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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eji, "One More," "Drink I'm Sippin On," "Raingurl"

by spiral 2018. 11. 19.

아래 예지라는 음악가는 뉴욕의 언더그라운드 씬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한국계 미국인이다. (한국계 미국인이라고는 하지만 초중고를 한국에서 보낸 바가 있어, 물론 인터내셔널 스쿨이기는 했지만, 기묘하게 한국계 미국인 특유의 미국화된 느낌과는 다른 한국적 감수성을 풍긴다. 이는 예지를 이해하는 데 있어 간과되어서는 안되는 요소다. 즉, 예지의 한국성은 단순히 미국인이 만들어낸 한국계 퓨전 음식을 바라보는 것과는 다른 무엇을 지니고 있다. 이것이 예지가 미국인들 사이에서 독특하게 현상하며 인기를 끌도록 만드는 원인 중 하나다.) 씬 내에서 인기가 상당하다. 흥미로운 점이 아래 뮤직 비디오에서 사용되는 한국적 요소들, 예컨대, 한국어 및 한국 음식 등이 외국인이 신비롭게 바라보는 이국적 한국성과 한국인이 스스로를 서양인으로 포장해내고자 하는 한국적 이국성 (예컨대, 오늘날 BTS가 표상하는 세계적 한국성) 사이의 경계선 위에 아슬아슬하게 머물고 있다는 데서 발견된다. 요점은 외국인이 한국적인 것에 대해 느끼는 흥미와 한국인이 외국인들 사이에서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 사이에 있었던 기존의 거대한 거리가 메워지며 서로 수렴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이제는 한국적인 것과 세계적인 것 사이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있다. 한국적인 것은 더 이상 순수하게 한국적이지 않으며, 세계적인 것은 단순히 순수하게 서양적이거나 외래적이지 않다. 모든 것은 융합되고 있으며 우리의 삶 자체가 세계적 모호성 속에서 다시 태어나고 있다. 이를 묘사하기 위해 '세계적'이라는 말 대신 '전지구적'이라는 말을 사용해볼 수 있을 것이다.

관련하여 서양과 일본 등에 열등감을 가지고 자학적으로, 예컨대, 일제 식민지 치하를 살아가는 자기비하적 1970년대적 감수성으로는 (혹은 이명박근혜식 적폐 세계관으로는) 더 이상 새롭게 등장하는 세대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란 점을 분명히 보아야한다. 이미 작금의 10대 및 20대들이 구현하는 한국성은 전지구성과 구분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보자. 이곳 미국에 처음 왔을 때 난 노트북 컴퓨터를 구매하며 한국어 자판이 찍히지 않은 키보드를 갖게 된 것에 은밀한 즐거움을 느꼈다. 그러나 지금 난 새로운 컴퓨터를 한 대 다시 마련하며 이번에는 한국어 자판이 기록된 맥북을 들고 다니게 되었다는 사실에 은밀한 매력을 느낀다. 이 차이가 무엇인지 분명히 인지해야한다. 미국인이 만들어낸 맥북에 찍힌 한국어 자판은 더 이상 '세계'로부터 소외된 변방의 국지성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거꾸로 '세계적'인 것이 그 스스로를 변혁 및 추동하는 동력으로서 '세련됨'의 증표와 같다. 아래 "One More"의 비디오에서 한국어 및 한국 음식이 등장하는 방식이 정확히 그러하다. 아래 비디오에 등장하는 인물이 예지를 제외하고는 전부 서양인의 외모를 하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곡의 후반부에 등장하는 춤추는 관객들을 보라. 저 모습은 예지가 뉴욕의 언더그라운드에서 디제잉을 할 때 주변에서 일어나는 장면을 그대로 재현한 것이다. 반면 예지가 스스로를 스타일링하는 방식은 오늘날 한국의 20대 사이에서 쉽게 볼 수 있을 법한 방식을 따르고 있다. 예지가 자신을 꾸미는 방식이 첫째로 그러하다. 한 예로 저 커다랗고 동그란 안경을 보라. 저것은 한국의 증표지 미국의 증표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해당 뮤직 비디오가 공간 및 이미지를 전개하는 방식 또한 오늘날 최신의 한국 아이돌 뮤직비디오에서 발견되는 세련됨과 크게 다르지 않은 특징을 보여주다. 말하자면, 아래 뮤직비디오에서 춤을 추며 즐기는 서구인들은 정확히 한국적 이미지 및 한국적 사운드로 채워진 '공간' 자체의 '분위기'를 즐기고 있는 것이다. 예컨대, 인터뷰에서 왜 한국어 가사를 사용하는지에 대해 설명하며 예지는 한국어 가사 부분이 미국인들 사이에서 겉으로 내놓기 부담스러운 개인적 감정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라 한 바 있다. 미국인들이 한국어를 못알아듣기 때문에 가능한 일인 셈이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결과적으로 한국어 가사 부분이 의미화되지 않는 감정 그 자체를 전달하는 것으로서 미국인 청자들 사이에 정서적 공간감을 형성한다는 사실이다. 

오늘날 한국적인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자 한다면, 혹은 더불어 1990년대생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고자 한다면, 아래 비디오를 이해할 수 있어야한다. 예컨대, 만약 한국인으로서 한국어를 들으며 혹은 한국어 문자를 보며 단순히 '세계적' 기준에 이르지 못하는 촌스러운 변방의 언어라고 느낀다면 1970년대식 세계관의 포로가 된 구식 꼰대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한가지를 더 유추할 수 있어야한다. 21세기에 한국계 미국인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미국적이어서는 안된다. 예전에 1990년대에 '교포'라고 불리던 자들이 한국어를 하나도 못하는 상태로 한국에 돌아와 풍기던 '이국성'과 오늘날 등장하는 '한국적 전지구성'은 분명히 구분되어야한다. 한국어를 전혀 못하는 자가 영어를 씨부렁거리며 '교포' 행세를 할 때 이제는 거꾸로 그 안에서 '촌스러움'을 볼 수 있어야한다. 한국의 밖에서 영어는 더 이상 쿨하지 않다. 생각해보라. 모두가 영어를 쓸 때 그 언어는 전혀 쿨하지 않다. 여기에 오늘날 미국인들이 한국어에 매력을 느끼고 실제로 한국어를 공부하고자 하는 이유가 있지 않은가? 누군가는 동일한 맥락에서 미국인에게 중국어가 의미하는 바가 더 크지 않느냐고 할 것이다. 그러나 중국은 문화적으로 아직 전지구적 감수성을 달성하지 못하고 있다. 영어 이외의 언어가 쿨해지기 위해서는 문화의 층위에 있어서 전지구적 감수성을 하나 더 달성해야한다. 비슷한 맥락에서 독일어나 프랑스어는 어떠냐고 질문을 해볼 수 있다. 해당 언어는 학식이 있는 이른바 '배운 사람들' 사이에서 동일한 쿨함을 지닌다. 거꾸로 말하면 지나간 시대에 독일이나 프랑스의 문화가 문화적 쿨함을 지녔었다는 뜻이고 그 위에서 그들이 학문적 성과를 또한 보였었다는 뜻이다. 19세기 말 20세기 초를 지나며 모더니즘 예술을 통해 독일어나 프랑스어가 달성했던 문화적 쿨함을 떠올려보라. 그러나 오늘날 젊은 미국인들 사이에서 독일어나 프랑스어는 옛 시절의 언어로서 동시대적 매력의 대상은 아니다. 오늘날 바로 이 사이 공간에서 한국어 및 한국적 전지구성이 미국인들 사이에서 먹히고 있다는 점을 보아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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