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을 살아가는 한국의, 평범한 배경의, 그러나 재능있는, 20대가 어떤 음악을 들려줄 수 있는지 궁금하다면 '죠지'를 들어보면 된다. 듣고 있으면 동시대 20대가 들려줄 수 있는 음악의 최전선에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내 입장에서 흥미로운 것은 1980-90년대가 작금의 20대에게서 재해석되는 방식이다. 무대의 배경 이미지를 보라. '시티팝'의 상징과도 같은 1990년대 애니메이션 그림체를 보여준다. 사실 요근래 유튜브상에서 나타난 '시티팝' 유행은 이미 한물간 30-40대가 과거를 추억하는 과정에서 발굴한 과거의 한 사소한 사례였을 뿐이었다. 그러나 동일한 것이 20대에게는 새로움의 원천이었다는 점이 요점이다. 사실이 그렇다. '시티팝'을 서랍장에서 다시 꺼내 듣게 되었을 때 그건 사실 30-40대조차도 'YG'로 대변되는 '아이돌 산업'에 질렸었다는 뜻이지 않았던가?
이렇게 말해보고 싶다: 그 발생이 그러하지는 않았을지는 모르지만, '아이돌 음악'은 '이명박근혜' 정권을 거치며 섹스 산업 혹은 마스터베이션 산업의 일부로서 충실히 복무했다. 그들의 '블랙리스트'에 봉준호, 이창동, 박찬욱과 같이 예술적으로 가치 있는 인사가 몽땅 포함되어 있었다는 점을 기억하라. 예술이 사라질 때 무대 위에 남는 것은 섹스 어필일 뿐이다. 입은 것인지 벗은 것인지 알 수 없는 여자 아이돌의 의상, 섹스 동작을 그대로 빌려온 아이돌 댄스 동작들, 그 모든 것들은 그저 1980년대 전두환 정권이 도입했던 3S 정책 (Sex, Sports, Screen)의 아주 세련된 최신 판본에 불과하지 않았던가?
그들 '이명박근혜'와 함께 한 9년은 '지겨운 섹스'의 시대였다. 정치적 사회 변혁의 희망이 사라질 때 남는 것이 바로 '지겨운 섹스'다. 사회 변혁은 공개된 광장에서 벌어지는 사회적 섹스다. 타락한 양아치들만이 몰래 쥐새끼처럼 방구석에서 숨어서 '물뽕'으로 남의 육체를 착취하는 일을 '섹스'라고 부른다. 봉준호가 칸에서 상을 탄 것은 한국에서 '지겨운 방구석 섹스의 시대'가 끝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봉준호에 따르면, "예술은 세상을 바꾸지 못한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이는 '예술은 방구석에서 행해지는 지겨운 섹스 혹은 자위 행위에 불과하다'는 뜻이 전혀 아니다. 오히려 이렇게 말해보고 싶다: '애당초 예술은 사회를 바꾸려 할 생각이 없다. 왜냐하면 예술은 사회와 섹스를 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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