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각에 박문호는 21세기 과학판 도올 선생과 같다. 사실 도올 김용옥 선생이 강연하는 동양철학은 21세기의 언어로 다시 씌어져야한다. 2천 5백년전 철학이란 게 당대에는 최신 과학의 역할을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고려하지 않은 채 마치 그때 그 시절 이야기가 지금 21세기에도 여전히 그 자체로 통용되는 진리를 서술해준다고 여기면 곤란하다. 애당초 철학의 취지가 무엇이었는지를 고려한다면 도올 김용옥의 강의를 들을 시간에 박문호의 자연과학 강의를 듣는 게 훨씬 더 취지에 부합한다.* 그런 의미에서 난 박문호 선생을 도올 박문호라고 부르고 싶을 정도다. 사실 학계에 종사하지 않으며 대중을 상대로 자기만의 아카데미를 운영한다는 점, 상당한 추종자를 거느리고 있다는 점, 자신의 강의를 유튜브에 공개하여 자신이 소화한 지식을 만천하에 알리고자 한다는 점 등에서 둘은 큰 유사성을 보인다. 자기 강의에 자기가 도취된다는 점에서도 비슷한 점이 많다.
물론 둘 사이에는 차이도 있다. 박문호는 정치에 대해 알지 못하며 관심이 없다. 그렇기에 언급조차 하지 않는다. 반면 김용옥은 혁명적 행위를 철학이 표현되는 한 방식으로 여긴다. 이는 기계론과 생기론의 차이와 같다. 사실 박문호는 철학을 근거없는 헛소리 정도로 여기는 발언을 많이 한다. 전형적인 유물론자의 세계관을 내보인다. 반면 김용옥은 과학을 위험한 불장난, 인간의 오만함이 드러나는 계기 정도로 여긴다. 전형적인 20세기식 반유물론적, 인문적 과학 이해다. 하이데거나 아도르노 같은 사람이 개념화한, 낡아빠진 한 세기 전 모델에 기반한다. 둘의 대립은 사실 전혀 흥미롭지 않다. 둘의 대립 자체가 지극히 20세기적이기 때문이다. 21세기는 이 둘을 어떻게 뒤섞을 것이냐에 달렸다.
박문호의 자연과학을 철학화하는 작업은 그의 작업 위에서 행위를 재개념화하는 것과 같을 것이다. 예컨대, 박문호가 이끄는 "박문호의 자연과학 세상"이라는 모임을 종교 집단이었던 피타고라스 학파의 21세기 판본으로 재개념화하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지 싶다. 파타고라스 학파의 미덕은 그들이 지녔던 수학적 지식이 곧 도덕의 원리로서 작동했다는 데 있지 않았던가? 혹은 그들에게 수학은 도덕적 삶을 나타내는 상징의 문제였다. 비슷한 방식으로 호흡과 혈관의 작동 방식을, 즉, 혈관을 거치며 산소와 이산화탄소가 교환되는 방식으로부터 도덕의 원리를 발견하는 것 또한 가능하지 않겠는가?
유물론자의 도덕은 사실 그렇게 낯선 것이 아니다. 스토아 학파가 그러했고, 에피쿠로스 학파가 그러했다. 그들은 모두 원자론자들이었다. 난 유물론자 집단인 박문호 학파를 그러한 집단으로 보는 게 가능하다고 여긴다. 예컨대, 박문호의 해외 학습탐사 원정대 선정 기준을 보라. 지극히 학술적인 기준으로 엄격하게 선발한다. 원정은 다양한 지식의 학습을 목표로 삼는다. 물론 체험을 통해 지식을 체화하는 데 목표를 맞춘다. 그들에게 자연과학은 관념론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동시에 원정 동안 술을 금지한다. 금욕적 집단이다. 학문과 수련이 하나된 모습이다. 스토아 학파의 향기가 난다. 철학은 얼마든 자연과학으로부터 태어날 수 있다.
* 실은 서양철학도 마찬가지다. 동시대 철학은 과학 속에 있다. 우리가 아는 철학과는 철학을 동시대적으로 전개하는 분과가 아니라 그저 지나간 옛날의 철학사를 다루는 곳일 뿐이다. 물론 철학과 과학은 동일하지 않다. (이 부분에 대한 이야기를 길게 할 자리는 아니다.) 그러나 오늘날 역설은 과학으로부터 완전히 떨어져나올 때 철학은 그 스스로의 힘으로는 존재할 수조차 없는 처지에 처해있다는 데 있다. 물론 철학은 문학이나 문화에 기생할 수도 있다. 그러나 문학연구나 문화연구 역시 오늘날 학문으로서의 지위를 정당화하는 데 실패하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자연과학으로부터 떨어져나온 결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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