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에 불어닥친 'YG의 몰락'에 상응하는, 즉, 그들이 대변해온 낡아빠진 '잘 노는 까진 아이들'의 음악을 대체하는, 새로운 음악적 결과물을 찾으려 한다면 어떤 음악을 예로 들어볼 수 있을까? 아마도 아래 링크된 것과 같은 곡을 제시해볼 수 있지 싶다. 죠지란 가수의 "바라봐줘요"라는 곡이다. 요점은 아래 곡이 1990년대 '착한 정서'의 재림과 같이 느껴진다는 데 있다. 1993-4년 경으로 돌아가 티비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듣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든다. 혹은, 근래 유튜브에서 유행한 '1980-90년대 시티팝'이라는 트렌드가 동시대 대중 가요로 거꾸로 반영된 결과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아래 곡의 뮤직비디오 내 장면 설정을 보라. 대부분의 장면이 도시적 풍경을 담는 데 할애되어 있다. 사람이라고는 한 명이 나올 뿐이고 그것도 음영 속에 갇혀있다.
이번에는 조금 다른 맥락에서 동시대적 평가를 한번 해보자: '2014년경 자이언티에게서 받았던 느낌을 2019년에 죠지가 준다.' 사실 당시 내 입장에서 자이언티가 신선했던 이유는 그가 G-D식 자화자찬풍 음악과 정반대되는 따뜻한 정서의 음악을 세련된 언어로 풀어내놓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맥락에서 아래 죠지는 자이언티의 2019년식 업데이트와 같이 들리는 면이 있다. 무엇이 업데이트되었다는 뜻인가? 아마도 유머이지 싶다. 폼 잡는 면보다 숨김 없이 보여주는 면이 좀더 강하다는 뜻이다.
여기서 잠시 YG 음악 및 아이돌 음악 일반의 특징이 어디에 있었는지 생각해보자. 그들의 특징은 언제나 관중을 상대로 쿨하게 보여야한다는 강박에 시달린다는 것이다. 혹은, '잘 노는 아이'라는 사실을 증명해야한다는 강박에 시달린다는 것이다. 그런 그들이 인간적 면모를 노출할 수 있을리가 없다. 항상 '잘 놀줄 알아야한다'고 혹은 '즐길 줄 알아야한다'고 엄하게 훈육하고 교육하는 아버지 'YG'가 보고 계시지 않던가? 대체 이 무슨 역설이란 말인가? '내가 잘 노는 아이가 아니다'라는 사실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아야한다니? 얼마나 많은 그의 연습생들이 '넌 즐기지 않고 있어'란 말 앞에서 주눅들고 스트레스를 받았던가? 그것은 마치 '대체 왜 나는 섹스를 즐기지 못하는가?' 혹은 '어떻게 하면 섹스를 잘 할 수 있나?' '어떤 선배님의 지도를 받으면 섹스를 즐길 수 있게 될 것인가?'와 같은 질문이 한 젊은이의 인생 최대 철학적 고뇌로 등극하는 순간과 같지 않은가? 여기서 보게 되는 것은 '일과 놀이가 하나되는 구글적 축복'이기는커녕 '놀이'가 그 자체 그저 힘들어서 하기 실은 '일'이 되어버리는 역설이다. 물론, 지금 와서 알게 되는 사실은 '넌 즐기지 않고 있어'란 말이 '넌 너무 모범생이야, 우리 양아치 가족의 일원으로 인정받기 힘들겠어'라는 '데스노트'를 알리는 코드명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감히 '난 사실 놀 줄 모르는 사람'이라고 유머러스하게 인정할 수 있단 말인가? (이 점에 있어 YG 역사상 가장 저항적이고 발칙한 일을 저지른 것은 자신이 놀 줄 모르는 아이라는 점을 인정하고 회사를 자발적으로 뛰쳐나간 남태현이지 않은가? 그가 인정한 것은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그가 '위너'가 아니라 '루저'였다는 것이지 않은가? 그러나 그가 YG 역사상 가장 주목할 만한 일을 한 것은 바로 '루저'로서였지 않은가?)
2014년경 자이언티의 음악은 아이돌 음악의 연출된 특성에 대한 약간의 안티테제를 제공했다. 그의 "양화대교"란 곡의 가사를 보라. 자이언티 자신의 초라한 어린 시절 이야기를 자전적으로 들려주고 있다. G-D라면 죽었다가 깨어나도 들려줄 수 없는 가사이지 않은가? 그러나 다른 한편 자이언티의 특징 중 하나는 항상 "까만 선글라스"로 그의 우스꽝스러운 눈을 가려야한다고 여긴다는 데 있기도 했다. 그런 그가 후에 YG 산하의 레이블과 계약을 하게 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물론, 그는 방송 등 공개석상에서 '선글라스를 까고' 본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그의 어딘지 모자란 눈초리를 드러낼 때 우리 시청자들부터 '썬그라스' 뒤에 숨은 진실을 차마 보고 싶지 않다고 느끼는 역설에 빠져들지 않았던가? 우린 그의 눈을 보고 싶어하면서도 동시에 '제발 그 눈을 가려줘'라고 느끼지 않았던가? 무슨 뜻인가? 이는 우리가 YG식 세계에 너무 길들여져 망가진 현실을 직시할 유머를 상실해가고 있었다는 것과 같다. 죠지란 가수가 흥미로운 이유가 이와 관련이 있다. 그는 일상 속 우스꽝스러운 그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데 별로 개의치 않는다. 다시 말해 그는 별로 멋있어 보이고자 하지 않는다.
'멋있음'의 최고봉을 달리는 가수인 '딘'(Dean)과 '죠지'(George)를 비교해보자. 무엇보다, 둘 다 비슷하게 영어식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 '힙한' 이름들이지 않은가? 마치 미국에서 살다가 온 사람들 같다. 그러나 '죠지'라는 이름에는 이미 어딘지 이상한 구석이 있다. 왜 '조지'가 아니라 '죠지'인가? '죠지'는 '조지'의 1980년대풍 한국식 영어 이름이지 않은가? 게다가 그의 설명에 따르면 '죠지'라는 이름은 그가 한국의 영어학원을 다니다 얻은 이름일 뿐이다. 편해서 사용하는 것일 뿐이다. 여기서 바로 이 '레트로 감성'이 사실 '죠지' 음악의 핵심이기도 하다는 점을 보아야 한다. 어떠한 시점에서 들으면 그의 음악은 마치 '딘'이 내놓을 법한 쿨한 음악인 듯 들리는 면을 분명 지니고 있다. 예컨대, '죠지' 또한 래퍼이고 트렌디한 랩을 얼마든 들려줄 역량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어느 순간 보면 그는 아래 "바라봐줘요"라는 곡에서처럼 1980-90년대풍 레트로 감성을 들려주고 있다. 혹은, "보트"라는 곡의 뮤직비디오가 보여주는 것과 같은 '덜떨어진 유머'를 참지 못하고 드러내고야 만다. 무슨 뜻인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보고 싶다: 'YG의 몰락' 이후 도래할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가수는 '죠지'인가 '딘'인가? 내 답변은 '죠지'라는 것이다. 어째서 그러한가? '딘'에게는 한 가지 큰 결점이 있다. 그는 너무 멋있다. 게다가 그는 잘 생겼다. 안타깝지만 그렇게 멋있어서는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인물일 수가 없다. 역설적이게도 멋진 그는 지나간 시대의 인물이다.
아래 죠지의 "바라봐줘요"라는 곡에 대한 개인적인 감상을 조금 덧붙여보고 싶다. 아래 곡을 듣고 있으면 마치 다시 10대 시절로 돌아간 듯이 느낀다. 그러나 이는 과거의 추억이 떠오른다는 이야기만이 아니다. 그보다는 지금 20대 초반의 가장 예민한 감수성을 지닌 음악가가 내 마음이 공명할 수 있는 음악을 내놓고 있다는 것이 요점이다. 그러나 여전히 불충분한 설명이다. 이번에는 조금 어렵게 다시 말해보자: 아래 곡을 들을 때 난 '죠지'라는 친구의 노래하는 자아가 위치한 시간적 차원으로 내 청자로서의 자아가 옮겨져 위치하게 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것이 그의 곡을 듣는 것이 단순히 추억 여행이지 않은 이유다. 왜냐하면 그의 노래를 통해 노래를 듣는 내 자아가 2019년에 위치한 그의 육화된 시간 자체를 경험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한 연유로 "바라봐줘요"를 듣는 내 마음은 1990년대라는 시간 속에 위치한 내 10대 시절 육체로 돌아가지 않는다. 거꾸로 1990년대에 위치한 듯 여겨지는 내 마음이 2019년을 사는 '죠지'라 불리는 20대 젊은이의 육체 속으로 들어간다. 이 무슨 괴상한 소리란 말인가? 익숙한 용어로 말해보자: 이것이 '공감'이라는 낡은 용어가 묘사하고자 하는 상황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난 이를 처음부터 '공감'이라는 한 마디 단어로 설명하지 않은 것인가? 그 이유는 오늘날 문학 비평의 영역에서 '공감'(sympathy)과 구분하여 '정동'(affect)이라는 말을 새롭게 사용하고자 하는 맥락과 관계가 있다. 말하자면, 아래 곡을 들을 때 난 '죠지'의 '도덕적 자아'와 공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 나는 그의 음악에 영향을 받아 그의 육체적 정서 자체를 관계론적으로 공유한다. '공감'과 달리 '정동'이라는 말이 '몸을 공유한다'는 의미를 지니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의 음악을 듣는다는 것은 노래하는 그의 몸을 공유한다는 것을 뜻한다. 변태적이고 음흉한 이야기처럼 들리지 않은가? 그의 음악을 들으며 그의 몸을 나눈다니? 그러나 기대와 달리 내 요점은 '섹스 어필'과 정반대되는 지점에 위치한다. 어째서 그러한가?
여기서 던져야 할 질문은 다음과 같다; 음악을 듣는 일은 어떻게 '섹스 어필'과 구분될 수 있는가? '위아래 댄스'를 추는 사람을 듣고 본 후 그 사람과 섹스를 하고 싶다고 느끼게 되는 경우를 생각해보라. 만약 어떤 음악을 듣거나 본 후 노래를 부르는 사람을 만나 섹스를 한판 진하게 하고 싶다고 느낀다면 그것은 방금 들은 음악이 섹스 욕구의 종속되어 있으며 이른바 '예술의 자율성'을 상실하고 있다는 뜻과 같다. 쉽게 말하면, 실은 음악을 경험한 것이 아닌 셈이다. 즉, 그 경우 음악은 다만 구실이었을 뿐이다. 오히려 그로부터 그저 일차원적 자극을 받아 외부에 있는 진짜 신체 혹은 완벽한 신체를 따로 하나 더 마련해야겠다고 느끼는 경우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음악을 듣는 경험은 섹스를 할 수 없는 '가짜 신체'의 경험으로 드러날 뿐이다. 여기서 아이돌 음악 경험의 공식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볼 수 있다: '음악은 성기가 달리지 않은 가짜 신체일 뿐이다. 우리는 성기가 달린, 따라서 섹스를 할 수 있는, 진짜 신체를 찾아내야 한다. 음악은 진짜 신체를 찾아내기 위한 영감의 원천 혹은 섹스 게임에 등장하는 힌트일 뿐이다. 아마도 내 눈 앞의 저 아이돌 가수가 진짜 신체를 숨기고 있는 것 같다. 저 가수와 섹스를 하고 싶다.' 여기서 상황은 간단하다. '위아래 댄스'를 보며 우리는 음악을 듣고 있지 않거나 음악에 관심이 없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음악은 처음부터 단 한번도 음악을 듣는 혹은 경험하는 내 신체 내부에 존재한 적이 없었다. 다만 음향의 형태를 띤 어떤 육체적 자극이 내 신체를 가격했었을 뿐이다. 아래 '죠지'의 음악으로 되돌아가자. 내가 '죠지'의 음악을 인용하는 것은 그의 곡이 섹스 어필을 전혀 일으키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난 그의 음악을 듣고 난 후 그와 섹스하고 싶다고 느끼지 않는다. 왜냐하면 난 그의 음악 속에서 이미 그의 몸을, 그의 몸이 일으키는 정동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정동의 다른 판본을 하나 더 언급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끝내자. 사실 아주 좋은 예가 신체 장애가 있는 사람이, 예컨대, 걸을 수 없어 휠체어를 타고 생활해야 하는 사람이 걸을 수 있는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 살아가는 장면에서 발견된다. '공감'의 세계에 사는 우리는 흔히 그들의 삶이 자율적이지 못하며 다른 사람의 도움에 종속되어있다고 여긴다. (그래서 때때로 '공감'은 '가진 자'가 '가진 것 없는 불쌍한 사람'에 대해 느끼는 '거리감'을 그럴싸하게 표현하는 일이라고 격하되어 여겨진다. 한 예로, 이러한 이유로 미국인들은 'sympathy'라는 말을 쓰는 것 자체를 무례한 일로 여긴다. 그들은 대신 'empathy'라는 말을 사용한다.) 그러나 정동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야기가 좀 달라진다. 걸을 수 없는 자는 걸을 수 없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육체를 공유할 수밖에 없게 된다. 다시 말하면, 그는 그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의 다리를 자신의 다리가 확장되는 경험으로 받아들인다. 앞서 지적했듯, 흔히 신체 장애는 자율성의 상실로 여겨진다. 그러나 상식과 달리 이 지점에서 정동 이론이 내놓는 한 가지 요점은 신체의 장애가 실은 신체의 공유 혹은 확장을 가능케하는 조건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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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봐줘요]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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