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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은, [Romantopia]

by spiral 2019. 4. 12.

이 앨범이 벌써 14년 전 이야기다. 이 앨범이 내가 찾아들은 이상은의 마지막 앨범으로 기억한다. 그 이후 그녀의 음악이 별볼일 없어져서 안들은 것은 아니다. 자연스럽게 내 인생이 한 장에서 다음 장으로 넘어가듯 이상은도 내 음악 청취의 중심에서 물러나게 되었던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이 앨범은 내 20대의 가장 푸르렀던, 그리고 아직 풋풋함이 남아있었던, 시절의 한 장면으로 남아있다. 헨리 제임스의 [여인의 초상]에 나오는 마담 멀이라는 인물이 한 말이 생각난다. 마흔 살이 지나고 나면 감정을 느끼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게 그것이다. 판단력을 얻는 대가로 감정을 잃게 된다는 뜻이다. 반대로 말하면 마흔이 되기 전까지는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리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그 이전까지는 그저 감정과 열정에 휘둘린다는 뜻이다. 사실 내가 요즘 그렇게 느낀다. 새로운 음악을 듣고서 20대 때처럼 내것으로 받아들일 수가 없는 듯이 느낀다. 나와는 상관 없는 소리 같이, 남의 것 같이, 공허하게 느껴진다. 반대로 판단은 할 수 있다. 최근 거꾸로 음악보다 문학을 더 친밀하게 느끼게 된 이유가 이로부터 연유한다. 문학은 소리와 달리 오감에 직접 작용하는 물리적 쾌락의 층위를 결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감각적 형상의 층위를 결여하고 있는 해독되어야 할 문자로 이루어진 문학은 흔히 상상력이라는 것을 작동시킬 수 있기 위해서 최소한의 지적 작용을 거치지 않으면 안된다. 즉, 문자 코드로부터 감각 형상을 기억해내는 작업이 먼저 이루어져야 그것을 바탕으로 상상력을 가동시킬 수 있다. 즉, 문학은 기억의 문제다. 그것은 결코 감각의 직접적 경험이 아니다. 바로 이 '기억이라 불리는 내면의 작용'이 문자 세계의 논리다. 동일한 이유로 문학은, 감각 정보가 회상된 이후라고 하더라도, 추가적으로 이어지는 지적 종합의 작용이 없을 경우 결코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판단력이 있어야 그 끝에 감정을 느낄 수 있는 것이 문학이라는 뜻이다. 사실 그래서 난 개인적으로 소설은 마흔 살은 되어야 제대로 이해하여 느낄 수 있다고 믿는다. 모든 소설이 그런 것은 아니다. 흔히 대가라는 수준에 올라다고 여겨지는 작가들이 쓴 것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조지 엘리엇이나 헨리 제임스 같은 경우가 좋은 예다. (그러할진대, 20대 초중반의 청년이 석사 학위 논문으로, 예컨대, 헨리 제임스에 대해 논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하단 말인가? 그건 그가 하디의 [이름 없는 주드]에 나오는 '작은 시간 아비'(Little Time Father)와 같이 미쳐 돌아가는 세상의 시간 속에서 탄생하게 된 애늙은이라는 뜻이거나 아니면 그가 다만 기술적으로만 문학을 논하고 있다는 뜻이리라.) 소설의 반대편에 있는 것의 모습은 정확히 아래 들려오는 이상은의 음악과 같다. 아래 이상은의 음악에는 죽음과 상실 및 고립의 문제가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거꾸로 말하면, 그래서 내가 과거 20대에 아래 앨범을 마치 화창한 봄날과 같이 즐길 수 있었던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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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mantopia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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