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의 중반에 엔딩 크레딧이 올라간 후에야 곡의 참모습이 드러나는 형국이다. 곡에 대한 메타코멘터리가 곡의 절반을 차지하는 셈이다. 사실 이러한 구성은 오늘날 TV 프로에서 쉽게 볼 수 있다. 예컨대, 언제부터인가 PD가 자신이 기획하는 프로그램 내부로 들어오기 시작했고, 그의 개입이 프로를 더욱 흥미롭게 하는 식이 되었다. 김태호나 나영석이 대표적이다. 말하자면, 오늘날 현실은 그 자체로 항상 현실초월적 요소를 그 자신 안에 포함하고 있다. 거꾸로 말하면, 과거 신과 같은 지위에 있었던 PD들이 지상으로 내려왔다고 할 수도 있다. 제작자는 더 이상 절대적 위치에 있지 않다. 김태호와 유재석의 관계를 보라. 유재석은 김태호의 틀 안에 묶인 자신의 신세에 한탄하며 웃음을 유발하면서도 동시에 김태호의 지시를 기계적으로 따르지도 않는다. 혹은, 최근 출연자들은 방송중 PD에게 읍소하며 분량 이야기를 하고 다음번 촬영에도 불러달라고 '네고'를 한다. 여기에 절대적으로 안(제작물)과 밖(제작자)을 나누는 경계선은 존재하지 않는다. 비슷한 방식으로 아래 뮤직비디오에서 실리카겔의 곡은 중간에 끝나는 것으로 설정된다. 그 후 영상을 제작하는 제작자의 모습이 등장한다. 그러나 그의 작품 속 인물과 영상 제작자는 결국 서로 한 공간에서 얽히며 그 경계가 무너진다. 칼을 들고 영상 작업을 하는 사람을 찾아온 여성의 모습을 보라.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연출된 것인지가 모호해진다. 전반부에서 제시된 살인 사건을 재현하려는 듯한 영상이 의미론적으로 별로 짜임새를 지니고 있지 않으며 다만 여러 암시만 애매하게 남기며 끝나는 이유가 여기 있을 것이다. 애당초 사건의 서사적 재현이 뮤직비디오가 보여주고자 한 바가 아니기 때문이다. 아래 곡에서 엔딩 크레딧 이후 곡의 후반부가 전반부보다 더 흥미롭게 다가오는 것은 그 때문이다. 말하자면, 영상 속으로 개입한 PD의 모습이 PD가 제작하는 영상보다 더 재미나는 요소가 되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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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yo181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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