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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진스의 1990년대

by spiral 2023. 1. 25.

뉴진스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내 관심을 끄는 것은 "디토"라는 곡이다.* 일반인이 엉성하게 이 곡의 안무를 따라하는 쇼츠를 보게 된 후 알게 됐다. 10대 후반 20대 초반이 쇼츠에서 따라하는 안무는 해당 곡이 '유행'이라는 뜻이다. 난 동시대 대중음악에 더 이상 큰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내 신체가 즉각적으로 곡에 반응하는 것을 발견했다. 이는 내 감수성이 갑자기 젊어졌기 때문일 수 없다. 반대의 경우를 생각해보는 편이 낫다. 곡이 옛 정서에 기반하고 있을 가능성 말이다. 뉴진스라는 친구들의 곡이라는 것을 알게 된 후 검색을 해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친숙하게도 1990년대에서 2000년대를 연상케 하는 장면으로 점철된 뮤직비디오가 나왔다. 여러 영상이 있었다. 뮤직비디오 두 편, 퍼포먼스 영상 두 개가 눈에 들어왔다. 뮤직비디오에 사용된 1990년대 비디오 영상만 따로 올리고자 기획된 계정에는 학교 강당에서 학교 체육복을 입고 찍은 퍼포먼스 영상도 있었다.

1990년대 최초로 발흥했던 아이돌 음악을 먹고 자랐으나 이제는 40대가 되어 과거를 추억하는 것 이외에 별로 할 수 있는 것이 없게 된 자들을 위해 10대 나이의 아이들이 최고의 학예회 공연을 선사하고 있더라는 것이 "디토"란 곡의 영상을 보고 난 후 내가 받은 인상이었다. 이 진술에는 여러 맥락이 개입한다. 첫째로, 이는 뉴진스의 뒤에 40대의 전문적 기획자 그룹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2000년대에 태어난 아이들이 자신들이 살아보지 않은 1990년대를 추억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여러 자료를 통해 보고 배운 1990년대를 '재현'하고 있는 것이지 자기 자신의 과거를 내면으로부터 '추억'하고 있지 않다. 나쁘게 말하면, 누군가가 가르쳐준대로 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좋게 말하면, 뉴진스의 공연은 선배 세대에 대한 '경의' 혹은 '오마주'를 표하는 일과 같다. 둘째로, 이들의 공연이 '학예회' 같이 보인다는 말은, 많은 비평가들이 지적하듯, 뉴진스의 공연이 충분히 젠더화되어있지 않다는 것을 뜻한다. '학예회'는 아이들이 어른들의 세계 논리에 위협이 되지 않는 방식으로 '귀엽게' 굴고 있다는 말과 같다. 여기에는 아이를 낮추어보는 관점이 없지 않다: 아이들이 어른들의 추억을 위해 복무하는 자로 정의내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근본에 있어 "디토"란 곡이 보여주는 의상, 곡 스타일, 안무 스타일 등은 2000년대생이 되살려낸 'SES' 혹은 '핑클'이라 말해볼 수 있다. 최근 몇년 사이에 보았듯 '뉴트로'는 그 자체로 10대 및 20대 사이에서 '먹히는' 최신 트렌드의 하나다. 그러나 1990년대를 다시 소환하여 뉴트로를 가능케 한 것은 어디까지나 40대다. 지금 40대 나이에 있는 사람들은 10대를 자식으로 키우고 있다. 마찬가지 방식으로 40대의 기획자들은 10대 걸그룹을 부모와 같이 키우고 있다. 부모는 자신들이 꿈꾸었던 것을 자식 세대가 다시 한번 반복해주기를 은밀히 꿈꾼다. 많은 이들이 지적하듯, 뉴진스의 음악이 기존 걸그룹이 그러했던 것과 달리, 남자 아이들이 아니라 여자 아이들 사이에서 인기가 있다면, 그것은 이들이 아직 기획자 부모 밑에서 자라는 중이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서, 중고등학생들의 음악이다. 물론 중고등학생 중에는 독립심을 최우선으로 삼는 반항적인 아이들도 있다. 그러나 뉴진스는 그런 부류가 아니다. 그보다는 믿고 의지할 부모의 그림자가 알게 모르게 느껴지는 유복한 중고등학생들에 가깝다.

"디토"란 곡의 영상에 대해 좀 이야기해보자. 뉴진스는 5명의 멤버로 되어있다. 그러나 뮤직비디오에는 6명의 여자 아이들이 나온다. 뮤직비디오의 시작부에 전혀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이 하나 언급된다: 희수. 희수는 제6의 뉴진스 멤버와 같다. 기본적으로 뮤직비디오 내 영상은 희수가 캠코더로 담아놓은 1990년대의 영상에 바탕하고 있다: "디토"의 뮤직비디오는 희수의 1990년대 추억으로 만들어져있다. 여기서 뉴진스의 모든 영상이 희수의 눈을 통해 가공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뉴진스를 기획하여 영상화하는 것은 희수다. 쉽게 말해서 희수는 감독자 혹은 기획자의 위치에 있다. 그럴싸하게 들리는 말이다. 그러나 기획자인 이유로 희수 자신은 뉴진스의 공연 영상 속에 담기지 못한다. 희수와 뉴진스 사이에는 최소한의 거리가 있다. 희수는 뉴진스와 완전히 하나가 아니다. 뉴진스와 희수 사이에는 '절친'이라고 딱 잘라 말하지 못하게 만드는 요소가 있다.

희수는 학교에서 인기있는 아이들의 무리에 끼고 싶으나 그럴만한 끼가 없어 주변만 맴도는 평범한 아이와 같다. 여기서 아이돌 기획자의 꿈이 발생하는 방식을 볼 수 있다. 아이돌 음악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사람은 아이돌의 외부에 있는 사람이 아니다. 예컨대, 돈만 밝히며 아이돌을 부리는 사장님은 아이돌을 착취하다 쓸모가 없어지만 그저 버릴 뿐이다. 최고 수준의 아이돌 기획자는 그 자신이 아이돌과 같이 느끼며 아이돌과 하나 되고 싶은 열망을 가지고 있어야한다. 적어도 과거 어느 시점에 한번은 그러한 열망을 강렬하게 품었어야한다. 쉽게 말하면 아이돌의 '찐' 팬만이 최고의 아이돌 기획자가 될 수 있다. 당연히 업계 최고 기획자는 아이돌이 되고 싶었으나 그렇게 되지 못한 자들 사이에서 나온다. 사실 아이돌의 '팬'은 소외감 속에서 태어난다. 희수는 뉴진스의 영상을 가공하여 창출할 수는 있어도 뉴진스의 영상 안에 들어갈 수는 없는 자의 이름이다. 

뉴진스의 다른 곡과 달리 "디토"란 곡에 일말의 '비평'을 가하는 것이 가능한 이유는 희수의 존재 때문이다. 오늘날 10-20대가 구현하는 주류 대중음악은 비평적 바탕을 제공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여기서 말하는 비평적 바탕은 음악가의 주관성을 의미한다. 최근 10-20대는 비주얼을 창출하기 위한 신체로서 복무한다. 반면 신체에 깃드는 정신은 40대의 기획자들이 제공한다. 아이가 대학에 간 이후에도 아이 성적에 대해 상담을 하기 위해 교수 연구실에 부모들이 나타나는 근래의 현실에 상응하는 대중문화적 현상이다. 오늘날 주류 대중문화에 대한 비평적 논의를 전개하기 위해서는 '대학생 아이'가 아니라 그들의 뒤에 있는 '부모'를 소환해야한다. 사실 오늘날 주류 대중음악에 대해 음악비평을 내놓는 것은 이미 그 자체로 요점에서 벗어난 일이다. 근래 비평가들이 하는 일은 어떤 팀이 어떤 기획을 지니고 있는지를 산업적-문화적으로 분석하는 것이다. 음악 자체는 자율성을 지니고 있지 않다. 그런 이유로 비평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비평적 가치를 잃어가는 음악의 문제 앞에서 "디토"는 다소 색다른 접근법을 취한다. 연출자가 희수를 통해 아이들 사이에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디토"란 곡이 흥미로운 이유는 기획자의 그림자가 제6의 아이라는 모습을 취하며 뮤직비디오 내에 등장하기 때문이다. 

희수는 아이이지만 동시에 아이가 아니다. 뮤직비디오 내에서 희수는 1998년 10대의 나이로 교실에 있었던, 지금은 40대가 된 어른의 내면을 지니고 있다. "디토"란 곡이 "훌쩍 커버렸어"라고 말할 때 해당 문장의 주어는 뉴진스의 입을 빌려 복화술을 펼치는 희수다. 희수가 어른이라는 것은 아래 영상에서 희수만이 주관성을 지닌 인물이라는 말과 같다. 영상의 말미를 보라. 희수는 교실에서 캠코더로 영상을 찍고 있지만 그의 앞에는 뉴진스가 존재하지 않는다. 교실 내 다른 아이들은 그런 희수의 모습을 보며 '정신 나간 거 아냐?'란 표정을 짓는다. 캠코더 속 세계는 뉴진스라는 상상력으로 넘친다. 그러나 캠코더의 밖에는 피사체가 없다. 현실은 비어있다. 바로 캠코더의 안과 밖 사이에 개재하는 것이 주관성이다. 뉴진스는 지금 40대의 나이에 있는 자들이 1990년대 꾸었던 꿈의 다른 이름이다. 1990년대에 한국의 대중음악은 모든 것이 불완전했다. 그 불완전한 대중문화를 완벽하게 구현하고자 꿈꿨던 것이 그 시절을 살았던 10대의 아이들이다. 그리고 2020년대에 한국의 대중음악은 세계 대중음악계에서 가장 큰 주목을 받게 되었다. 

사슴은 희수의 눈에만 보인다. 당연한 일이다. 모두가 꿈을 꾸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남들과 다른 생각을 하며 꿈을 꾸는 것은 '아싸'들이다. (반면 '인싸'들은 그저 행동으로 저지른다, 폭력적인 방식으로든, 귀엽고 예쁘고 발랄한 방식으로든.) 상상력을 개진하는 자들은 '고독'하다. "디토"의 영상이 묘하게 매력적인 것은 뉴진스의 발랄한 신체 때문이 아니다. 희수의 불분명한 존재 때문이다. 한 예로 희수에게는 얼굴이 없다. 눈만 클로즈업되어 나오거나 눈이 가려진 채 얼굴이 나올 뿐이다. 결과적으로 청중은 통일된 희수의 '얼굴'을 그려내지 못한다. 희수는 얼굴이 구분되지 않는 평범한 보통의 인물에 불과하다. 그러나 평범함 속에서 희수는 꿈을 꾼다. 워즈워스가 말하듯, 시인은 지상으로 내려와 평범한 보통 사람의 언어를 구사해야한다. 그러나 동시에 낭만적 인물은 대중 속에서 홀로된 고독을 느낀다. 바로 그 현실과의 거리가, 주관성이라고 불리는, 상상력의 조건이다. 발랄한 신체는 1분 짜리 쇼츠의 신체와 같다. 반면 주관성의 고독은 쇼츠와 쇼츠 사이에 개재하는, 신체적 현실 자체가 소거되는, 단절과 같다. 쇼츠와 쇼츠 사이의 단절을 잇는 것은 또 다른 쇼츠가 아니다. 단절을 잇는 것은 상상력이다. 남들에게는 텅 빈 공간의 공기로 현상할 뿐인 사슴의 존재 말이다. "디토"의 매력은 10대의 발랄한 신체를 공기 속으로 흩어버리는, 기억이라 불리는 물리적 공백으로부터 나온다. 1998년 12월 31일 영상의 흐릿함만이 물리성에 상상력을 불러일으킨다. 4K니 8K니 하는 것들은 아무런 감흥도 일으키지 못한다. 기억이라 불리는 감흥은 360p에 위치한다. 현실은 촘촘한 픽셀이 보장한다고 여겨지는 구체성 속에 있지 않다. 현실의 현실성은 감추어진 것, 형상을 잃고 공기 중으로 사라져가는 것들 속에 있다.

뉴진스를 보며 우리가 지금 보는 것이 단순히 근래 10대들이 꾸는 꿈일 것이라고 여기는 것은 반만 맞는 말이다. 2020년대에 10대를 키우는 것은 40대다. 지금 한국사회에 문화적 상상력을 제공하는 것은 1990년대에 10대를 보냈던 아이들이다. 부모 세대는 자식 세대에게 자기 자신의 욕망을 투사한다. 그리고 아이들은 부모의 욕망에 맞추어 자신을 가공해나간다. 뉴진스는 40대의 부모가 꿈꾸는 '세계 최고의 한국인'을 구현하는 2020년대의 형식과 같다. 이른바 '1등이 되는 꿈'은 한국 사회를 지탱해온 신화와 같다. 그 가장 오래되고도 흔한 판본이 '서울대 가는 꿈'이다. 물론 지금은 '서울대 가는 꿈'의 위상이 예전 같지 않다. 반면 한국 사회에서 아직 꿈을 꿀 수 있고 또 그 꿈을 이루면 정말로 세계 1등이 되는 것이 가능한 몇 안되는 영역이 대중문화다. '잘 살아보자'는 한국인의 촌스럽도록 오래된, 새마을운동식 꿈이 그 어떤 세대간의 대립이나 단절도 없이 계승되고 있는 영역이 의외로 한국 사회에서 가장 반전통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대중문화계라는 뜻이다. 일선 교실에서 '서울대' 운운하는 선생은 학생들의 분노와 '세대간 갈등'을 살 것이지만, 'K-Pop 스타'라는 말로 꿈을 키워주며 지도하는 기획자들 앞에서 연습생들은 그들을 믿고 따르며 각고의 노력을 다할 것이지 않은가? 부모와 자식이 서로 밀고 끌어주는 아름다운 전통은 이렇게 만들어지는 것이지 않은가? (비슷한 맥락에서 손흥민과 손웅정의 관계가 바로 이러한 신뢰에 기반한 관계의 한 전형을 보여주지 않는가?)

그러나 아이가 진정 어른이 되는 것은 부모의 욕망이 근거 없는 것임을 알게 될 때다. 한국사회에서 10대의 신체는 40대의 꿈을 실현하는 물질로 복무한다. 여기서 형식은 물질의 부정을 의미한다. 반면 물질이 자기 스스로 목소리를 내게 되는 것은 형식의 비존재를 인지하게 될 때다. 달리 말하면, 성애화는 형식에 대한 자의식을 갖게 되는 순간 발생한다. 바로 그 자의식의 시기를 20대라 부른다. 아래 영상 속에서 20대의 정서를 내보이는 것은 희수다. 팬의 위치에서 학교 강당에서 춤을 추는 뉴진스 무리를 촬영하다 문득 그들 뒤에 비친 남학생에게 초점을 맞추는 장면을 보라. 해당 장면에서 뉴진스로 일컬어지는 무성적 '소노리티'(sonority)의 세계는 젠더의 세계에 노출된다. 요점은 젠더가 희수에 있어 독립적 자아의 형식으로 작동한다는 데 있다. 물론 영상 속에서 희수는 그 가능성을 실제로 구현하는 단계로까지 나아가지는 않는다. 다른 한편, 동일한 현상이 희수의 관점이 아니라 뉴진스 자신의 관점에서 구현될 때가 되면 뉴진스가 보여주는 10대 시절이 끝나게 될 것이다.

* 'ditto'는 이미 한번 한 말을 반복하여 말하는 것을 피하고자 할 때 쓰는 라틴어 어원(dictus)의 영어다. 우리 말로 하면 '상동' 정도된다. 노래에서 누가 중얼중얼 가사를 외다 '위와 동일', '상동,' '상동'거리며 후렴구를 내놓으면 우스꽝스러울 것이다. 그러나 '디토'라고 하면 한국인 입장에 '있어 보인다.' 이런 말을 가사 후렴구로 쓰는 것을 보면 가사를 짓는 사람들이 사람들의 이목을 끌어보고자 대단히 많은 고민과 노력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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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tto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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