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의외의 말 같이 들릴지 모르지만, 국립현대미술관 같은 곳에 가서 작품을 실제로 느끼고 감상하기는 쉽지 않다. 차라리 집에 앉아서 사진이나 영상, 그리고 관련 자료를 찾아 보는 것이 미술관에 전시된 현대 작품을 느끼기에 더 나은 방법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로는, 서서 움직여가며 작품을 보기에는 신체가 힘들다. 피곤해서 집중을 하기 어렵다. 몸이 편해야 정신이 작동을 하는 법이다. 그러나 미술관 내에서 그러한 여유는 주어지지 않는다. 영상 작품의 경우 의자가 준비되는 경우도 있지만 나머지 작품은 전부 서서 봐야한다. 간이 의자를 들고 다니며 작품 앞에 앉아서 보고 싶다고 느낀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주변의 관람객도 문제다. 시야를 가리고 동선을 막는다. 작품을 느끼려면 아무도 없는 곳에서 나와 작품 단 둘만 있어야한다. 그에 비해 미술관에서는 다른 관객의 존재가 그 온전함을 깬다.
둘째로, 작품의 수가 너무 많다. 사실 현대 미술은 공간의 거대함에서 오는 분위기 그 자체를 느끼도록 설정된 작품이 아닌 경우 실물을 꼭 봐야할 필요가 없다. 원본이라는 개념이 별로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 미술관에 직접 갈 경우 작품이 너무 많아서 미술관 전체를 한 바퀴 돈다는 의의를 달성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정작 그 어느 작품에도 집중을 할 수 없다. 이렇게 되면 그저 느슨하게 공간 전체의 이미지 외에는 남는 게 없게 된다.
세번째 이유는 미적 상품의 범람과 영상 기술의 발전과 관계가 있다. 구태여 미술관에 가지 않아도 영화관 및 인터넷 등을 통해 자극적이고 충격적인 이미지들이 넘쳐난다. 솔직히 현대 미술관에 가서 새로운 감각을 얻는다는 느낌을 거의 받지 못한다. 대부분의 경우 아무 느낌도 없다. 일상 속에도 진귀한 물건은 넘치고 넘친다. 온갖 상품들이 욕망을 자극해온다. 오늘날 예술가 하기 어렵겠다는 느낌을 받는다. 전쟁터와 같은 곳에서 평생을 살아온 사람이 미술관을 처음 방문할 때의 그 환희를 생각해보라. 혹은 그러한 사람이 화려한 고딕 성당을 처음 방문할 때의 느낌을 생각해보라. 오늘날 사람들은 미술관에서 그러한 감각적 충만함과 충격을 느끼지 못한다. 감각의 강렬함은 대상 자체에서 오지 않는다. 삶의 조건에서 온다. 감각을 느끼기 위해서는 황무지와 같은 실재가 배경에 있어야 한다.
물론 이는 예술이 실재 자체를 제시해야한다는 뜻이 아니다. 실재는 제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실재는 개념의 파괴 혹은 확장을 통해서만 접근가능하다. 거꾸로 말하면, 예술이 내러티브나 개념을 완전히 포기할 경우 거꾸로 아무 느낌도 주지 못할 수 있다. 예컨대, 어째서 미술가는 이미지로 구성된 미술작품에 구태여 언어의 형태로 제목을 다는 것일까? 어째서 미술관은 작품 옆에 작품 설명을 붙이고자 한단 말인가? 또 어째서 사람들은 '이해가 되지 않는' 작품을 감상하기 위해 해당 설명을 읽고자 한단 말인가? 이는 작품 자체가 개념을 어떻게 파괴하거나 확장하고자 하는지를 혹시 관객이 알아채지 못할까 걱정이 있기 때문이 아닌가? 최근 생태학적 관심 속에서 많은 작품이 자연 자체 혹은 물질의 상태로 돌아가고자 하는 것 같다. 그러나 개념이 없으면 관객은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한다. 햇빛에 노출되면 사라져버리는, 자연에서 온 특정한 안료로 색을 구현한 회화를 아무런 설명 없이 미술관에 걸어놓았다고 치자. 이 회화 작품은 바위의 표현을 잘라놓은 것 같은 모습이다. 문제는 안료의 성분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이 작품에는 별로 주목할 요소가 없다는 데 있다. 동시에 미술관 내부로 들어와 햇빛으로 차단된 상태에 있는 이 작품은 자신의 소멸하는 특성을 들어낼 수 없다. 시간적으로도 불가능하다. 작품에 대한 설명이 없으면 아무 감흥도 일으키지 못한다. 시골에서 닭을 키우는 장소를 미술관에 옮겨놓은 작품도 있다. 모이와 물을 놓는 그릇이 보인다. 그 주변에는 모래가 어지럽게 펼쳐져 있다. 닭을 묶어둘 법한 긴 끈이 놓여 있기도 하다. 그런데 정작 가장 중요한 닭은 없다. 이게 닭을 키우는 장소라는 사실은 벽에 붙은 일련의 사진을 통해 알 수 있을 뿐이다. 벽에는 해당 장소에서 끈에 묶인 닭이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살아가는 모습의 사진이 5-6장 붙어 있다. 차마 실제 닭을 가져다놓지 못한 결과 일어난 일이다. 닭이 생존 투쟁 중 만들어내는 장소의 물질적 변화도 예술일 수 있다는 의미다. 사진은 일종의 해당 작품에 대한 개념 설명서 같은 것이었다. 예술은 물질만으로 이루어져있지 않다. 개념이 필요하다.
현대미술을 감상할 수 있으려면 다음과 같은 조건이 충족되어야한다: 1) 작품과 감상자 둘 만 있을 수 있을 것, 2) 작품의 수가 적을 것, 3) 작품 앞에 앉아서 충분한 시간 동안 생각하고 고민할 수 있을 것. 쉽게 말하면, 현대미술의 경우 미술관은 도서관의 형태에 더 가까워야한다. 감상자를 다른 시공간으로 옮겨놓지 못한다면 현대미술관은 미술관으로서 기능을 못한다고 봐야한다. 연구자에게 완전히 다른 시공간을 선사한다는 점에서 차라리 도서관이 더 현대미술관에 가깝다고 말하고 싶다. 현대미술의 감상은 연구와 거의 동일한 층위에 있다. 그러나 현대미술관에 가는 것은 도서관에 가는 것보다 불만족스럽다. 작품만 가져다 놓을 것이 아니라 해당 작가에 대한 저술 및 관련 연구서도 가져다 놓고 앉아서 보고 읽으며 생각할 수 있게 해야한다. 앉아서 생각할 자리가 없는 미술관은 현대미술을 다만 한 곳에 모아서 수감하고 있을 뿐이지 감상을 위한 자리는 아니라고 봐야한다. 이는 현대미술의 의미가 항상 생성 중에 있기 때문이다. (작금의 전시 방식은 개인 감상자를 염두에 두고 있지 않다. 그보다는 대규모의 인원, 즉 대중으로 하여금 일련의 작품을 스쳐가도록 만든 것에 불과하다. 이것은 지하철이 출발지와 목적지 사이를 잇는 도구에 불과한 것과 같은 일이다. 지하철은 정해진 시간에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정확하게 움직인다. 그러나 목적지까지 가는 중간에는 지옥이 펼쳐진다. 출퇴근시간을 생각해보라. 수백 수천의 신체가 화물과 같이 포개어져 목적지로 수송될 뿐이다. 화물이 지능을 지니고 있어서 로봇처럼 알아서 자기자신을 목적지까지 배송한다는 것이 조금 다를 뿐이다.)
마지막으로 하나 더. 나는 미술보다는 음악에 본질적으로 끌린다. 왜 그럴까? 앞서 말한 모든 조건을 충족시키는 것이 음악이기 때문이다. 첫째로, 음악은 온전히 작품과 감상자만이 존재하는 세계다. 물론 음악에도 종류가 있다. 예컨대, 민중음악은 집단적 감수성에 기반한다. 그러나 아래 원오스릭스 포인트 네버 같은 음악가의 작품을 듣는 경우는 좀 다르다. 그의 음악은 현대미술과 동일 선상에 있다. 구체적 대상을 재현하지 않는다. 감각 자체를 다룬다. 온전히 소리와 감상자만이 남겨진다. 음악의 특성상 언제나 즐길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특정한 순간 최고의 만족을 주기도 한다. 예컨대, 세속에 시달려 더러운 감정에 오염되었을 때 마음을 정화시키고자 한다면 이보다 더 큰 만족을 주는 음악도 없다. 원오스릭스의 음악은 기존에 존재하던 세상, 즉 세속을 완전히 지워버린다. 결과적으로 감상자와 음악만이 남는다. 둘째로, 음악을 들을 때는 지금 들려오는 음악 이외에 다른 것을 고려할 여지가 없다. 미술관에서는 한 작품을 감상할 때 이미 주변부 시야에 다른 작품이 들어온다. 옆의 작품에 관심을 빼앗기게 된다. 마치 영화를 보는데 옆에서 다른 영화의 예고편이 상영되고 있어서 거기에 주의를 빼앗기는 것과 같은 일이 벌어진다. (이를 고려하면 방 하나에 한 작품만 들여놓아야한다. 아니면 작품마다 칸막이를 만드는 게 필요하다.) 그러나 음악에 있어서 그러한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오로지 지금 들려오는 소리 이외에 다른 소리는 없다. 셋째로, 음악을 듣는 일은 도서관적 상황과 완벽히 양립가능하다. 즉, 가만히 앉아 음악을 들으며 생각을 하고 글을 읽고 쓸 수 있다. 결과적으로 예술의 여러 형태 중 음악에 최우선적으로 끌리는 사람은 미술관을 좋아하기 어렵다. 미술관을 이용하는 방식에 비교하자면, 음악을 듣는 일은 미술관을 빌린 후 밤 중에 혼자 그곳에 앉아 작품을 감상하는 것과 같은 일이다. 음악이 주는 만족도에 길들여진 사람은 미술관에 가지 못한다. 국립현대미술관을 전세 내지 않는 한 그러한 만족은 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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