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영상은 기성언론이 아니라 유튜브를 통해 뉴스를 접하는 근래의 경향을 두고 문제점은 없는지, 기성언론은 무엇을 잘못했길래 신뢰를 잃은 것인지 등을 논하고 있다. 솔직히 말하면 아직도 이런 의제를 토론한다는 게 내 입장에서는 의아하게 느껴진다. 기성언론은 사라져가는 공룡과 같은 존재다. 멸종해가는 종을 놓고 '어떻게 살릴 방법은 없는가?'라는 식의 관점에서 의제를 잡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잘 모르겠다. 다시 말해, 멸종해가는 종의 입장을 전달하는 사람을 끼워넣는 설정 자체가 이 프로그램이 결국은 레거시 미디어가 기획한 것임을 보여준다. 프로그램 진행자 손석희가 레거시 미디어의 편에 선 마지막 권위자라는 사실이 결정적일 것이다. 사실 보다 생산적인 의제 설정은 '유튜브는 무엇이며, 우리는 유튜브가 행하는 언론의 기능을 어떻게 사용해야하는가?'라는 관점에서 '사용자 매뉴얼'을 만드는 게 되어야한다. 사실 이런 관점에서 더 걱정해야할 것은 지금은 나름대로 정보 생태계의 균형을 유지하는 관점에서 알고리즘이 작동하지만 어느 순간 모든 방송의 유일한 통로가 될 때 유튜브가 회사의 이익을 위해 정보를 통제하게 될 가능성은 없는가, 즉, 자율적으로 작동하는 생태계로서의 성질을 잃고 전체 시스템이 특정 목적에 복무하게 될 가능성은 없는가라는 질문이다. 즉, 그런 관점에서 보조적 용도로 공영방송을 유지할 필요성을 논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미 이윤창출을 위한 사기업이 되어버린 신문지들이 유튜브에 대적하며 내놓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주장을 들을 게 아니라 말이다. 그러나 이런 논의 이전에 아직도 몇몇 특정 유튜브 채널의 정파성에 대한 걱정을 하는 단계다. 몇몇 특정 유튜브에 집중하는 이러한 관점이 근본적으로 놓치는 것은 유튜브가 언론이 아니라 생태계라는 사실이다. 생태계는 몇몇 특정 유튜브 채널이 좌지우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난 종이신문 기반 언론사 사이트에 들어가지 않은지 20년이 됐다. 포털을 통해 뉴스를 소비하지 않은지도 6-7년 됐다. 이렇게 말하면 그러면 뉴스를 어떻게 접하냐는 질문이 따라붙는다. 당연히 기성 언론사가 아닌 다른 채널을 통해 본다. 유튜브가 대표적이다. 그러면 유튜브는 저질스러운 곳인데 어떻게 그런 추잡한 것을 볼 수 있느냐는 식으로 생각한다. 말도 안되는 소리다. 유튜브는 플랫폼일 뿐이다. 유튜브에는 최고 수준의 정보 및 견해와 가장 저질스러운 정보 및 견해가 공존한다. 이 말은 유튜브가 가공되지 않은 빅데이터 창고라는 소리다. 그리고 그 데이터량은 아마 지상에서 가장 클 것이다. 한 개 언론사가 다루는 정보량을 1이라 하면 유튜브 내 정보량은 1조 정도된다고 말해도 과장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유튜브를 본다고 함은 유튜브 내 기성언론사의 뉴스까지 포함해서 본다는 뜻이다. 기성언론사는 자신들은 유튜버가 아니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유튜브를 보는 사람 입장에서 기성 언론사는 그저 여러 유튜버 중의 하나다. 기성 언론이 자신은 유튜버가 아니라고 하려면 일단 유튜브에서 자신들의 채널부터 다 삭제하고 볼 일이다. 유튜브로 뉴스를 소비한다는 것은 유튜브 내 기성 언론 채널까지 포함하여 유튜브를 통해 뉴스를 소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정보의 양에 있어 유튜브는 압도적인 양을 지니고 있다. 해외에서 제공하는 채널까지 포함하여 말이다. 대체 더 큰 것을 두고 포털뉴스란과 같이 더 작은 것을 봐야한단 말인가?) 그리고 바로 그러한 조건 위에서 정보에 대해 판단하고 옳고 그름을 가린다. 이 말은 유튜브에 공개된 뉴스 정보는, 기성언론사의 것을 포함하여, 곧이 곧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정보의 편집권은 보는 사람에게 있다.*
언론이라는 것이 대체 어디서 어떻게 발생하게 되었을지 생각해보자. 물론 난 역사학적 자료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언론의 신화'라 불러봄직한 내러티브를 상상해보는 것은 가능하다. 부족적 사회 속에서 살아가던 시절의 인류를 생각해보자. 부족의 크기는 크지 않다. 거의 전부가 서로 직접 아는 사람이라고 말해볼 수 있다. 이 경우 내 옆에 있는 사람이 한 말이 곧 뉴스가 된다. 뉴스는 뉴스 소스로부터 직접 청취된다. 이 단계에서는 그 어떤 중개자도 필요하지 않다. 그러나 공동체의 크기가 커지고 사회와 국가 그리고 국가 간의 관계가 발생하게 되면서 이야기가 달라진다. 사회 내에 내가 직접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내가 직접 아는 사람의 수보다 압도적으로 커진다. 이렇게 되면 뉴스 소스가 직접 내가 아는 사람일 수 없게 된다. 모르는 사람의 이야기를 전달해줄 중개자가 필요해지게 된다. 여기서 언론인 및 더 나아가 언론사라는 것이 등장하게 된다. 문제는 정보통신 기술이 부족한 단계에서는 중개인의 권한이 커지게 된다는 데 있다. 만약 뉴스 중개인이 이 뉴스는 중요하지 않다고 판단해 이야기를 전달하지 않으면 나는 그 뉴스를 알지 못하게 된다. 존재하지 않는 일이 된다. 이게 편집권의 권력이다. 중개인이 편집권을 쥐고 정보를 통제하는 형태가 기성의 언론이다. 정보통신 기술이 부족한 조건 속에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기성 언론에 대한 개혁을 하거나 아니면 새로운 언론사를 설립해야한다. 그러나 오늘날은 이조차 필요없다. 왜냐하면 기술이 발전하여 누구든 직접 심지어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사람의 이야기를 마치 아는 사람 이야기 듣듯 유튜브 및 소셜미디어 계정을 통해 전해들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다시 부족 사회 시절의 정보의 직접성이 복구된 것이다. 여기서 기성 언론은 자신의 특권을 지키기 위해 정보의 직접성에 문명화되지 않은 '야만적 정보'라는 이미지를 덧씌운다. 그러나 이들이 말하는 '야만적 정보'는 오늘날 모두가 그토록 소중하다고 여기는 '빅데이터'에 다름 아니다. 오늘날 필요한 것은 각자가 자신의 편집권을 발동해 빅데이터로부터 의미있는 정보 및 그에 대한 해석을 만들어내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다. 이에 비하면 '기성 언론이 필요한가 그렇지 않은가?'라는 질문은 비본질적이다. 여기서 질문은 단순하다: 직접 소통할 테크놀로지가 이미 도래했는데 무엇하러 언론 중개상의 상품을 구매해야한단 말인가? 이런 말을 해볼 수 있다: 이미 해외직구가 가능한데 뭐하러 비싼 돈주고 더 나쁜 상품을 국내 시장에 주어진 것 중에서 골라야하는가? 유튜브를 보는 사람 입장에 기성언론은 유튜버의 하나일 뿐이다. 물론 기성언론이 상대적으로 꽤 괜찮은 유튜버인 경우도 있다. 그렇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않다.
유튜브가 빅데이터 창고와 같다는 것은, 온갖 저질스러운 정보와 견해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뜻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정보의 자정 능력을 발휘하는 생태계와 같다는 뜻이다. 일시적으로 가짜뉴스가 범람하며 특정인에 대해 폭력을 행사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기도 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중간 지점을 되찾는다. 이는 데이터의 양이 생태계로 여겨질 만큼 크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다시 말해 유튜브 내에서 정보는 끊임없이 생성되고 사라진다. 고정되어 있지 않다. 바다의 크기가 충분히 크면 오염수가 방류되어도 정화시킬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물론 방사능 오염수와 같이 자연의 정상적 정화능력을 넘어서는 오염수에 대해서까지 허락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늘 문제의식을 가지고 바라봐야한다.) 여기서 김어준의 뉴스공장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기성언론에 찌든 사람들은 김어준의 뉴스공장을 일개 유튜버의 채널로 폄하한다. 이는 김어준을 극우 유튜버들과 같이 더럽고 못된 생각을 유통시키는 정파적 악의 근원으로 여긴다는 뜻과 같다. 물론 김어준은 기성언론과 다르다. 기계적 중립성이라 불리는 이해력(understanding)의 차원에서 기사를 쓰는 기성언론과 달리 김어준은 이성과 감성을 가지고 정보를 다시 판단하기 때문이다. 이해력은 누군가--예컨대, 권위의 대상인 권력자 검사들--가 '이것은 사실이야'라며 전해주는 정보를 가지고 '그렇다면 중립적으로 사실을 그대로 전달하자'라는 태도로 기사를 작성한다. 반면 이성(reason)은 '과연 그것이 사실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능력과 같다. 이성은 사실의 진위를 판단하기 위해 사실 자체를 구성하는 경험적 감성(aesthetic)의 차원으로 내려간다. 이성과 감성이 만나는 지점에서 태어나는 것이 미학이다. (물론 김어준은 온갖 것을 다 다룬다: 패션, 디자인, 음악, 오페라, 등) 김어준의 접근법이 기존의 이해력 기반 저널리즘과 같을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김어준의 사실에 대한 접근법이 이성이 감성과 맞닿아 있다는 말의 의미를 조금더 생각해보자. 이는 그가 이른바 '진보진영'의 여론을 자기멋대로 좌지우지하는 '괴수 우두머리'일 수 없다는 뜻과 같다. 기성언론은 그를 '객관적 사실' 혹은 '기계적 사실'에 대한 이해력(understanding)를 결여한 '죽창을 든 선동가' 정도로 생각한다. 그러나 유튜브는 그 자체로 살아있는 생태계다. 김어준이 전달하는 입장은 유튜브 내 언론을 통제할 수 없다. 그렇게 하기에 유튜브는 너무 큰 생태계다. 오히려 그 반대의 경우가 사실이다. 오히려 김어준이 전달하는 입장은 유튜브 내 개별 입장들의 중요한 한 부분을 유기적으로 아래에서부터 반영하는 채널에 가깝다. 유튜브 내에는 수없이 많은 입장들과 채널들이 있다. 여기서 엄청나게 다양한 정보와 입장들이 쏟아져나온다. 사람들은 늘 자연스럽게 이들 채널을 보고 지지와 반대를 표명한다. 댓글과 좋아요 등을 통해서. 그러면 보다 많은 좋아요와 댓글 등을 받은 영상은 알고리즘을 타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진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유튜브 내에는 언제나 늘 사람들 사이 공유되는, 옳고 그름에 대한 집단적 상식이 존재하게 된다. 바로 이 집단적 상식에 논평과 해설의 형태로 일종의 '부스터'를 달아주는 것이 김어준의 뉴스공장이 하는 일이다. 이는 어디까지나 그의 해석이 집단적 상식이 지닌 이성에 호소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만약 그의 해석이 대중이 느끼는 바와 맞지 않는다면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다. 20세기식 캐캐묵은 언어로 하자면 유튜브 내에서 김어준이 하는 역할은 그람시적 의미의 '유기적 지식인'이 행하는 역할과 같다. 이를 이해하지 못한 채 그를 '극우유튜버'의 폭력적 정파성과 같은 것에 기댄 유튜버로 여기는 것은 무식의 소치다.
유튜브는 생태계다. 내가 유튜브를 통해 뉴스를 접한다고 말할 때 그것은 내가 살아있는 생태계에서 직접 뉴스를 적접 접한다는 뜻과 같다. 반대로 내 입장에 '기성언론을 통해 뉴스를 접한다'는 말은 죽은 사실들을 가지고 만들어낸 모조품 생태계에서 뉴스를 접한다는 말로 들린다. '유튜브는 언론의 얼굴은 한 깡패인 반면 기성언론은 언론의 모범'이라고 하는 것은 우물을 보고 대자연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우물은 길들일 수 있다. 통제할 수 있다. 반면 대자연은 역동적이다. 인간이 다스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다치기도 하고 죽기도 한다. 반면 우물에는 누군가가 의도를 가지고 독을 탈 수 있다. 그 결과는 치명적이다. 우물을 먹는 사람 모두가 죽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자연에는 독을 타도 일부는 죽어도 전부가 죽지는 않는다. 너무도 크기 때문이다. 지금 기성언론인들이 유튜브를 두고 자기방어적 언어를 구사하는 것은 대자연의 숭고 앞에서 자기방어를 하는 것과 같다. 대자연은 고통을 가한다. 숭고는 고통스럽다. 반면 그렇기 때문에 숭고는 거꾸로, 이해력이 아닌, 이성을 발현시키는 원동력이 된다. 칸트적 의미에서 하는 말이다. 유튜브는 언론이 아니라 생태계다.** 이는 언론은 좋은 것이니 하루 빨리 생태계에서 문명사회 언론으로 되돌아가야한다는 뜻이 아니다. 대자연 생태계와 다시 마주한 우리는 언론이라는 우물로 돌아갈 수도, 돌아갈 필요도 없다. 남겨진 과제는 그저 다음과 같다: 우리는 생태계 속에서 직접 정보를 얻고 그로부터 미학적 판단을 발휘하는 법을 익혀한다. 자연과학과 수학, 문학, 그리고 미학에 대한 공부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독이 타진 우물과 같이 죽어가는 언론에 대한 시대착오적 논의가 아니라.
* 기성언론인들은 사람들이 기성언론을 더 이상 보지 않는 것을 두고 '우리 것은 보지 않으면서 유튜브만 보는 것은 정파적이다'라는 식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이는 별로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 말이다. 왜냐하면 유튜브가 등장하기 전까지 지난 100년간 바로 그들 기성 레거시 미디어가 말해온 것만 접해온 것이 지금 유튜브를 보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레거시 미디어를 보아온 사람들이 지난 10년 사이 유튜브를 통해 정보를 접한 후 '기성언론은 믿을 만하지 못하다'는 결론을 내린 결과가 지금 우리가 보는 언론에 대한 불신의 원인이다. 반면 기성언론인치고 유튜브를 제대로 보고 말하고 있다고 여겨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예컨대, 기성언론인들이 김어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있으면 그들이 김어준이 실제로 무슨 말을 하는지 그에 대해 별로 아는 바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정파적'인 것은, 기성언론에 중독되어 있다가 최근 와서 유튜브로 갈아탄 사람들이 아니라, 유튜브가 등장한 후 단 한번도 제대로 유튜브를 본 적 없이 자기들을 보지 않는 사람은 정파적이라고 주장하는 그들 기성언론인들이다. 그럴싸한 말로 포장되어 있지만 사실 그들의 주장은 논리적 본질이 아니라 실존의 문제에 훨씬 더 가까이 있다. 즉, 그들 주장의 핵심은 '나 좀 바라봐줘' 혹은 '제발 내가 옳다고 말해줘'--'본질 따위 상실하여 벌거벗게 된 나 좀 바라봐줘'--에 있다. 그들의 '나 좀 사랑해줘'에 대한 답변은 따라서 다음과 같다: '그럼 평소에 잘 했어야지!'
** 기성언론인과 유튜버 사이의 차이는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기성언론은 자신이 생태계에 속하지 않는다고 여긴다. 즉, 자신이 물질계가 아니라 천상계에 속한다고 끊임없이 주장한다. 동시에 물질계에 속한 정보는 '정파적,' 즉, '야만적'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한다. 반면 유튜버는 자신이 생태계의 일원일 뿐이라고 여긴다. 물론 생태계는 형식을 결여하고 있다. 형식은 정보를 소비하는 각자가 부여해야한다. 주어진 것이 옳은지 그른지 직접 판단해야한다. 기성언론이 떠먹여주는 것이나 먹는 일에 비하면 고달픈 일이다. 그러나 삶의 의미는 바로 이 자기만의 형식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나온다. 자연을 대하는 사람은 과학과 미학을 공부해야한다. 기성언론은 유사-자연, 그것도 빠트린 게 아주 많은, 질 떨어지는 3류 자연사박물관일 뿐이다. 자연의 거대함을 직접 느낀 사람이 동물원이나 식물원을 보고 만족할 수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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