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초반 나온 곡들의 특징 중 하나는 보는 곡이 아니라 듣는 곡이라는 데 있다. 그리고 듣는 곡의 특징은 감정을 전달한다는 데 있다. 여기서 감정은 노래하는 자아를 전제로 한다. 즉, 노래의 뒤에는 전기(biography)를 지닌 한 인간의 삶이 있다. '사랑 노래'라 불리는 것이 좋은 예다. 사랑이라는 경험보다 한 인간의 영혼이 겪어내는 부침을 잘 포착해내는 것도 없기 때문이다. 사실 이런 의미에서 오늘날 대중 음악에서 사라진 것의 하나가 '사랑 노래'가 전달하고자 했던 특유의 감정이라고 말해볼 수 있다. 사실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대중가요는 곧 '사랑 노래'와 같았다. 신승훈과 같은 가수가 들려준 발라드 양식을 떠올려보라. 발라드는 곧 '사랑 노래'를 담아내는 형식에 다름 아니었다. 말할 것도 없이 신승훈은 당대 최고의 가수였다. 어떤 의미에서 오늘날 들을 수 없게 된 양식이 발라드이고 '사랑 노래'다. 즉, 이른바 '사랑 노래'가 주류에서 밀려나게 되는 과정이 곧 아이돌 음악이 등장하게 되는 과정이라고 말해볼 수 있지 싶다.
1990년대 '사랑 노래'가 약화되게 된 배경에는 서태지가 있다. 물론 서태지의 시작 또한 사랑 노래다. 그의 1992년작을 보라. 주된 정서는 발라드풍 사랑 노래다. 뿐만 아니라 '발라드'가 아닌 '댄스 음악'이라 알려진 "난 알아요"나 "하여가"조차 가사만큼은 '사랑 노래'의 공식을 따랐다. 그러나 서태지 이전과 이후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과거의 '사랑 노래'가 '댄스 음악'이라는 새로운 형식에 담기게 되면서 이미 과거의 발라드적 사랑 정서에 변형이 가해지게 되기 때문이다. 예컨대, 과거 '사랑 노래'가 들려주었던 우수에 찬 감수성은 서태지 음반에서 더 이상 주인공이지 않다. 가사는 여전히 사랑의 상실을 이야기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것을 노래하는 음악가는 더 이상 외로워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댄스를 추고 있고 심지어는 어딘지 들뜬 모습이다. 서태지의 등장과 함께 '빠순이' '빠돌이' 등으로 칭해지는 '10대 팬덤 문화'가 처음으로 형성되게 된다는 점을 기억하라. 10대의 특징은 아직 그들이 과거를 추억하거나 사랑의 상실을 노래할 위치에 있지 않다는 데 있다. 그런 그들이 미친듯 지지한 것이 서태지다. 쉽게 말하면, 서태지의 등장과 함께 가요는 더 이상 '가요무대' 위에 서지 않게 된다. 이제 그것은 '인기가요'를 자신의 무대로 삼게 된다. 대중가요가 더 이상 어른을 위한 감정을 노래하는 가요가 아니게 된다는 뜻이다.
이러한 지각변동 위에서 1994년에 서태지가 "발해를 꿈꾸며"나 "교실 이데아"와 같은 사회적 목소리를 담은 곡을 들고 나오게 되는 것은, 당시 다소 뜬금없어 보이기도 했지만, 사실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모든 전통이 이미 뒤흔들린 후였기 때문이다. 우수에 차지 않은 댄스 가수가 애절한 발라드를 부르는 것이 가능해졌듯, 이번에는 가벼워보이는 댄스 가수가 무거운 사회적 주제를 노래하는 것이 가능해졌을 뿐이다. 그러한진대 댄스를 추다가 뜬금없이 록-메탈 음악을 하는 것이 무엇이 대수란 말인가? (게다가 서태지는 시나위 출신이지 않았던가? 거꾸로 이제 그의 본질이 나오게 된 것이지 않은가?) 이제 형식과 내용이 일치하는 삶의 '진정성'은 핵심이 아니다. 혼종성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형식은 우리의 삶이 뿌리내린 대지로부터가 아니라 심지어 저 멀리 미국 대중 음악 시장으로부터 수입되어 들어올 수도 있다. (당시 서태지보다 훌륭한 대중 음악 형식 수입상도 없지 않았던가? 그에게서 랩 음악이 그랬고, 힙합이 그랬고, 갱스터 랩이 그랬고, 얼트 록이란 것이 그러한 것이었다.) 서태지가 사회적 메세지를 담은 곡들을 들고 나오게 되는 것은 이러한 혼종적 맥락 속에서다. 그리고 그와 함께 드디어 감정의 '진성성'에 호소하는 기존의 '사랑 노래'는 사회 문제를 다루지 못하는 구태로서 비판에 직면하게 된다.
그러나 사실 '사랑 노래'에 대한 비판은 서태지가 1980년대 저항적 민중가요를 대중가요식으로 계승한 게 아닌가 하는 착시현상 속에서 일어난 비판이기도 했다. 여기서 1988년 서울 올림픽 이후 한국 사회에 도래한 물질적 풍요와 개방의 물결 속에서 융성하게 된 담론 중의 하나가 '여전히 개발도상국에 불과한 우리가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트린 것이 아니냐'는 식의 도덕주의적 자아비판이었다는 점을 기억해야한다. 이는 1980년대 말 및 1990년대 초에 도래한 '시티팝'적 정서가 사실은 이미 당대의 쾌락주의적 도락의 분위기 속에서 만들어진 새로운 대중적 감수성을 담아내는 양식이었다는 뜻과 같다. 이러한 자아비판의 배경을 제공했던 조류의 하나가 1980년대 민중가요 전통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즉, 독재 정부에 항거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저항적 민중가요의 관점에서 봤을 때 '사랑 노래' 및 '시티팝'은 (계몽되지 않은, 즉, 분단 상황이 만들어낸 '민족 모순'과 계급 갈등이 만들어내는 자본주의적 '계급 모순' 및 독재 정권의 문제에 무감각한) 중산층이나 즐기는 도락 혹은 감정적 사치품, 즉, '럭셔리'의 한 가지 양식이었을 뿐이다.
물론 민중가요에 대한 본격적 도전은 '사랑 노래'의 전통을 '댄스 음악'에 접목함으로써 대중 가요의 판도를 바꾸게 되는 서태지의 등장 그 자체였지 다른 게 아니었다. 따라서 여기에는 역설이 있다. 1992년 서태지의 등장은 단순히 '댄스 음악' 및 '랩 음악'의 등장이라는 데 그 의미가 있지 않았다. 동시에 그것은 '사랑 노래'와 '시티팝'의 완성으로서의 의미도 지닌다. 말하자면 '댄스 음악'이 '시티팝'을 완성시킨 동시에 그 시대 자체를 종결시킨 것이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1집에 실린 "너와 함께한 시간 속에서"나 "이제는"과 같은 곡을 들어보라. 전혀 댄스 음악이 아닐 뿐만 아니라 당대 유행하던 '시티팝'의 연장선 상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경향은 그의 1994년 3집에 오면 거의 사라지거나 약화된다. 오히려 거기서 중심은 록-메틀이다. 그리고 그는 록-메틀 형식에 맞는 가사를 완전히 새롭게 도입하게 된다. 그것이 "발해를 꿈꾸며"이고 "교실이데아"다. 그래서 사실 이는 서태지가 딱히 사회 문제에 관심이 있어서라기보다 메틀을 가지고 '사랑 노래'를 부르는 것이 얼토당토 않은 일이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벌어진 일이라고 보아야 적절하다. 그러나 민중가요의 입장에서 해당 곡은 좀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그것은 대중가요를 가지고서 체제 저항의 정서를 공유하는 것이 가능한 것이 아닌가 하는 기대감으로 다가왔다.
여기서 요점은 당시 "발해를 꿈꾸며"나 "교실 이데아"와 같은 곡이 전체 사회에 대한 관점을 상실한, 즉, 개인의 자아에 갇힌 '사랑 노래'에 대한 안티테제와 같이 들렸다는 데 있다. 이러한 노선이 초창기 힙합 음악이 담아내던 사회 비판적 가사의 전통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은 사실이다. 듀스가 좋은 예다. 그들이 써낸 최고의 곡 중 하나인 "의식혼란"은 개인의 자아와 사회 사이의 긴장을 잘 담아내고 있다. 그러나 2000년대 이후 이러한 전통은 부침을 겪게 된다. 'YG의 몰락' 등을 통해 지금 시점에서 뒤돌아볼 때 알게 되듯 서태지식 사회 비판 가사가 '사랑 노래'를 내쫓은 후 남겨진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은 '노래하는 자아' 자체를 상실한 순전한 몸뚱어리들의 유아독존식 힙합 가사다. (즉, 사회 비판적 대중가요는 전혀 민중가요의 바람대로 발전하지 않았다. 물론, 주목할 만한 사례가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다. 민중가요적 이상에 가장 근접했던 대중가요의 하나는 루시드폴의 2007년작 "사람이었네"다.) 1990년대에는 사회와의 긴장 관계에 있던 랩을 하는 개인의 자아가 2010년대에 와서는 사회에 대해 완전한 승리를 거두고 '내가 제일 잘 났어'--즉, '내가 곧 사회이고 정의야'--라는 식의 유아론으로 퇴행하게 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사회와의 외적 긴장을 상실하게 되자 개인의 내면 혹은 자아 또한 불필요해져 덩달아 폐기처분되기에 이른 것이다. '젊고 멋진 육체를 뽐내는 내가 곧 법이고 정의'라는 생각이 'YG 힙합'이 개방한 '양아치 정서'의 요점이지 않은가? 그후 2010년대 '아이돌 음악'이란 것은 'YG 정서'가 열어낸 장 속에서 움직이게 된다. 그러한 맥락 속에서 최근 아이돌 음악에서 찾아볼 수 없게 된 것이 노래하는 자아가 전달하는 감정이고 '사랑 노래'라고 말해보는 것이 가능하다. 이것이 오늘날 대중 가요에서 순진함과 영혼의 청명함이라고 할 만한 것이 사라지게 된 배경이다.
그렇다면 감정이 사라진 오늘날 아이돌 음악 속에서 우리가 만나는 것은 무엇인가? 육체적 자극이 그것이다. 아이돌 음악에서는 가사와 가사를 보조하는 연주가 전달하고자 하는 인간의 감정이 사라진 자리를 전자음으로 합성된 청각적 자극과 섹스 어필에 기반한 안무의 시각적 자극이 차지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들은 시청자의 육체에 직접 작용한다. 여기서 감정과 육체적 자극의 차이를 분명히 구분할 수 있어야한다. 감정은 지적 작용을 최소한도로라도 필요로 한다. 반면, 육체적 자극은 그러한 것을 전혀 필요로 하지 않는다. 다시 한번 '사랑 노래'란 것의 특성을 생각해보라. 사랑의 경험은 대부분 이별 후에 그 의미를 획득하게 된다. 즉, 사랑 경험은 사후적 의미화의 작용을 거치며 한 인간의 삶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게 된다. '사랑 노래'의 요점이 지금 연애를 하는 중이라 행복하다는 쾌락을 전달하는 데 있지 않다는 뜻이다. 오히려 헤어진 후의 아픔을 노래하고자 한다. 즉, 쾌락적 대상이 상실된 것 자체가 고찰의 대상으로 올라서게 된다. 여기서 오늘날 아이돌 음악의 가사에서 연애 감정이 상실의 경험으로서가 아니라 주어진 현재가 제공하는 달달한 쾌락의 경험으로서 등장한다는 점을 보아야한다. 다시 말해, 상실의 경험에 기반했던 과거의 '사랑 노래'를 대체하는 오늘날의 노래는 (자신의 바로 옆에 애인을 팔짱에 끼고 있는) 달달한 '연애 노래'라고 할 만하다. 이러한 바탕 위에서 '내가 제일 잘 나가'라는 가사로 나아가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욜로 문화'를 통해 자기만족적 '현재'라는 시점이 강조되는 경향, 최근 먹방 등을 통해 음식이 쾌락을 충족시키기 위한 도구가 되어가는 현상, 핫팬츠나 레깅스 등을 통해 육감적 육체가 전면에 나서게 된 경향 등의 공통점을 볼 수 있어야한다. 즉, 오늘날 도래한 대중 문화의 특성은 어떻게든 지금 이 순간의 육감적 쾌락에 호소하고자 한다. 이는 과거의 기억도 미래에 도래할 더 나은 삶에 대한 비전도 중요치 않다는 뜻과 같다. 다시 말하면, 여기서 사라지는 것은 물질적 경험의 '내면화'다. '추억'을 생각해보라. 추억이 가슴 시리도록 느껴지는 것은 그것이 물질적 실체를 잃은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즉, 기억은 비물질이다. 그것은 '내면'을 통해 다시 찾아온 물질이지 쾌락적 물질 그 자체가 아니다. 미래에 대한 조망이란 것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 물질의 상을 뜻하며 그런 한에서 그것은 아직 '내면'에만 존재하는 물질과 같다.
오늘날 아이돌 음악에서 '인간의 감정'이 사라지게 된 것은 바로 이러한 '내면'의 상실과 관계가 있다. 내면이 상실된 인간에게서 감정을 대체하는 것은 부분적 육체의 자극과 쾌락이다.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강조되는 육체의 부위는 가슴이고 허벅지이고 엉덩이다. 동일한 맥락에서 인간의 얼굴이 강조되는 방식 또한 바뀐다. 즉, 이제 사람들 사이에서 얼굴은 한 인간의 삶과 인생을 드러내는 영혼의 창구가 아니다. 그것은 이제 그저 품평의 대상이 된다. 얼굴은 누가 더 예쁜지 그 등급을 매기기 위한 부위의 하나로 격하된다. 그리고 그 기준은 연예인의 얼굴이다. 누구의 얼굴이 더 연예인들이 보여주는 예쁜 얼굴과 비슷하게 생겼는지가 그 품평의 기준이다. 그런 의미에서, 만약 얼굴이 영혼을 담아낸다면, 이제 그것은 복제된 가짜 영혼의 창구로 기능한다.
인간이 그저 육체가 되는 현상과 젠더 구분이 사라지는 현상은 동시적이다. 흔히 사회적 성 역할 구분이라 여겨지는 젠더 구분이 약화되는 사회에서 거꾸로 강화되는 것은 생물학적 의미의 섹스 자체다. 성 역할의 구분이 강조되었던 전통적 남성 중심 사회에서 남성과 여성의 이분법이 흔히 정신과 육체의 이분법과 동일시되었던 정황을 기억해보라. 흔히 여성이 불완전한 남성으로 이해될 때 그것은 여성이 정신으로 승화되지 않은 육체라는 말과 같았다. 오늘날 우리가 보는 것은 이와는 전혀 다른 현상이다. 그것은 남성이든 여성이든 동일하게 섹스의 지위로 환원되는 현상이라 할 만하다. 즉, 이제는 여자든 남자든 가릴 것 없이 전부 다만 육체일 뿐이다. 다시 아이돌의 특징을 생각해보자. 오늘날 아이돌 가수의 특징은 얼굴에 있어 남성이든 여성이든 동일하게 '예쁘다'라는 기준으로 통합되고 있다는 데 있다. 즉, 아이돌 가수 얼굴에 있어서보다 '성평등'이 잘 달성된 분야도 없다. 남자든 여자든, 화장을 해서든 아니면 다른 어떤 수단을 동원해서든, 다들 예쁠 뿐이다. 여기서 '예쁘고 귀엽다'와 '아름답다'를 분명히 구분할 수 있어야한다. 칸트가 말하듯 '아름다움'은 '도덕성의 상징'으로 기능한다. 즉, '아름다움'의 뒤에는 도덕적 준칙을 따르는 영혼의 작용이 있다. 반면, '예쁘다' 혹은 '귀엽다'의 뒤에는 '저 육체와 사귀어보고 싶다'가 있다. 혹은 '저 육체와 섹스해보고 싶다'가 있다. 여기서 '젠더'에 대한 비판이 '섹스'로 귀결될 때 남게 되는 것이 남성과 여성 모두의 육체화라는 사실을 보게 되지 않은가? 이것이 19-20세기적 상황에 기반한 전통적 페미니즘이 최근 10-20대 남성들 사이에서 큰 공감을 얻지 못하는 배경일 것이다. 즉, 그들이 느끼는 것은 '나도 (여자인) 육체와 다를 바 없는 한낱 (남자인) 육체일 뿐이다'이다. 더 나아가 그들이 느끼는 것은 '자칫하면 쟁쟁한 '(여자인) 육체'와의 경쟁에서 낙오되어 평생 '육체 노동자'가 되어야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다. 여기서 전제되는 것은 '제한된 쾌락을 차지하기 위한 육체와 육체 사이의 경쟁'이다. (즉, 이러한 사회의 전제는 더 이상 이론적-지성적 작업을 통해 남성 중심 정신 세계를 새롭게 정의내리기 위한 정신과 육체 사이의 대립이 아니다.) 육체의 쾌락을 추구하는 일('욜로' 혹은 일과 놀이가 하나된 구글적 삶)이 육체의 고통(구글적 삶이 감추지 못하는, 여전히 존재하는, 고된 육체 노동자의 삶)으로 끝날지도 모른다는, 출구를 상실한, 폐쇄적 전망이 바로 오늘날 도래한 육체의 시대가 치루어야 할 대가이지 않은가?
마지막으로 다시 '욜로'로 돌아가보자. 사실 '욜로'는 '쾌락주의적 퇴폐'와 구분되기 쉽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욜로'는 사회 내에서 정치 변혁의 전망이 불가능해질 때 강해지는 경향이 있다. 이미 역사는 종언에 이르렀다는 생각, 우리는 '최후의 인간'이라는 생각, '내세'는 없으며 오직 '현세'만이 전부라는 세속주의적 발상, 그리고 그 '현세'의 모든 의미는 쾌락을 경험하는 데 있다는 생각 등의 최신 판본이 '욜로'이지 않은가? 이러한 맥락 속에서 한국의 '욜로' 담론이 최근 약화된 배경에 문재인 정부의 등장이 있다는 점을 볼 필요가 있다. 김어준이 운영하는 '벙커 1'을 생각해보라. 그곳에 모이는 사람들은 더 나은 미래를 꿈꾸고 있다. 그리고 그 미래는 잃어버린 과거의 기억과 관련이 있다. 그것이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이고, 노회찬 의원의 죽음이고 기타등등 이름 없이 사라져간 많은 이들의 죽음이다. 죽은 이들 혹은 사라진 것들에 대한 기억과 함께 한국 사회에 '내면'이 돌아오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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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man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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