 랩 음악은 원래 중산층의 도덕성을 위선으로 여기던 하위 계급의 삶이 창출해낸 음악이었다. 여기서 중산층 음악과 하위 계급의 음악 사이의 관계를 볼 수 있다. 즉, 하위문화로서 힙합 음악이 날카로움을 가지고 사회 비판적 기능을 하려면 '도덕적 중산층'이 주류로서 사회의 권력을 쥐고있어야 한다. 한국 사회를 예로 들어보자. 한국에서 '도덕적 중산층'은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절 주류로 올라서는 발판을 마련했다. (물론, 이는 '그들이 또한 경제적 중산층이기도 했다'는 말과는 다소 차이가 있을 수 있다. 당시 도입된 '신자유주의' 정책이 경제적 중산층을 붕괴시켰다고 여겨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그 시절 경제 성장률은 대단히 높은 편이었다. 1998년 IMF로 인한 마이너스 성장이 있은 후이기는 하지만 1999년엔 11.3%라는 경제성장률을 기록했으며, 그후 2000년 8.9%, 2002년 7.4%라는 높은 성장률을 계속 유지하게 된다.) 그러한 배경 속에서 그 시절 힙합 음악은 하위문화 나름의 세련된 저항의 느낌을 낼 수 있었다. 당시가 한국의 1세대 힙합 음악이 발흥하던 시절이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문제는 이병박근혜 정권이 들어서게 되면서 상황이 바뀐다는 데 있다. '도덕성'과 '상식'을 가진 중산층 자체가 힘을 잃고 오직 야만적으로 돈과 권력만을 쫓는 타락한 보수-극우 세력이 득세하는 시절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즉, 이 시절에 오면 하위 계급의 저항성이 저항할 '도덕적 중산층' 자체가 사라지게 된다. 여기서 힙합 음악이 한국 대중 문화의 '주류로서 득세'하게 되는 것이 정확히 이명박근혜 시절을 거치면서라는 점을 볼 필요가 있다. 즉, 저항의 대상이 사라진 시절이 되고서야 힙합 음악은 한국에서 가장 '힙한' 음악이 된다. 어떤 면에서 이는 당연한 결과와 같이 보인다. 주류가 된다는 것은 그 자신의 비주류적-저항적 성질을 상실한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2010년대 초중반 힙합 음악은 가사의 내용에 있어 변화를 겪게 된다. 즉, 주류 사회와 불화하는 영혼이 드러나기보다는 대부분 "내가 제일 잘 나가" 혹은 '내가 이 바닥에서 최고야, 덤비지마'라는 요지를 담고 있는 자화자찬식 혹은 공격적 가사로 점철되게 된다.
외양의 층위에 있어서 힙합 음악이 형식적으로 계속해서 세련되게 발전한 것은 사실이다. 이를테면, 랩을 하면서 '박자를 가지고 논다'던가 '리듬을 씹어먹는다'던가 혹은 주절거린다는 의미의 랩을 하고 있지만 발음이 워낙 좋아서 '가사 전달력이 좋다'던가 하는식의 평가 기준들을 보라. 이 모든 것은 힙합 음악이 스타일과 형식에 있어서는 비약적인 발전을 했다는 뜻과 같다. 그러나 정작 그렇게 세련되게 발전된 음악적 형식 안에 담긴 내용은 아무 것도 없는 역설이 발생했다. 예컨대, 발음이 아무리 좋아서 '가사 전달력'이란 것이 있어봤자 그 안에 내용이 없을 때 대체 그것이 무슨 소용일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질문이 없었다. 그 결과 '겉멋'만이 남았다. 특히, 힙합 씬에서 강조된 것은 '내가 돈을 이만큼 많이 가졌다'는 식의 날것의 힘을 과시하고자 하는 메세지였다. 수억 원 나가는 자동차 보닛 위에 올라 앉은 모습을 보여주는 것보다 더 '힙한' 것도 없다고 여겨졌다. 이는 힙합 음악이 하위문화적 계급 저항성을 잃게 될 때 겉멋만 쫓는 '양아치 음악'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있다는 말과 같다. 하위문화의 껍질을 뒤집어쓴 주류가 등장하는 것이다.
사실 힙합 음악이 대중 음악계의 주류가 되는 방식에서 보게 되는 것은 한 극단이 다른 극단과 조우하는 방식이다. 조금 다른 맥락에서 말해보자. 하층민과 극우 주류 세력이 동맹 관계를 맺게 되는 경우는 실제로 정치 영역에서 적지 않게 벌어진다. 극우 세력이 정권을 창출하기 위해서는 가진 것 없는 자들을 부추겨 포풀리즘을 만들어내는 것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즉, 자생적 지지층을 지니기 어려운 이유로 극우 세력은 하위 계급을 돈과 권력으로, 그리고, 공작 정치를 통해, 유혹하고 부추겨야한다. '일베'의 경우를 생각해보라. 일견 그들은 과거 '디시인싸이드'에 모였던 사람들이 그랬던 것과 같이 하위문화적 감수성을 지닌 사람들인 것 같이 보인다. 온갖 비주류적으로 발칙한 발언과 행위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그 둘은 전혀 다르다. 일베의 경우 타락한 과거 군사 독재 정권의 하수인과 같은 면모를 보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들의 뒤에는 항상 '어둠의 주인님'이라 할 만한 것의 그림자--예컨대, 그들이 '전땅크'라고 모시는 전두환이라는 '주인님'의 그림자--가 존재한다. 이들의 문화가 자생적 하위문화가 아닌 이유가 여기 있다. 이는 그들이 특정 세력에게 매수되었다는 의미와는 다른 이야기다. 그보다는 정신적 층위에 있어서 그들이 '어둠의 주인님'의 '종' 행세를 한다는 뜻에 가깝다. 예컨대, [반지의 제왕]에서 많은 하수인들이 사우론을 은밀히 숭배하고 모시듯 말이다. 따라서 이들이 보여주는 것은 과거 '비주류 하위문화'라고 여겨졌던 것이 타락한 권력자에 의해 동원되는 21세기적 방식에 가깝다. 또 다른 사례가 워마드라는 집단에게서 발견된다. 그들이 어떻게 페미니즘이라는 허울을 내세워 일베식으로 문재인 정권을 조롱했는지 보라.
그러나 일베와 워마드의 경우가 그렇게 참신한, 듣도 보도 못한 사례인 것만은 아니다. 사실 여기에는 전통이 있다. 자한당을 보라. 헌법 파괴 당사자에 다름 아닌 그들이 마치 소수자라도 되는 듯 문재인 정권이 하는 모든 일에 대해 '헌법 질서 유린'이라고 비난을 가한다. 혹은, 독재 정권의 계승자인 그들이 문재인 정권을 향해 '독재 타도'라는 말을 외친다. 이 얼마나 뻔뻔스러운 가짜 혁신이란 말인가. 이러한 전통이 있는 한 워마드니 일베니 하는 현상은 별로 놀랄 일도 아니다. 태극기 부대는 또 어떤가? 전적으로 돈으로 동원되는 죽은 시체와 같은 노인 집단인 태극기 부대가 일말의 생명력을 얻어 하위문화의 허울을 자생적으로 생산하게 될 때 나오게 될 것이 일베나 워마드와 같은 집단이지 않은가? 즉, 전자와 후자의 차이는 후자의 집단은 아직 젊어서, 구태여 돈을 주고 매수를 하지 않아도, 하위문화를 참칭해가며 알아서 스스로 움직일 자생력이 조금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둘 사이엔 근본적 차이가 없기도 하다. 가진 것 없는 노인들을 돈으로 매수하는 것이나 젊은이들의 불만을 자극하는 것이나 둘 모두 극우 세력이 정권을 창출하기 위해 사용하는 일반적 방식이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권의 등장은 바로 이 타락한 시절이 끝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중음악사적 관점에서 말해보자면, 촛불 혁명을 통해 새로운 정권이 창출되게 되는 일련의 과정은 이미 예전에 서브컬쳐를 상실했던 주류 힙합 음악이 실은 어느 순간부터 돈과 권력만을 쫓는 양아치들의 음악에 다름 아니게 변해있었다는 사실을 대중들이 뒤늦게 인지하는 과정과 같다. 이를 조금 더 선언조로 말해보자: '힙합 음악은 더 이상 힙하지 않다. 아무리 폼을 잡고 멋지게 춤을 추어봤자 이제 힙합 음악은 그저 예스럽고 촌스럽게 들릴 뿐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새로운 것은 어떤 것인가? 오늘날 '힙한' 것은 1980-90년대식 '시티팝'이다. 1980-90년대가 2010년대보다 힙하게 들리는 일이 벌어지다니, 놀랍지 않은가? 이 관점의 전환이 촛불 혁명이 대중 음악계에 가져온 변화이지 않은가?
이제 한 걸음 더 나아가보자. '시티팝'이 들려주는 정서가 가능하려면 경제적 풍요라는 배경이 있어야한다. 살랑거리는 바람이 불어오는 해변이나 대도시의 저녁 가로등 아래 서서 홀로 고독하게 그러나 쾌적하게 주변 경치를 감상하는 도시인의 이미지가 가능하려면 경제적 안정이 배경이 있어야한다는 뜻이다. 먹고 살기 힘들 때 대도시의 저녁 가로등 빛은 유쾌한 고독을 선사하는 배경이 아니라 삶에 찌든 무명의 노동자가 자살 충동을 느끼게 되는 무정한 거리의 배경일 뿐이다. 다시 말하면, '시티팝'이 중산층의 음악인 것은 그것이 경제적 풍요에서 오는 부유하고 여유로운 마음을 담고 있다는 뜻과 같다. 현정부의 '소득주도성장' 정책을 보라. 그것은 한국 사회 내 중산층을 외연을 넓히기 위한 (최소한의) 조치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실제로 최근 대부분의 경제 지표가, 극우보수 언론의 경제 지표 왜곡에도 불구하고, 나아지고 있다. 그러한 경제 구조의 변화는 '도덕성'을 지닌 중산층이 되살아날 가능성을 보여주지 않는가? 또한 그에 따라 그들의 감수성에 맞는 새로운 대중 문화가 또한 필요해질 것임을 예상케 하지 않는가? 그러한 의미에서 힙합 음악은 그들에게 해답일 수 없지 않은가? 이 지점에서 그들에게 걸맞는 첫번째 음악적 결과물이 '시티팝'이라 말해본다면 어떠할 것인가?
물론, 역사가 말해주는 것 중 하나는 중산층의 '도덕'을 위선으로 비판하는 것이 너무도 쉬운 일이더라는 것이다. 그것이 하위문화가 나오게 되는 배경이다. 즉, 하위문화는 중산층의 위선을 폭로함으로써 작동한다. 그러나 여기서 하위문화가 행하는 중산층의 위선에 대한 '통찰'이란 것은 보다 조심스럽게 다루어야져야 할 문제다. '중산층 비판'은 일견 통찰력 있는 듯이 보이는 논리다. 예컨대, 문재인 정권에 대한 지지를 양비론 혹은 양시론의 논리로 무마하려는 시도를 보라. 그들은 아주 점잖고도 논리적으로 이렇게 말한다: "무조건 어느 쪽이 옳다 그르다가 아닙니다." 멋지지 않은가? 실제로 과거 1990년대 후반 및 2000년대 초반, 즉, 김대중-노무현 정권 시절에 많은 '비판적 지식인'들이 이러한 '나는 누구의 편도 아닙니다. 나는 오직 진실의 편입니다'라는 자세를 취했다. 그러나 만약 '진실'이란 것이 정확히 현실 속 특정 입장을 취함으로써만 구현되는 특성을 지닌다면 어찌할 것인가? 더 나아가 만약 '중립적'이라 여겨지는 '보편'이 실은 이미 특정한 현실적 입장에 기반하고 있는 것이라면 어찌할 것인가? 예컨대, 역사의 현재 국면에서 문재인 정부 지지자가 '중립적 진실'을 내세우며 문재인 정부를 비판하기 시작할 때 그 무너진 결속을 가장 기쁘게 받아들일 자들은 바로 극우 세력이지 않은가? 즉, '중립적 진실'의 견지에서 이야기했을 때 결과적으로 극우 세력이 그 이득을 취해 정권을 잡는다면 그 입장은 전혀 '중립적'이지 않은 것이지 않은가? 말하자면, 그것은 '중산층의 위선'을 '모든 것이 위선일 뿐이니 이제 대놓고 위선자가 되자'는 놀라운 주장으로 바꿔치는 일에 다름 아니지 않은가? 그것이 이른바 '노무현 정권의 위선'에 실망한 나머지 도덕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희대의 사기꾼인 이명박을 대통령으로 뽑게 되었던 과정에 다름 아니지 않은가?
그런 의미에서 한국 사회의 미래는 문재인 정부가 보수 정부로서 자리매김될 수 있을 것이냐에 달렸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시 말하면, 무슨 일이 있어도, 혹 문재인 정부가 다소간 실수하는 경우가 있더라고, 그들보다 더 뒤로 갈수는 없다고 여겨질 때, 즉, 문재인 정부가 내세우는 가치들이 우리 사회의 지켜내야할 보수적 가치라 여겨질 때 비로소 한국 사회는 이른바 '선진국의 지위'를 확고히 하게 될 것이다. 대중 음악의 언어로 말해보자. 사실, '시티팝'은 보수적 음악이다. 살랑살랑 불어오는 저녁 바람 맞으며 고독하게 그러나 기분 좋게 가로등 아래 서서 대도시, 예컨대, 서울의 풍경을 즐길 수 있는 사람이 되려면 괜찮은 직장과 행복하게 같이 살아갈 가족 등 많은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를, 예컨대, '중산층의 가족 이데올로기'라고 비판하는 것은 너무 쉬운 일이다. 그러한 일은 벌써 옛날에, 1990년대에, '비판적 지식인'들이 이미 다 하지 않았던가? (표준화된 '행복한 가족'의 가식과 허울을 예술적으로 섬세하게 비판한 최근 사례로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2018년작 [어느 가족]이란 영화가 있기도 하다.)
'시티팝'이 담아내는 정서는 태생상 그 한계가 명확하다. 지금 단계에서는 새롭고도 오래된 미래와 같이 들리지만 머지않아 구태가 될 것이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그 한계가 인지되기 시작할 때 어떤 음악을 '새로운' 것으로 들을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데 있다. '시티팝'이 고리타분하게 들리기 시작할 때 다시 우리는 '부분 대상'을 짜릿하게 내세우지만 실은 '섹스 산업'을 부추길 뿐인 '내가 제일 잘나가'라는 가사의 음악을 탐닉할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소수적 음악을 예술적 관점을 통해 들을 준비가 되어있을 것인가? 이는 봉준호 감독이 칸에서 황금종려상을 탄 이후 한국 문화가 나아가야할 방향은 무엇이 되어야할 것이냐는 질문과도 같다. 봉준호 감독이 한국 대중 문화의 정점으로서 앞으로 우리에게 남은 것은 보수화이고 하락일 것인가? 아니면 그의 성취는 우리 한국 사회가 지닌 역량에 비할 때 당연한 것이며 앞으로 한국 대중 문화의 기본 바탕이 되어 더 나은 문화적 결과물을 계속해서 낳는 시발점이 될 것인가?
* 잡담: 아래 뮤직비디오의 영상에서 흥미로운 점은 많은 장면이 1990년대 일본 애니메이션이 차용해온 것들이란 사실에 있다. [바다가 들린다]가 한 예다. 물론, 해당 애니메이션의 '짤'은 대부분 유튜브 '칠-합' 음악 모음집 영상 등에서 사용되었던 것들이기도 하다. 뮤직비디오 제작자들이 유튜브에서 벌어지는 일들에게 촉각을 곤두세우며 살고 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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