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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리학, 레토릭, 자연과학

by spiral 2024. 8. 15.

학습의 어려움 때문에 자연과학적 지식을 습득하는 데 단 한번도 진심인 적 없었던 사람들이 선택지가 없어서 인문학을 공부하게 될 때 그 결과는 별로 바람직하지 않다. 간단히 말하면 그들의 인문학은 전체 구도에 대한 이해 없이, 즉 어디서 레토릭이 나오게 된 것인지 그 기원은 알지 못한 채, 단순히 레토릭 안에 머물게 된다. 사실 레토릭은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전체가 아니다. 레토릭은 언어의 중요한 한 부분이다. 그러나 언어에는 레토릭만 있는 게 아니다. 언어는 레토릭 이전에 논리학이라는 체계를 지니고 있다. (다른 한편 언어 내에는 문법학이라는 부분도 있다.) 부분은 전체와의 관계를 잃게 될 때 단순히 제멋대로, 자의적으로, 날뛰게 된다. 이것이 레토릭이 지닌 문제다. 한낱 레토릭의 차원에 머물지 않으려면 레토릭 이전에 논리학이 무슨 역할을 했던 것인지, 그리고 논리학에 무슨 문제가 있었길래 결과적으로 레토릭이 설치게 된 것인지 그 과정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논리학의 기반을 놓은 사람은 아리스토텔레스다. 여기서 논리학을 논하기 이전에 논리학이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체계 내에서 차지하는 지위를 볼 필요가 있다. 요점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이 단순히 언어 자체의 자의적 논리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점을 보는 데 있다. 한 예로 그의 체계는 자연과학과 수학을 포함한다. 그렇다면 그에게 자연과학은 왜 필요했던 것일까?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 자연과학은 개별 사례들, 보다 정확히는 개별적 실체들이 지닌 물리적 차원을 논하기 위한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개별적 실체는 대단히 중요한 개념이다. 요컨대 실체라는 개념 없이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과의 차이를 논하기는 어렵다. 플라톤에게 물질계는 현상에 갇혀 있다. 이는 플라톤에게서 물질계는 다만 출발지 역할을 할 뿐이라는 뜻이다. 그의 철학은 언제나 영원한 형상, 즉 이데아의 세계로 나아간다. 그게 진짜 목적이다. 물론 이데아는 물질적이지 않다. 이에 비해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관념적 형상이 물질적 원인과 함께 한다고 여긴다. 이로부터 나오게 되는 것이 실체 개념이다. 실체는 네 개의 원인으로 이루어져있다: 형상 원인, 물질 원인, 동력 원인, 목적 원인. 요점은 실체가 물질계 내에 위치해있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 형상은 물질계 내에 있다. 물론 실체는 단순히 물질적이지 않다. 그러나 실체는 물리성을 또한 포함하며 물질계 내에서, 보편 자체로서가 아니라, 개별적 차이를 지닌 것으로서 존재하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자연철학 개념을 도입할 수밖에 없는 것은 그의 철학 치계에서 실체가 물질계 내에 있기 때문이다. 즉, 자연철학은 실체의 한 구성 요인인 물질의 작동방식을 논하기 위한 것이다.

논리학으로 가보자.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 논리학은 개별 실체와 보편성을 연결시켜 판단하는 도구다. 말하자면 물리학과 메타물리학으로서의 형이상학을 연결시키는 도구가 논리학이다. 이는 그가 실체를 물질과 형상이 합쳐진 결과로 이해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플라톤에게서와 같이 물질에 대한 고려 없이 형상만 논할 것 같으면 보편과 개별의 관계를 따지는 학문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 플라톤에게서 논리학이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와 같이 그럴듯한 체계를 갖추지 않은 채 그저 스쳐지나가는 요소 정도로 다루어지는 것이 이 때문이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보편과 개별 사이의 관계는 무척 중요하다. 그는 개별적 사례 없이 이데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플라톤이 현상과 이데아라고 구분하여 말한 것을 개별과 보편으로 치환한 뒤 그 둘의 관계를 사유하는 도구, 즉 논리학을 개념화하게 된다. 여기서 개별은 개별적 실체로서 보편에 참여하는 개별로 이해된다. 

이제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의 한계가 어디에 있는지 살펴보자. 인문학자들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삼단논법, 즉, 논리학을 다룰 때 그들은 개별 사례의 물질적 층위를 거의 없는 것과 같이 여긴다. 물론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에서는 결국 연역적 이성능력이 중요하게 작동한다. 보편적으로 타당하다고 여겨지는 진술로부터 개별 사례들의 진실성을 판단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예컨대, '모든 사람은 죽는다'는 진술을 생각해보자. 이 진술은 그 자체 보편 타당하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해당 진술의 문제는 죽지 않는 인간이 진짜로 있는지 없는지 자연과학적 사실 확인의 과정을 통해 이 진술의 타당성을 도출해낸 게 아니라는 데 있다. 말하자면 현실적으로 모든 사람을 다 관찰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물론 전부 확인한 것은 아니라 해도 경험상 적어도 지금까지는 모든 사람은 죽었다는 진술이 자연과학적으로 맞다고 말해볼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과연 앞으로도 그럴 것이냐는 질문을 던지는 데 있다. 예컨대, 근래 과학이 주장하는 바의 하나는 노화와 죽음이 필연적 원리에 의한 것이 아니라 다만 우연히 일어나는 일일 뿐이라는 것이다. 반면 논리학이 '모든 인간은 죽는다'라는 진술을 보편적으로 타당하다고 여기는 것은 해당 진술이 자연과학적 관찰의 결과 그렇다는 뜻이 아니라 형이상학적 존재의 문제라는 관점에서 모든 인간이 어느 순간 필연적으로 죽도로 설계되어 있다고 뜻이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종교적 관점을 사용하면 이해하기가 더 쉽다: 모든 인간이 죽는 것은 신이 그렇게 인간을 필연적으로 설계했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근래 과학은 노화와 죽음은 진화의 과정에서 특정 개체의 긴 생존보다 개체군 자체의 생존이 장기적으로 생존에 더 효과적이라 여긴 결과 개체 차원에서 텔로미어가 줄어들어가는 것을 막는 기제를 발전시키는 것 대신 그저 더 많은 개체군을 생산하는 생식의 과정을 발전시킨 결과라고 말한다. 개체군의 생존만 보장된다면 개체는 금방 죽어도 상관 없다. 그렇기에 개체의 긴 생존을 위한 유전자적 기제를 발전시킬 이유가 없었고 그래서 노화와 죽음이 일어나게 되었다는 뜻이다. 이런 전제 위에서라면 논리학은 성립하기 어렵다. 논리학은 선험적으로 특정 질서가 설계되어 있다는 발상이 정당성을 얻는 한에서 작동하는 시스템이다. 논리학이 간과하는 것은 귀납법이다. 개별 사례로부터 보편성을 도출하는 관점이 빠져있다는 점에서 논리학은 문제를 지닌다. 17세기 자연과학 혁명 이후 이러한 한계가 분명히 인지된 후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은 자연 내 사례와는 별개로 작동하는 순수 논리 체계인 것처럼 여겨지게 된다. 그러나 원래는 그렇지 않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진심으로 물질과 형상이 하나라고 여겼다. 

거꾸로 말해보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과학이 자연과학이 아니라 자연철학이라 불리는 이유는 그에게서는 자연계의 물질이 결국 연역적 이성의 차원, 즉, 논리학의 차원으로 환원되기 때문이다. (물론 동시에 논리학은 존재에 대한 학문인 형이상학적 진리에 도달하기 위한 도구다.) 그러나 물질계에 대한 고려는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대단히 중요한 이슈였다. 그게 그와 플라톤을 구분시켜주는 특장점이었기 때문이다. 반면 20세기 동안 인문학자들은 자연과학에 대한 고려 자체를 하지 않았다. 사실 2차 대전 이후 인문학계가 자연과학을 남의 것으로 여기게 된 배경에는 19세기를 거쳐 20세기 초반에 이르는 시기 동안 철학의 연역법이 지닌 문제가 자연과학에 의해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논리학이 적어도 물질계를 설명하는 도구가 될 수 없다는 것이 사상가들 사이에서 분명해진 게 20세기 초였다. 논리주의니 논리실증주의니 하는 것들은 이런 맥락에서 자연과학과 인문학의 합일을 유지해보고자 하는 관점에서 형성된 문제 의식이었다. 문제는 이 지점에서 인문학이 자연과학쪽으로 가지 못하고 레토릭으로 이동하게 되면서 벌어진다. 자연과학으로 가면 인문학은 인문학이 아니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하는가? 여기서 인문학은 레토릭으로 이동하게 된다.

레토릭은 세상의 이치를 임의로 만들어진 언어적 구성물로 본다. 언어적 구성물이 있다는 점에서는 논리학과 겹치는 부분이 있다. 그러나 논리학과 달리 레토릭은 언어에 궁극적 지시대상이 있다고 여기지 않는다. 모든 것은 잠정적이다. 모든 것은 담론의 문제일 뿐이다. 기타등등. 이런 식의 논의가 20세기를 거치며 인문학을 휩쓸 게 된다. 물론 레토릭에 접근하는 방법에도 여러가지가 있다. 구조주의적 방식도 있지만 탈구조주의적 방식도 있을 수 있다. 전자는 언어의 구조가 나름의 혹은 임의의 지시대상을 설정하며 정합성을 지니게 되는 방식에 더 초점을 둔다. 반면 후자는 하나의 구조가 끊임없이 다른 구조로 치환되는 차이의 작동에 훨씬 더 많은 비중을 둔다. 학문의 영역에서 시작된 이 현상이 문화의 차원으로까지 번지게 될 때 나타나는 것이 포스트모더니즘이다. 

탈구조주의적 관점이 그 자체로 강조되면서 20세기 후반 인문학자들 사이에서 인간 사회가 만들어내는 헤게모니적, 권력투쟁적, 기타등등적 임의로 만들어진 구조 외부에 존재하는 물질계 자체가 지닌 논리에 대한 관심이 사라지는 현상이 나타났다. 물질계에 대한 관심이 사라지면 모든 게 주관적 욕망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싸움의 문제로 여겨지게 된다. 한낱 '세치혀'가 세상을 어지럽히게 되는 현상이 이로부터 나오게 된다. 사실 확인은 하지 않은 채 주의주장만이 넘치게 된다. 이들은 객관적으로 옳은 것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상대를 조롱하고 헐뜯어서 말싸움에서 이기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플라톤이 소피즘에 맞서 이데아를 강조했던 이유는 바로 이러한 세치혀의 세계가 가져올 혼란과 폭력 때문이었지 다른 게 아니었다. 

자연과학을 공부하지 않을 때 인문학에게 남겨지는 것은 '세치혀'다. 자연과학적 물질에 대한 관찰이 없기 때문에 인문학은 그럴듯하게 추상적인 언어를 구사한다. 공자왈 맹자왈 하는 식이면 그래도 건전하다고 할 것이다. 문제는 자신이 객관적 데이타를 지니고 있지 않기 때문에 논의에서 밀릴 때 그럴듯한 언어, 예컨대, '모든 이론은 변하기 때문에 지금 그 말이 맞게 들려도 나중엔 아닐 것이다'는 식으로 말한다는 데 있다. 이러한 언어가 공자왈의 수준에도 들지 못하는 이유는 개별 사례에 대한 자연과학적 관찰의 결과인 데이타에 의거해 말해야할 순간에 그러한 데이터를 자신이 지니고 있지 못하다는 민망한 상황을 타계하기 위해 둘러내는 '레토릭'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 순간 인문학 교육만 받은 사람들은 바로 그 두루뭉술한 말을 한 자신이 '도덕적 크기'를 드러냈기에 '멋있다'라고 여긴다. 반대로 자연과학적 세밀함을 드러내는 상대방을 두고  '쪼잔하다'고 여긴다. 이는 지금 병에 걸려 누워있는 환자를 구하기 위해 병의 원인을 진단해야 하는 순간 의사가 '이 사람의 병은 이것 때문이고 근거는 이러저러하다'고 한 것에 대놓고 '당신의 말은 시간이 지나면 틀릴 수 있으니 자만하지 말라. 잘난 채 하지 말고 인간이 먼저 되시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일반적으로는 '올바른 말'이다. 그러나 그게 죽어가는 환자 앞에서 내놓을 말은 아니다. 100년 후에 있을 일 때문에 지금 죽어가는 사람에게 손을 쓰면 안된다는 뜻일 뿐이기 때문이다.

순수 인문주의의 문제는 과학이 요구되는 자리에서 도덕을 내세운다는 데 있다. 이는 과학이 요구되는 자리에 신학을 내세우는 것과 마찬가지의 문제다. 문제는 도덕적 겸손이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지는 못한다는 데 있다. 물론 도덕의 핵심 중 하나가 신체적 불이익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원칙을 지키겠다는 자세에 있는 것은 사실이다. 멋진 일이다. 진실을 위해 죽음을 각오하는 일은 도덕 없이 불가능하다. 이 부분은 결코 간과되어서는 안된다. 그러한 사람들이 없다면 사회는 끔찍해질 것이다. 그러나 때때로 과학이 보기에 도덕은 어리석다. 과학의 세례를 받은 근대성의 관점에서 전근대적 도덕 혹은 세계관의 어리석음을 드러내 보여주는 사례의 하나가 돈키호테 이야기 아니던가? 이런 이야기를 해볼 수도 있다.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폐병은 죽을 병이었다. 폐병에 걸린 사람 및 그 주위의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아마도 임박한 죽음 앞에서 어떤 도덕적 태도를 취해야할지 고민하거나 시를 써서 자신의 두려움을 달랠 미학적 태도를 보여주는 것 이상 할 수 있는 게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동일한 병에 걸렸다고 해당 문제를 도덕과 미학의 세계로 가지고 가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냥 병원 가서 진단 받고 약 처방 받은 후 치료를 받은 후 일상으로 복귀하면 될 일이기 때문이다. 병약해져봐야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을 이해할 공감 능력을 기를 수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도덕성을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해서 치료 가능한 병 앞에서 약도 먹지 않고 죽을 일은 아니다. 너무 쉽게 물리적 문제를 죽음 앞에서 취하는 도덕의 문제로 치환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자연과학적 관점을 연습하지 못한 채 두루뭉술하게 '도덕,' 혹은 보다 정확히는, '헤게모니'를 논하는 일만 해온 20세기식 인문주의자들에게 빠진 것은 자연과학적 관찰력이다. 일반론의 언어를 불분명하게 구사해온 사람의 머리는 애당초 사물의 세부를 관찰하지 못할 뿐 아니라 관찰을 해도 그 중요성을 파악하지 못한다. 세부가 일반론의 언어 속으로 환원되어 사라지기 때문이다. 문제는 시간이 지나면 이런 식의 사고 방식이 학습력을 상실하게 된다는 데 있다. 학습은 상식이라 여겨진 기존의 이론에서 벗어나 사물을 다시 관찰하여 데이터를 생성해내고 주어진 데이터를 새로운 시각에서 해석해내는 과정을 통해서만 달성되기 때문이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문제를 지닌다. 추상적 '전체'에 기반한 인문적 담론에 대한 조망을 상실한 채 물질에 대한 세부만을 논하게 될 때 자연과학은 쉽게 말해 '오타쿠'의 학문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된다. 자연과학자에 대한 대표적 이미지가 '매드 사이언티스트'인 것은 그들이 내보이는 반인문성 때문이다. 이런 경우도 대단히 큰 문제다. 자연과학자들은 인문학을 존중해야한다. 그러나 인문주의자라면 자연과학을 존중해야한다. 인문학은 자연과학에서 배워야한다. 21세기 인문학은 20세기 인문학과 같을 수 없다. 이는 인문학이 자연과학에게서 배우는 세기가 바로 21세기라는 뜻이다. 오늘날 과거의 인문학 저술이 그 자체로 진리를 알려준다고 여기는 순수 인문주의는 경계의 대상이다. 21세기 과학이 내놓는 발견에 관심을 주지 않은 채 저명하다는 지난 세기 철학자들의 저술, 혹은 2000년 전 동서양의 철학자들이 남긴 저술을 그대로 경전 읽듯 하는 일은 건강한 일이 아니다. 이들 저작은 인류의 지적 유산이고 중요한 참고지점이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현재의 과학적 관점에서 다시 읽혀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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