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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반학: 새로운 과거와 지겨운 현재

by spiral 2026. 1. 24.

때때로 새로운 곡을 듣기 위해서는 과거로 되돌아가야한다. 미래의 씨앗은 종종 과거 속에서 발견된다. 아래 곡은 55년 전에 발표되었다. 그러나 웬만한 요즘 곡보다 새롭게 들린다. 음반의 시대가 도래하여 좋은 점은 언제든 지겨운 현재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준다는 데 있다. 음반이 가져다준 한 가지 축복은 구태여 동시대 속에서 살아갈 필요가 없다는 데 있다. 동시대 차트에 구애될 필요가 없다. 요즘 사람들이 무엇을 듣던 좋아하던 알게 뭐란 말인가.

사실 사고의 영역에서 동일한 축복은 이미 5천 년 전에 일어났다. 문자가 그때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물론 문자 기록물이 보편화되기 위해서는 중세 말에서 르네상스에 이르는 시기까지 기다려야하기는 했다. 인쇄술이 보편화되어야 만들어진 문자 기록물이 널리 퍼질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그후 일어난 일은 모두가 다 알고 있다. 지식의 생산이 폭발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 세상 자체가 변화하여 지금의 모습에 이르게 됐다. 그리고 그 시작점에는, 르네상스가 말해주듯, 2000년 전 고전 시대의 기록물로 되돌아간 일이 있다. 르네상스는 과거로부터 미래가 태어난 시기다.

문자 생산의 역사에 비하면 소리 생산의 역사는 대단히 짧다. 축음기가 처음 나온 것은 19세기 말이고, SP가 표준이 된 것은 1920년대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소리 기록물의 역사가 시작된 것은, 미국 기준으로, LP가 가정에 보편적으로 보급되게 된 1950년대 이후라고 봐야한다. 그렇게 치면 불과 7-80년 된 일에 불과하다. 소리 기록물의 역사가 수 백년 쌓인 후에는 과거의 음원으로 돌아가 미래의 소리를 찾고자 하는 일이 본격화될 수 있다. 벌써 AI가 지금까지 만들어진 음원을 이용해 그럴싸하게 들리기는 하나 가치없는 음악을 양산해내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1천 년 후를 생각해보자. AI로 만들어진 음악이 쌓이기 시작하고 사람들이 그런 음악에 익숙해지게 되면 과거에 인간이 직접 만들어낸 소리로부터 멀어지게 될 수 있다. 그때 일어날 일은 20세기에 인류가 직접 만든 음원들을 다시 듣고 그때의 음악을 다시 부흥시키고자 하는 운동으로서의 르네상스일 수 있다.

이른바 학문은 문자 기록물이 수 백년 쌓인 후에나 가능해진 영역이다. 자연과학은 물질을 대상으로 삼기 때문에 문자 기록물에 대한 연구를 최우선으로 삼지 않는다. 자연과학 연구 기록 자체를 연구 대상으로 삼는 학문은 과학사라고 불리고, 이미 인문학의 영역에 든다. 인문학은 기본적으로 문자 기록물을 다루는 학문이다. 인문학은 기본적으로 과거의 문헌으로 되돌아가 현재의 문제를 다시 살피는 작업과 같다. 물론 동시대 인문학은 형이상학적 성질을 지닌 문헌학과 자연과학 성질을 지닌 경험론을 오가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동시대에 새롭게 축적된 자연과학적 데이터에 기반하지 않은 인문학은 세치혀를 놀리는 레토릭으로 전락할 것이다. 과거의 문헌은 '과거에 사람들이 이런 생각을 했구나'라는 참고의 대상일 뿐이다.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내용 자체는 대부분 '뻥'이다. 신화, 신학, 철학, 미학, 문학 등은, 거칠게 말하면, '뻥'을 그럴듯하게 체계화한 경우와 같다. 반면 과거의 기록물을 한낱 형이상학 혹은 신화학 정도로 여겨 완전히 폐기처분하게 되면 인문학 자체가 사라지게 된다. 가치와 도덕에 대한 논의가 완전히 빠진 나쁜 의미의 유물론만이 남게 될 것이다. 사회적으로 합의된 '뻥'을 갖는 일은 사회의 유지를 위해 대단히 중요하다. 사실 믿음의 체계 없이 살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자연과학 자체는 유물론적이지만 사회 내에서 자연과학을, 예컨대, 인문학보다 우위에 두고 추구하는 행위는 이미 사회적 가치와 믿음의 체계로 작동한다고 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 18-9세기 영국에서 생산된 문헌을 연구의 대상으로 사람으로서 말해보건대, 과거의 문헌을 탐구하는 일은 매력적이다. 시간 여행을 하며 지금과는 전혀 다른 사고 방식의 사람들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문헌의 축적 덕분에 가능해진 것의 하나가 인문학인 것과 같이 음반의 축적 덕분에 가능해질 탐구의 즐거움이 있다고 본다. 사실 새로운 음반학적 즐거움은 이제 막 시작되고 있다. 스트리밍 서비스를 통해 과거의 음반을 얼마든 즐길 수 있게 된 덕분에 가능해진 현상 중 하나가 '차트 역주행'이라는 개념이다. 과거의 곡이 뜬금없이 동시대 차트의 상위를 차지하게 되는 현상 말이다. 그러나 이는 문헌의 영역에서는 딱히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예컨대, 2500년 전 플라톤의 저서가 베스트셀러 차트의 상위에 오르는 일은 상상할 수 있는 일이지 않던가? 우리는 그러한 책을 '클래식'이라 부른다. 음반의 형태로 기록된 대중음악의 역사가 충분히 축적되면 클래식 문헌 추구와 비슷한 현상이 음반학의 형태로 일어날 수 있다. 그때가 되면 음반학자들이 지금의 문헌학자들처럼 과거의 음반을 연구하며 당대 사람들이 가졌던 감수성에 대해 논문을 쓰고 있을 것이다. 보통의 청자들 사이에서는 '난 동시대 음악은 잘 안들어, 500년 전인 20세기 중반에 나온 음악이 내가 주로 듣는 음악이야'라며 시공간적으로 전혀 다른 곳에 속하고자 하는 이들이 나오게 될 수 있다.

내 경우를 말해보자면, 난 사람이 직접 연주하지 않은 악기의 영혼 없는 소리에 만족하지 못한다. 실제 연주한 음원을 프로듀싱하는 일은 피할 수 없다. 그러나 악기 자체를 연주하지 않거나 실제 보컬을 녹음하지 않은 채 만들어지는 곡은 어딘지 근본적으로 매력이 없다. 그런 음악은 공장에서 태어난 초가공식품과 매우 유사하다. 먹어보면 자극적이라 맛있고 중독적이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몇번 들으면 자극이 떨어져 더 큰 자극이 필요하게 될 뿐이다. 음미할 부분도 생각할 부분도 없다. 지겨워진다. 그럴 때면 차라리 내가 태어나기 전에 나온 음악을 찾아듣게 된다. 아래 더후의 "바바 오라일리"는 그러한 발굴의 결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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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o's Next (1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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