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해보면 내 입장에서 공감할 수 있는 미국적-서양적 요소는 '소리'다. 그리고 그 소리는 언어가 아니다. (흥미로운 현상이지 않은가? 난 기본적으로 언어를 공부하는 사람이다.) 음악을 말한다. 아래와 같은 곡을 들어보라. 내가 '이상적'이라 생각하는 대중 음악적 요소를 많이 갖추고 있다. 사실 이는 많은 경우 한국의 대중 음악이 내게 주지 못하는 요소이기도 하다. 이로부터 내가 음악을 대하는 태도가 어떠한 것인지 유추할 수 있다. 내게 있어 음악은 생활 세계 내에서 발생하는 삶의 이야기를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생활 세계적 이야기가 잘게 끊어질 때 재생산되는 찰나의 발생을 의미한다. 예컨대, 동일한 음악가의 아래 2015년작 두번째 트랙을 들어보라. 음들이 모여 화음을 이루며 구태의연한 이야기의 층위를 만들어내려는 경향이 아직 강하게 남아 있다. 물론, "Mono"라는 곡에 메세지를 구성하는 조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유려하게 들린다. 그러나 그 유려함이 직진을 하며 시중종의 구조를 명확하게 직조해낸다고 말하기에는 무엇인가 적절치 않은 구석이 있다. 둘의 차이는 보컬의 운영에 있다. 두번째 트랙의 보컬 라인은 목소리의 톤에서부터 필요 이상으로 감상적이다. 클리세로 가득한 목소리다. 이 정도 되면 이미 '촌스럽다'고 느껴진다. 그에 비해 첫번째 트랙의 보컬은 감정을 담고 있지만 감상적이지는 않다. 밑바닥에서부터 노래를 다시 길러내려는 태도가 없지 않다. 물론, 후렴구라고 할 만한 부분에 가면 기교를 부리듯 톤을 높고 가늘게 뽑으며 사람들이 이미 친숙히 알고 있는 기존의 감정에 호소하려는 듯한 태도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것이 아무 생각 없이 조건반사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보자. 이 곡이 성공적인 이유는 아무 생각 없이 노래를 부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노래는 우리의 귀에서 감추어진 목소리를 발굴해내기 위한 것으로서 목청에서부터 아이가 처음으로 걸음마를 배우는 것과 같은 긴장감을 통해 조음되어야한다. 이러한 이유로 사실 많은 경우 오늘날 보컬은 불리워지지 않고 침묵할 때 더 많은 목소리를 들려준다. 목청이 터져나가는 보컬 중심 가요에서 거꾸로 목소리를 들을 수 없는 이유가 여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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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o (2018)
Noneofuscared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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