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실험적 음악을 좋아한다. 그러나 무작정 실험적이기보다 실험성과 감각적 달콤함이 서로 경쟁하는 음악을 좋아한다. 아래 토의 음악이 좋은 사례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음악을 누가 싫어할 수 있느냐고 느낀다. 그러나 실제로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아래와 같은 음악을 듣고도 아무런 감흥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이것이 주관성의 문제다. 반면 이 주관성을 바탕으로 형이상학을 재구성하는 것이 미학이다. 미학이 보편성과 목적론에 대한 논의를 지닐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 있다. 미학은 감정에서 시작하지만 감정의 형이상학적 프로그램으로 끝난다. 예컨대, 아래 음악을 들으며 쓰레기 더미로 가득한 폐허로 느껴지던 세계 전체가 완전히 하나의 의미론적 중심을 얻으며 재구성되는 듯이 느낀다면 그건 음악을 미적으로 듣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음악을 듣고 있지만 아직도 딴 생각이 든다면, 내일까지 해야할 업무가 생각난다면, 배가 고파 음식이 생각난다면, 누가 문을 두드리지나 않을까 신경이 쓰인다면, 유리창으로 비가 세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면, 화장실 변기가 막힌 건 아닌지 고민이 된다면, 냉장고에 계란이 다 떨어진 건 아닌지 문득 의문이 든다면, 그건 음악을 미적으로 듣고 있지 않다는 뜻이다.
형이상학은 모든 잡다한 것을 사라지게 만드는 힘을 뜻한다. 그 안에 머무는 사람은 선할 수밖에 없다. 칸트가 말했듯 미적인 것은 도덕의 상징이다. 세속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짱구'를 굴리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적인 것 안에 너무 오래 머물다보면 멍청해진다. 만약 미적인 것에 푹 빠졌던 사람이 세속에 내려온다면 속임수와 협잡의 가장 쉬운 희생양이 될 것이다. 미학은 타락한 근대적 삶 속에서 비근대성을 다시 한번 복구시키기 위해 마지막 희망과 같이 부여잡은 프로그램이기 때문이다. 라투어 같은 사람은 "우리는 근대적인 적 없었다고" 하지만 그런 건 소수의 고상한 사람들에게나 해당하는 말이다. 난 그런 말, 믿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언제나 근대적이었다." 그렇기에 미학이라는 희망이 필요하다. 거꾸로 말하면, 미학의 바탕은 유물론이다. 미학은 사실 불가능하다. 그러나 픽션이 꼭 거짓인 것은 아니다. 가치를 믿고, 또 그것을 추구하는 것을 삶의 의미라 부르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이기 때문이다. 한 예로, 유물론적 과학조차 하나의 가치로서 밖에는 주어지지 않는다. 우린 순간적으로 벌거벗은 물질에 닿을 수 있을 뿐이다. 만약 벌거벗은 물질에 계속해서 닿을 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의식과 미적 형상이 사라져 모든 것이 물질로 환원되었다는 뜻이다. 그것이 우리가 죽음이라 부르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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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 Long Tomorrow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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