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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동의 [버닝]: "항상 너만을 사랑해" vs. "내가 제일 잘 나가"

by spiral 2019. 6. 22.

아래 링크된 지퍼의 곡, "내가 사랑하는 그녀는"에 대해 잠깐 이야기해보고 싶다. 개인적으로 어렸을 적 좋아했던 노래다. 지금 시점에서 듣고 있으면, 순진함이 남아있어 여전히 마음이 가는 곡이라고 말하고 싶어지는 곡이다. 여자의 마음이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하는 20대 초반 남자 아이의 어리숙한 풋사랑의 정서를 잘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여자의 쌀쌀맞은 태도 앞에서 풀리지 않는 미스테리를 느끼며 의기소침해지다가도 결국에는 "변하지 않는 게 있어. 항상 너만을 사랑해!"라고 소리치는 부분을 보라. '순진무구함'이란 미스테리를 사랑이라는 이름의 결심으로 승화하고자 하는 태도를 뜻한다.

언젠가부터 한국의 대중 가요에서 찾아보기 어렵게 된 것의 하나가 바로 지퍼의 곡이 보여주는 순박함이다. 2010년대를 지나면서부터는 모두가 "내가 제일 잘 나가"라고 말하기 바빠졌을 뿐이었다. 혹은, '내가 모든 걸 다 알고 있다'는 식의 정서가 팽배했다. 노래도 제일 잘 하고, 춤도 제일 잘 추고, 옷도 제일 잘 입고, 가장 좋은 차를 타고, 몸도 제일 좋고, 여자도 혹은 남자도 제일 잘 알고, 잘 놀 줄 알고, 마약도 누구보다 잘 하고, 섹스도 누구보다 잘 하고, 기타등등, 잘난 척, 쿨한 척, 힙한 척하는 세상이 음악 씬을 휩쓸고 지나가지 않았던가? 그러나 근래 우리는 그 힙한 세상의 결실을 YG라는 제국의 몰락을 통해 극적으로 확인하고 있다. 그들이 이룬 '업적'이 '양아치 문화의 대중화'에 다름 아니었을 뿐이라 느끼는 것은 더 이상 한 괴팍한 개인의 과장된 반응이 아니다.

이창동의 [버닝]으로 가보자. 오늘날 노동자 계급의 20대가 겪는 '삶의 미스테리'가 어떠한 것인지를 잘 그려내고 있는 영화다. 즉, 오늘날 20대의 순진무구함은 '요즘은 일과 놀이가 구분되지 않거든요'라고 말하며 포르쉐를 타고 다니는 상류층의 삶 앞에서 계층의 차이를 느낄 때 겪게 되는 '미스테리'의 형식을 취한다. 물론, 포르쉐를 타고 다니는 상류층 벤이라는 인물의 삶이 노동자 계층 20대인 종수에게 일으키는 '미스테리'는 그에게 단 하나 남은 '여자'(해미)라 불리는 '미스테리'를 포르쉐를 탄 남자인 벤이 삼켜버린 결과이기도 하다. 이렇게 말해볼 수 있지 싶다: 1998년 지퍼라는 음악가에게서 "그렇지만 변하지 않는 게 있어: 오직 너만을 사랑해"라고 터져나오던 순진무구함이 2019년에 오면 "요즘은 일과 놀이가 구분되지 않거든요"라는 '구글적 삶' 혹은 '유튜버적 삶'이 내보이는 순진무구함으로 대체된다.

그러한 이유로 벤에게 '해미'는 전통적 관점에서 삶의 미스테리를 체현하는 존재인 '여자'로서 중요하지 않다. 그에게 '해미'는 그저 스쳐 지나가는 장난감과 같다. 그가 연쇄 살인마로 그려지는 방식이 그것을 증명하지 않는가? 즉, '해미'는 그의 흥미를 돋우는 열련의 여성 수집품 중 하나일 뿐이다. 그의 집 화장실 내 서랍장에 모셔진 여러 여성 장신구들이 그러한 것처럼 말이다. 물론, 그곳에 모셔진 장신구들은 전부 그가 수집한 여성을 기리기 위한 전리품과 같다. 여성을 살해하기 전 여성의 얼굴에 손수 화장을 해주는 것으로 전리품을 수집할 마지막 단계를 마무리하는 벤의 모습을 보라. 이것이 바로 '일과 놀이가 하나되는 삶'의 진실이지 않은가? 이것이 바로 '잘 놀 줄 아는' '내가 제일 잘 나간'다고 믿는 가수가, 예컨대, '포주'로서 '여자'를 대하는 방식의 진실이지 않은가? 이것이 1998년 지퍼로 하여금 "오직 너만을 사랑해"라고 선언하도록 만들었던 '미스테리'가 '여자'로부터 사라질 때 2019년에 일어나는 일이지 않은가? 즉, '육체 뿐인 여자'란 '미스테리'가 사라진 날것의 육체, 고깃덩어리 육체를 뜻하지 않는가? 이것이 '오직 너만을 사랑하'는 자의 '순진한 시선'을 쿨하지 못한 것으로 여기며 '내가 제일 잘 나가'라고 대꾸하는 '양아치 육체'의 진실이지 않은가? 

따라서 [버닝]에는 하나 더 확인해야 할 것이 있다. 영화의 결말이 그것이다. 영화의 결말을 확인하기 전에 잠시 영화의 결말이 무엇에 대한 결말인지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영화의 중간 종수는 이렇게 말한다: "저한텐 세상이 수수께기 같아요." 영화의 주제를 담아내는 문구다. 지퍼의 가사로 치자면, "내가 사랑하는 그녀는 모두에게 잘 해주지만, 우, 나만 보면 투덜대는지 정말 모르겠어. 내가 사랑하는 그녀는 어딨는지 알 수가 없어"에 해당하는 말과 같다. 실제로 종수는 해미 앞에서 바로 이 순진무구한 태도를 보인다. 해미가 아프리카로 여행을 떠난 후 텅빈 그녀의 방에 가서 수음을 하는 장면을 보라. 종수에게 해미는 택배 기사로서 살아가는 종수의 텅빈 삶을 의미론적으로 완성하여 채우는 존재, 즉, '판타지'의 존재다. 달리 말하면, 이것이 그가 '해미'를 통해 비로소 영화의 마지막에 '소설', 즉, '픽션'을 쓰는 데 성공하게 되는 이유다. 말할 것도 없이 이것이 전통적으로 '여자'가 '남자'에게 의미했던 바다.

여기서 사실 소설 쓰기라는 요소만 강조할 경우 [버닝]이 전형적인 1980-90년대 '티비 문학관'식 영화로 전락할 여지가 있다는 점을 보아야한다. 달리 말하면, [버닝]은 소설을 쓰는 문학가에 관한, 즉, 소설을 다만 영상화했을 뿐인 영화가 될 수도 있었다. 실제로 [버닝]은 하루키의 단편 소설을 원작으로 삼고 있기도 하지 않은가? 바로 이 전통적 요소를 뒤틀며 영화를 21세기적으로 '세련되게' 만드는 것이 '벤'이란 인물이다. 즉, [버닝]의 요점은 '티비 문학관'에 다름 아닌 '영상화'된 소설을 어떻게 '영화화'할 것인가에 있다. 그런 의미에서 '벤'은 유튜브로 대변되는, 혹은, YG로 대변되는 오늘날의 대중 문화 및 대중 음악이 전통적 소설가의 삶에 침투하여 그들의 삶을 교란하는 방식을 보여준다. 여기서 종수에게 있어서 '해미'로 대변되었던 미스테리의 양상이 뒤틀리게 된다. 그 결과가 바로 앞서 소개한 종수의 대사다: "저한텐 세상이 수수께기 같아요."

이렇게 말해볼 수 있지 싶다: 오늘날 21세기에 육체 노동자가 결코 이해하는 못하는 것은 단순히 '아름다운 여자'이지 않다. 오늘날 육체 노동자가 진실로 알 수 없는 미스테리는 '일과 놀이가 하나된 유튜브적 삶'으로서의 '세상' 자체다. 20년 전 어깨 위 짊어진 무거운 짐을 나르는 남성적 육체 노동이 이해하지 못했던 것은 육체 노동과는 거리가 먼 '아름다운 여자'였다. 반면 오늘날 택배 노동자가 알지 못하는 것은 육체 노동이라고는 모르는 멋진 외양으로 치장된 (아름다운?) 유튜버의 삶이고 티비 속 연예인의 삶이다. 다음과 같은 무의식에 대해 생각을 해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유재석이 똑똑한 사람이고 또 무척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에 대한 대가가 수백 억원의 재산이어야만 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미스테리를 느낀다. 혹은, 우리는 메시가 축구를 무척 잘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 대가가 수천 억원의 재산이어야만 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미스테리를 느낀다.

[버닝]의 결말은 종수가 마주하게 된 삶의 새로운 미스테리, 즉, '일과 놀이가 하나된 삶'이라는 미스테리를 푸는 방식을 보여주기 위한 것에 다름 아니다. 결말은 간단하다. 종수는 벤을 칼로 찔러 살해한다. 그것도 아주 잔혹하게 반복적으로 찔러서 죽인다. 그리고 구글적 삶의 상징과 같은 '포르쉐'를 태워버린다. 어째서 그러한가? 그것이 해미에 대한 복수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일과 놀이가 하나된 삶'이라는 '구글적 축복' 혹은 '구글적 미스테리'가 종수 입장에는 '부조리'로 경험되었다는 뜻이다. '여자' 때문에 살인 행위를 동반하는 치정 사건이 일어나는 것은 유사이래 인류 사이에서 얼마든 가능한 일로서 받아들여져 왔다. 오늘날 달라진 것은 이제는 '치정'이 '여자 이상의 것'을 의미한다는 데 있다. 오늘날 '여자'라는 미스테리를 삼켜버리는 것은 '일과 놀이가 하나된 삶'으로서의 '대중 문화' 자체다. '여자'를 얻고 싶다면, 소설가가 되어 픽션을 쓰는 것보다, '스타 유튜버'가 되는 편이 훨씬 더 쉬운 방법이라는 뜻이다. 다만, 수집품으로서 말이다. 이른바 '버닝썬 사태'라는 것을 다시 한번 떠올려보라. 그 핵심은 그곳에서 여자는 '물뽕'으로 마취시켜 가지고 놀 '한낱 육체'일 뿐이었다는 사실에 있었다.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보고 싶다: 영화의 중반 종수는 어째서 벤을 상대로 그가 정말로 비닐하우스를 태웠는지를 놓고 논쟁을 벌이는가? 농부의 아들인 종수 입장에서 비닐하우스는 태워주기를 바라며 무의미하게 들판 위에 서 있는 놀이의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노동의 터전이며 삶의 터전이다. 그러나 벤에게 그것은 방화 놀이의 대상일 뿐이다. 따라서 종수가 '포르쉐'를 불에 태울 때 그것은 노동의 터전인 비닐하우스 및 노동하는 인간의 육체를 태우는 '버닝썬'식 불장난에 대한 복수라 할 수 있다. 여기서 비닐하우스에 관한 대사만이 영화 중 유일하게 벤이 자신의 내면을 드러내는 부분이기도 하다는 점을 보아야한다. 사실 그 이외의 부분에서 벤은 자기 자신에 대해 그 어떤 언급도 남기지 않는다. 그의 비닐하우스론 이외의 부분에서 그의 존재는, 오늘날 유튜버의 삶이 많은 전통적 육체 노동자의 눈에 그렇듯, 구름 속에 떠도는 것과 같은 모호함으로 가득할 뿐이다. 여기서 노동자인 종수는 비닐하우스라는 대상을 통해 잠깐 드러나게 된 벤의 영혼을 놓치지 않고 파고든다.

비닐하우스를 두고 벤과 논쟁 아닌 논쟁을 벌이는 종수 입장에서 중요한 것은 벤의 영혼에 과연 물리적 실체가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이다. 만약 그가 정말로 그저 재미로 비닐하우스를 태우는 자라면 그것은 그의 실체 없는 구글적 존재가 노동자가 발딛고 있는 노동의 실체--비닐하우스는 농부에게 삶의 터전이다--를 파괴하는 자라는 뜻으로서 그의 존재는 결코 용납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즉, 그런 자라면 복수 행위를 통해 살해되어야 마땅하다. 아울러 그가 비닐하우스를 태운다는 것은 그가 그 안에서 해미와 재미를 본 후 그녀를 태워 죽였다는 뜻이기도 할 것이니 더욱 용서가 될 수 없다. 반면 만약 종수 자신이 온 동네를 돌며 확인했듯 그가 비닐하우스를 태우지 않았다면 그것은 벤이 그저 말로 잘난 척이나 하는, 실체가 없는, 허풍선이 같은 자라는 뜻일 것이기에 그를 가볍게 무시해도 좋을 것이다.

종수의 결론은 벤이 비닐하우스를 태웠다는 것이다. 해미가 빠졌던 우물은 실재했고, 고양이는 보일이 맞았다. 그리고 벤은 종수가 해미에게 선물로 주었던 손목시계를 전리품으로 모셔두고 있었다. (이렇게 말해볼 수 있지 싶다: '구글적 삶'은 노동하는 삶을 태워 없앤 결과다. 놀이와 일이 하나된 삶을 추구하는 구글이야말로 '노동자의 적'이다.) 적어도 이것이 종수가 믿는 바이다. 그래서 그는 벤을 잔혹히 살해한다. 그리고 마침내 소설 쓰기에 성공한다. 벤을 제거함으로써 종수는 자신의 판타지에 살을 붙이는 데 성공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픽션 작가로서 소설가가 탄생하는 방식이다. 즉, 이것이 그가 죽은 '해미'를 다시 살려내는 방식이다. '해미'는 마침내 소설가 종수에게 '뮤즈'가 되어 되돌아온 셈이다. 이것이 유튜브 시대에 문학이 행하는 피비린내 나는 복수가 아니라면 무엇일 것인가? 그렇다면 마침내 우리는 'YG의 몰락' 이후 지퍼의 노랫말을, "항상 너만을 사랑해"라는 노랫말을 다시 듣게 된 것인가? 맞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점은 우리가 다시 지퍼의 노래를 같은 방식으로 들을 수는 없다는 데 있다. 이제 지퍼의 순진무구한 소년 같은 노랫말, "항상 너만을 사랑해"가 "너를 빼앗으려 하는 자를 칼로 찔러 죽여서라도"라는 배경 속에서 섬찟하게 들려오게 되었기 때문이다. 해미를 사랑한다는 종수의 고백이 벤 앞에서 어떻게 두번 반복되는지 기억하라. 마리화나를 한 상태에서 처음 그는 벤에게 어리숙하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해미를 사랑하고 있어요." 그의 중대 발표 앞에서조차 코웃음치며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는 벤에게 종수는 다시 한번 반복하여 이렇게 말한다: "이 씨발, 난 해미를 사랑한다고!" 이것이 한 여자에 대한 순진한 사랑이 살인 행위으로 반복되는 방식이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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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gazine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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