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큰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은 더 이상 철학자들이 아니라 과학자들이다. 21세기에 철학의 지위에 걸맞는 학문은 과학이지 철학이 아니다. 오늘날 인문학이 영향력을 잃은 이유에는 여러가지가 있다. 하지만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인문학이 사소해졌다는 데 있다. 심지어는 다음과 같은 역설적인 진술이 가능하다: '철학이 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과학을 해라. 특히 물리학과 수학을 해라.' 오늘날 세계의 중심에서 철학을 하고 싶다면 인문학 이전에 물리학을 이해할 수 있어야한다. 세상의 변방에서 철학을 하고 싶은 자는 고전적 인문학과로 가도 된다. 다만 과거지사로서 철학을 역사적 관점에서 논하게 될 것이다. 반면 메타피직스는 늘 초역사적이었다. 철학의 역사화, 이보다 더 인문학을 사소하게 만든 경향도 없다. 물리학이 오늘날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은 물리학이 역사의 외부에 있기 때문이다. 시간의 이전과 이후를 사유하는 것이 메타피직스가 아니던가. 오늘날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학문은 물리학이지 인문학 내 철학이 아니다. 카를로 로벨리 같은 물리학자가 대표적이다. 메타피직스는 시간의 외부에 있다.* 21세기 들어 인문학이 영향력을 잃어버리게 된 배경에는 모든 것을 세속적 시간 속에서 사고하고자 했던 인문학의 20세기적 경향이 있다. 물론 21세기의 메타피직스는, 아래 인용문이 말하듯, '아주 독특한 물리적 시스템'으로서 '진공'에 기반한다. 물질 자체가 제로, 즉 진공이다. 참고로 귀도 토넬리는 힉스 입자 발견에 기여한 실험에 참여한 이탈리아의 물리학자다. 아래와 같은 물리학자의 글을 읽을 때면 역사화를 주장하는 20세기식 인문학이 시시하다고 느껴진다. 물론 역사는 중요하다, 대단히 중요하다. 그러나 동시에 역사는 우주의 관점에서 사소한 먼지에 불과하기도 하다. 어째서 벤야민과 같은 사람이 역사적 유물론을 이야기하면서도 동시에 신학의 층위를 고수했는지 생각해보라. 차이가 있다면 오늘날은 신학을 대체하는 것이 과학이라는 사실이다.
* 칸트 이후 메타피직스를 인간 주체에 기반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된 맥락이 있다. 그 결과의 하나는 시공간을 인간의 직관적 세계 인지 능력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시공간을 구성하는 인간의 직관에 기반하게 되면서 기존의 메타피직스에 변화가 찾아오게 된다. 물자체와 인간의 세계 이해 사이의 구분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획기적인 발상이었으나 실은 여기서부터 인문학이 초라해지기 시작했다고 말하는 것 또한 가능하다. 인간계에 갇혀버렸기 때문이다. 물론 그 이후 인간계 너머의 것에 대한 조망을 하는 요소들이 등장하게 된다. 숭고가 한 예다. 아름다움 또한 인간의 정념에 기반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지게 된다. 사실 대략 20세기까지 인간의 경험적 현실을 넘어서는 부분에 대한 논의가 인문학을 먹여살렸다고 봐도 무방하다. 21세기는 이러한 논의 마저 힘을 잃은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인간계 외부로 나아가고자 하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이 중심에 있는 것이 과학과 수학이다. 과학과 수학이 인간계 너머의 현실을 논하는 보다 분명한 수단임이 드러나고 있다. 그 결과 과거 방식의 인문학은 더 이상 주목의 대상이 되지 못하게 되었다. 한 예로, 20세기 후반에 큰 주목의 대상이 아니었던 바디우의 수학적 존재론이 오히려 21세기에 와서 주목의 대상이 된 배경에는 이러한 변화가 있다. 수학적 존재론은 그 어떤 인간의 경험적 현실도 전제하지 않는다. 칸트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동시에 바디우는 주체를 논한다. 기이한 일이다. 이 때문에 지젝은 바디우 주체 이론의 한계를 논한다. 지젝의 주체 이론은 수학적 존재론에 기반하면서 동시에 훨씬 더 헤겔적 혹은 변증법적이다. 난 지젝의 입장에 공감한다. 그러나 바디우가 21세기에 어울리는 철학을 제시했다는 점은 분명하다. 지젝 또한 바디우에게서 영향을 받은 게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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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앞에 진공이 펼쳐진다. 대놓고 잘못 지어진 이름에도 불구하고 결코 비어있지 않은 진공은 아주 독특한 물리적 시스템이다. 물리학의 법칙은 가상적 입자로 진공을 채운다. 그 가상적 입자는 미친 리듬 속에서 나타났다 사라진다. 제로를 중심에 두고 계속해서 요동치는 값을 지닌 에너지의 장으로 진공을 채우면서 말이다. 누구든 거대한 진공의 저장고로부터 에너지를 빌려올 수 있다. 빌려온 게 더 클수록 더 짧은 삶을 살게 된다.
"Before us extends the void, a very peculiar physical system that despite its frankly misconcieved name is anything but empty. The laws of physics fill it with virtual particles that appear and vanish in frenzied rhythm, packing it with fields of energy whose values fluctuate continuously around zero. Anyone can borrow energy from the great bank of the void and live an existence the more ephemeral the greater the debt acquired."
Guido Tonelli, Genesis: The Story of How Everything Beg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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